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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98932077
· 쪽수 : 119쪽
· 출판일 : 2018-07-25
책 소개
저자소개
책속에서
■ 유성호 해설
「신성과 자연을 통해 축조해가는 심미적 정형미학」에서
♣
흰 하늘 배경으로 선 겨울 대추나무처럼
때로는 시원스레 행간行間을 비워둘 일
낮에는 새 날아와 앉고 밤엔 별도 쉬어가게
― 「시론詩論」 전문
자신이 써가는 시에 대한 의미론적 고백이자 시쓰기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일종의 메타 시편이다. 시인은 빼어난 단수를 통해 자신의 시조를 “흰 하늘 배경으로 선 겨울 대추나무”에 비유한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때로는 시원스레 행간行間을 비워”두는 초상으로 현현해간다. 이때 ‘흰 하늘’은 순연한 백지를 연상케 하고, ‘겨울 대추나무’는 그 위에 씌어지는 강하고 힘찬 획을 환기한다. 그렇게 행간을 비우면서 완성되는 ‘시조’는 “낮에는 새 날아와 앉고 밤엔 별도 쉬어가게” 해준다. 결국 그에게 ‘시조’란 비움과 채움, 순간과 영원, 정착과 유동의 속성을 모두 포괄하는 삶의 형식인 셈이다. 따라서 그것은 “찾아가면/사라지고/돌아오면/거기”(「산」) 있는 편재적(遍在的) 존재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시인에게 출발 지점과 회귀 지점이라는 양면적 속성을 아우르고 있는 ‘시쓰기’라는 근원은, 현실에서는 경험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상상하게끔 해주고 불모의 시대를 견디게끔 해주는 에너지의 원천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생각과 경험은 시인으로 하여금 “때 묻은 수다들과도 이제는 결별訣別을 고해//고갱이, 아픈 고갱이만 가지 끝에 남을”(「만추晩秋의 노래」) 형상을 희원하게끔 하고, “몸마저 비우고 떠날”(「내가 거기 있었다」) 순간까지 “말수를 줄이고 줄인/노래”(「고목古木의 노래」)를 부르면서 살아가게끔 해줄 것이다. 모두 ‘시조’의 언어 미학에 대한 깊은 사유의 결실이 아닐 수 없다. 다음은 어떠한가.
적적한 산과 들에 불현듯 봄이 와서
물 오른 이 저 나무 돋아나는 새순처럼
많아도 진부하지 않은 눈매 어디 없을까
쉽사리 잠이 안 와 뒤척이는 긴 봄밤
뒷산에서 들려오는 소쩍새 울음처럼
가슴을 사뭇 찌르는 송곳 어디 없을까
마라도 낚시꾼이 밤새 잡은 다금바리
새하얀 접시 위에 가지런히 앉힌 분홍
점점이 쫄깃한 육질의 꽃잎 어디 없을까
― 「말 Ⅰ」 전문
이번에는 ‘말(언어)’에 대한 치열한 자의식을 드러내는 시편이다. 조동화 시인은 일찍이 「묵시?示」라는 작품에서 “음성이 아닌 음성 알아듣는 마음의 귀”와 “문자가 아닌 문자 보아내는 마음의 눈”을 통해 가 닿는 비밀을 중시하고, 나아가 “천지간 장엄한 전언傳言”을 온 마음으로 듣는 품에 대한 열망을 보여준 바 있다. 여기서도 시인은 “어디 없을까” 하는 질문의 반복을 통해 진정한 ‘말’을 탐색하고 소망해간다. 그가 추구하는 ‘말’은 ‘눈매/송곳/꽃잎’의 속성을 닮았는데, 가령 ‘눈매’는 봄을 맞은 산과 들의 나무에 돋아나는 ‘새순’처럼 많아도 진부하지 않은 것이고, ‘송곳’은 봄밤 뒷산에서 들려오는 ‘소쩍새 울음’처럼 가슴을 찌르는 것이고, ‘꽃잎’은 낚시꾼이 밤새 잡아 내놓은 다금바리의 ‘육질’처럼 쫄깃한 것이다. 이를 종합하면 신선하고 날카롭고 살가운 ‘말’의 은유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자신의 ‘말’이, 「말 Ⅱ」에서처럼, “뚝배기, 썬 파를 곁들인 진하고도 보얀 말”과 “쫀득한 고 단맛처럼 혀에 챙챙 감기는 말”과 “삼동을 삭혀야 제격인 쌉쌀하고 매콤한 말”이 되기를 열망한다.
결국 조동화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가능케 했던 내인(內因)이자 앞으로도 궁극적 귀의처가 될 ‘시조’ 혹은 ‘말’에 대한 깊은 사유를 수행해간다. 그 근원에 ‘시인으로서의 존재론’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으므로, 시인은 스스로 ‘시인’으로서 지켜야 할 태도와 ‘시쓰기’라는 행위의 궁극적 가치에 대해 노래하는 넓은 품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그는 ‘시는 (나에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스스로 답함으로써, ‘시’란 삶을 담아내는 거울이기도 하고 아득하게 세상을 향해 번져가는 파동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해간다. 우리는 조동화 시조의 기율이자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로써 확연하게 알게 된다.
♣♣
시골집 평상에 누워 우주를 펴듭니다
할머니 팔베개로 어린 날 읽었던 책
순금의 그 돋을새김 오늘 다시 읽습니다
활자며 배열이며 구두점에 또 행간…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 하나 없어도
여전히 살아 빛나는 저 신비의 두루마리
시간의 긴 강물 속 무수한 사람들이
저마다 지혜를 다해 읽어내곤 했지만
누구도 그 바른 뜻을 풀어내지 못한 문장
눈으로 바라보나 눈으로 읽을 수 없고
다만 가슴으로 어루만져 깨치는 언어
국자별 한 소절에도 하마 밤이 깊습니다
― 「우주를 읽다」 전문
그 신성의 기운으로 시인은 ‘우주’를 읽어내기도 한다. 시인은 시골집 평상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본다. “잊었던 고향 길이 손금처럼”(「가을 어귀에서」) 떠오는 순간이다. 그 옛날 할머니 팔베개로 읽었던 책으로서의 ‘우주’가 오늘도 “순금의 그 돋을새김”으로 다가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활자며 배열이며 구두점”에서 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행간마다 전해지는 “여전히 살아 빛나는 저 신비”도 시인이 궁극적으로 귀환하고자 하는 ‘신성’의 한 변형체일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무수한 사람들이 바른 뜻을 풀어내지 못한 ‘문장’은, 오늘도 눈으로 읽을 수 없고 가슴으로만 깨칠 수 있는 언어로 빛을 뿌린다. 밤하늘이 흩어놓은 별빛의 장관 속에서 시인은 자연 형상이 지닌 “자음과 모음 아닌 그냥 그 울음”(「하늘의 말」)을 듣기도 하고, “오로지 진북眞北으로만 열려 있는 나의 길”(「나의 길」)을 발견하기도 한다. 한결같이 “저 영원 속에 불멸로 서기 위해”(「미혹迷惑에 관하여」) 시를 써가는 시인이 순간적으로 “우주 속 자신의 위치를 훤히 꿰고 산 사람”(「바울」)이 되어가는 상상적 맥락을 암시해준다. 다음은 어떠한가.
1
모래 구덩이에서 갓 깨난 새끼 거북
한 쪽을 제외하면 다 죽음의 방향인데
용케도 물소리 들리는 바다 쪽을 향해간다
누구의 가르침도 그는 들은 바 없다
다만 날 때부터 지녀온 본능의 고삐
투명한 그 이끌림 따라 생명의 첫 길을 간다
2
사람의 뇌리 속에도 그런 고삐 들어 있나
평생 흑암에 살다 부신 빛 보는 순간
홀연히 마음눈 열려 좁은 길로 드는 사람
많이는 왜 저럴까, 의혹의 눈길을 주고
더러는 너무 변했다, 뒤에서 수군대지만
흔연히 모든 걸 두고 진리의 첫 길을 간다
― 「고삐에 관한 명상」 전문
이번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편은, 새끼 거북이 “본능의 고삐”에 따라 가는 “생명의 첫 길”과 인간이 마음눈 열려 걸어가는 “진리의 첫 길”을 상동적(相同的)으로 은유하고 있다. 새끼 거북은 모래 구덩이에서 갓 깨어나 누구에게 배운 적도 없는 본능에 따라 물소리 들리는 바다 쪽을 향해 생명의 첫 길을 간다. “투명한 그 이끌림”이 그네들을 인도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뇌리에도 고삐가 들어 있어서 “평생 흑암에 살다 부신 빛 보는 순간”을 만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시인은 생각한다. 그렇게 “좁은 길”이기도 할 “진리의 첫 길”은 시인이 일관되게 갈구해온 신성의 이미지를 현상한 것일 터이다. 그만큼 조동화 시인은 “놀랍고 눈부신 불멸”(「불멸不滅을 위하여」)과 “눈부신 빛의 화살”(「아침」)을 향하여 오늘도 우리 안의 ‘고삐에 관한 명상’을 거듭하고 있다. “삼동 내/언 독방에서/뜨겁게/제 몸 벼려”(「마늘」)야만 겨우 가 닿을 수 있는, 실제로는 “참으로 사람의 힘으론 헤아릴 수 없는 일”(「역대기歷代記를 읽으며」)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근대적 인간의 영혼에 형성된 ‘내면의 진공’(inner void)을 치유하는 대안적 사유 방식으로서 ‘종교적 상상력’의 의미는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모든 종교적 상상력이 우리의 경험 세계를 원초적으로 구성하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반응이라면, 신성의 배제를 통해 신성을 대체하려고 했던 근대의 이성 중심주의는 종교적 상상력의 무화(無化)를 통해 깊은 자기 소외를 가져왔을 뿐이다. 조동화 시인의 중심적인 시세계는 지상의 혼돈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에 대한 치유의 열망으로 나타나는데, 그 방법으로 그는 오랜 시간을 영혼에 쌓으면서 신성으로의 도약을 적극 꾀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속성은 신적 존재를 찬미하는 단순성에서 벗어나, 지상의 혼돈과 상처를 넘어서려는 열망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 신성의 침묵을 읽는 눈이 그의 시조 안에 깊이 출렁이고 있다.
♣♣♣
바다가 구름을 피워 바람에 실어 보내고
구름은 비와 눈으로 철 따라 땅을 적실 때
물들은 낮은 곳으로 먼 순례를 시작한다
목마른 자에게는 한 잔의 생명으로
뿌리는 자에게는 소담스런 열매들로
베풀고 안겨주면서 먼 길을 더듬어간다
식물의 물관을 흘러 얼마는 날개를 얻고
햇볕에 닳고 닳아 얼마는 구름이 돼도
끝내는 땅으로 내려 느릿느릿 기어서 간다
투명한 한 벌 옷이 남루가 될 때까지
독毒으로 전신이 검은 멍이 들 때까지
첩첩한 산굽이 돌아 제 아픈 등 밀고 간다
― 「강 Ⅰ」 전문
‘강(江)’은 원래 시간이나 역사의 유장한 흐름을 비유하는 데 많이 쓰여왔던 상징이다. 시인은 ‘구름/바람/비/눈’을 지나 땅을 적시며 낮은 곳으로 순례를 떠나는 ‘강’을 바라본다. 물론 ‘강’은 “목마른 자에게는 한 잔의 생명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뿌리는 자에게는 소담스런 열매들로” 안착하기도 한다. 마치 “잘 익힌 제 열매들을 후둑후둑 던지던 길”(「오솔길 추억」)처럼, ‘강’은 그렇게 타자들에게 생명의 표징으로 남아 있다. 얼마는 날개를 얻어 구름이 되기는 해도, 마침내 땅으로 내려 흘러가는 ‘강’은 “투명한 한 벌 옷이 남루가 될 때까지” 자신을 밀어가고, “독毒으로 전신이 검은 멍이 들 때까지” 자기의 아픈 등을 밀고 간다. 여기서 시인이 주목하는 ‘강’은 ‘생명/열매’를 선사하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남루/멍/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마치 “순은純銀의 말씀에 떨군 몇 방울”(「독에 관하여」)의 독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신고(辛苦)를 안고 “고통의 고비마다 아로새긴 흔적들”(「상처의 힘 Ⅰ」)을 그러안은 채 “상처들의 울력”(「상처의 힘 Ⅱ - 야구공」)을 안고 흘러가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강’이 가지는 이미지군(群)이지만, 그것은 곧 시인 스스로 가지는 “준엄한 명령에 벗고 떠날 이 단벌”(「몸」)과도 같은 자기 이해나 “깊은 밤/더 많은 생명/기다리는/산 아래로”(「산 샘물」) 가고자 하는 신성 지향의 차원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융융하고 가없이 아름답다.
먼 저쪽 구름 뒤에 누가 숨어 지휘를 하나
어느 순간 물을 차며 잇따라 솟구치더니
유유히 하늘을 나는 혹등고래 한 마리
눈부신 노을 속을 몇 바퀴나 돌고 돌아
마주 오는 암코래와 나란히 방향을 튼다
별들이 돋는 곳까지 어깨 겯고 가자는 듯
흡사 한 몸 같은 수십만의 점, 점들
펼쳤다 감아쥐었다 다시 힘껏 흩뿌려도
끝끝내 헝클리지 않고 아득히 멀어져간다
― 「가창오리 군무群舞」 전문
겨울의 금강 하구에는 아침저녁으로 가창오리들의 어마어마한 군무가 펼쳐진다는데, 시인의 시선은 그것을 “전후방이 따로 없는”(「고질痼疾에 대하여」) 거대하고도 웅장한 모습으로 비유해간다. 구름 뒤에서 누가 숨어 지휘를 하고, 새떼들은 한순간 물을 박차며 솟구치더니 “하늘을 나는 혹등고래 한 마리”의 형상을 취한다. 마치 “커다란 멍에 하나를 그려 뵈며 가고”(「가는 기러기」) 있는 것처럼, 새떼들은 눈부신 노을 속을 돌고 돌아 별들이 돋는 곳까지 가려고 하는 듯하다. “한 몸 같은 수십만의 점, 점들”이 펼쳐졌다 모아졌다 다시 흩뿌려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순간, 시인은 “끝끝내 헝클리지 않고 아득히 멀어져”가는 그네들의 움직임을 우주의 오케스트라로 본 것이다.
이처럼 사물과 사물 사이에 끼인 자연스러운 원리를 따라가 그것들 사이의 내적 연관성을 발견해가는 조동화 시인의 사유와 감각은, 우리 시대 시조의 종요로운 몫으로 자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주체와 대상을 통합시키는 이러한 경험 유형은 한편으로는 기억이라는 활발한 운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한편으로는 신성한 존재에 대한 특별한 믿음과 사랑에 의해 재현되어간다. 그것이 그냥 단순하게 정태적인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현재형을 활력 있게 드러내는 데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