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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04906886
· 쪽수 : 392쪽
· 출판일 : 2016-04-05
책 소개
목차
서(緖)
제 一 장. 명계(冥界)로 가는 길
제 二 장. 거래
제 三 장. 만인경(萬人鏡)
제 四 장. 석산화(石蒜花)
제 五 장. 선택
제 六 장. 태양을 집어삼킨 만월
제 七 장. 서왕모(西王母)
제 八 장. 인간계
제 九 장. 전조(前兆)
제 十 장. 신들의 전쟁
제 十一 장. 화마(火魔)의 끝
결(結)
외전(外傳) - 윤회(輪廻)
외전(外傳) - 제균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이 이야기는 중원(中原)의 패권을 지닌 주(周)나라 의왕 하(下)대로부터 시작한다. 선(先)왕 공왕(共王)은 치세 초반엔 영토 확대에 총력을 기울였고, 치세 말엔 원정을 미루고 내정에 충실했으나 갑작스런 병으로 결국 급사하게 되었다. 하여 어린 나이에 주(周)의 7대 왕이 된 의왕(懿王)의 치세는 외척의 득세에 밀려 왕권이 약화되었고, 험윤(??)의 공격을 빈번하게 받게 되어 혼란스러워졌다.
그 후, 건국 176년. 북방 이민족인 험윤은 계략을 바꿔 주(周)나라의 가장 외벽에 위치한 동쪽을 침공했다. 침공한 지 채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나라의 심장에 위치한 주(周)의 황궁에 급보(急報) 하나가 날아들었다. 마을 하나가 전멸했다는 소식이었다.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가슴을 움켜잡고 쓰러졌던 몸을 어렵사리 일으킨 바리(鉢里)는 순간 말을 잃었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죽음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귀기(鬼氣)스러운 풍경이었다.
정갈했던 마을은 불에 타 옛 모습을 잃었고, 그 뼈대만 간신히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매서운 겨울바람으로 꽁꽁 얼어 있던 땅은 수백 구의 말발굽 자국으로 움푹 패여 있었고, 그 위엔 검붉은 피가 웅덩이를 이뤘다. 그리고…… 그곳에 목숨이 다한 마을 사람들의 시체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생명이 다한 곳. 이제 갓 열둘이 된 바리를 제외하고는 한 터럭의 숨결 하나, 종알거리는 새소리 한 번 들리지 않았다. 여기까진 ‘평범’한 인간이라면 볼 수 있는 상황이자 바리의 왼쪽 눈, 검은 흑안(黑眼)이 보여주는 잔인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차가운 칼바람이 재로 화한 마을을 휩쓸고 바리의 긴 앞머리까지 날려 보냈다. 그 속에서 바리의 오른쪽 눈이, 저승길을 본다는 귀안(鬼眼)이 핏빛보다 더 붉은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몸이 주체되지 않았다. 입안이 메말라 건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비명 섞인 절망과 안타까움을 토해내며 대지를 울렸다.
“……보, 보여주지 마…… 보여주지 마! 보이지 말라구!”
죽은 이들의 몸 위로 작은 등불 같은 것들이 떠올라 있었다. 반딧불이 보단 크고, 그보다 더 투명한 것. 땅 위를 덮는 것이 붉은 피와 죽은 이들의 몸뚱이라면, 하늘을 뒤덮는 것은 길 잃은 ‘그것’이었다. 붉은 대지와 대조되는 그것은 하늘을 메꾸며 두둥실 떠다녔다.
바리는 저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니, 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보여주는 건 평범한 사람은 볼 수 없는 것, 바로 죽은 자들의 세계다. 이승에서 끊어진 그들의 목숨이 저리 떠돌며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이다. 바리는 멍하니 한 단어를 입안에서 읊조렸다.
‘사령(死靈)…….’
태어나 처음 무언가를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의 곁에 있었던 것들이 지금 바리의 모든 세상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바리가 슬픔에 입술을 깨물었지만, 입에서 새어나오는 신음 소리까
지 다 막을 순 없었다.
“흐, 흐윽……!”
전멸(全滅).
이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은 현실. 그들의 죽음은 이제 현재이자 과거가 되어갔다. 바리의 슬픔에 젖은 시선이 쓰러져 있는 시신으로 향했다. 바리가 아는 모든 이들이 죽었다. 이미 싸늘하게 식은 그들의 얼굴엔 차마 지우지 못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슬픔이 얼룩져 있었다.
그들을 멍하니 보고 있던 바리는 순간 의문이 들었다.
‘저들은 죽었어. 그런데 난?’
숨이 점점 막혀왔다. 바리가 제 가슴을 움켜잡았다.
‘나는 살아 있다. 내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어.’
아니야, 아니다. 이것이 정녕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나?
가슴을 움켜잡은 손이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손끝에 닿는 무언가에 꿰뚫린 흔적에 온몸이 전율했다. 그리고 마치 잔상처럼 무언가가 눈앞을 스쳤다.
“꺄아아악!”
“제발 날 좀 살려줘!”
마을 사람들의 비명. 한 사람 한 사람 차디찬 땅에 쓰러져가고 붉은 혈흔이 땅을 메운다.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멍하니 현실을 바라보던 바리의 심장이 푸욱-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창살에 꿰뚫린 것은 찰나였다.
그렇게 바리는 또 하나의 현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죽었으나 죽지 않았다. 그녀 역시 그들과 같이 침입자에게 ‘살해’당했으나 멈춘 심장은 어느새 다시 뛰고 있었다. 그녀가 정신을 잃은 것도
단지 몸이 꿰뚫린 것에 대한 ‘충격’때문이었다.
“뭐야, 이게…….”
‘믿을 수 없어. 난 죽을 수도 없단 말이야?’
견딜 수 없는 사실을 결국 인지하고 만 바리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몸을 추스르지도 않고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흐, 흐어어엉!”
간헐적으로 내뱉는 울음으로 인해 몸이 떨리자, 반동으로 긴 앞머리가 옆으로 쓸리며 그 속에서 눈물로 얼룩진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바리는 자신의 오른쪽 눈을 뜯을 듯이 잡아챘다.
“모든 것이 이 오른쪽 눈 때문이야. 이 붉은 눈동자 때문에!”
원망스럽다, 이 붉은 눈동자가. 자신이 평범치 않다는 것을 이 눈동자 때문에 깨닫고 말았다. 아니다. 애초에 이 눈 때문에 배척받아 온 것이다. 그리고 이젠 이 모든 상황이 자신의 눈동자 때문인 것 같았다. 정말로 마을 사람들의 말처럼 자신은 있어선 안 되는 존재였던 건가.
‘싫어, 싫다고!’
바리는 스스로를 부정했다. 전신을 휩쓰는 슬픔에 자기 자신을 가눌 수가 없었다. 음습한 과거의 기억이 현재의 격한 감정과 격돌되어 함께 휩쓸려 갔고, 눈물로 얼룩져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바리는 점차 자제력을 잃었다.
이성이 간신히 막고 있는 마지막 경계가 사라지자, 붉은 기운이 귀안에서부터 넘실대며 흘러나왔다. 바리는 이 눈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모른다. 다만, 이 눈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는 어렴풋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허공을 맴돌던 사령들이 ‘친숙’한 기운에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죽음, 이해되지 않은 상황. 죽은 육체에서 튕겨 나온 영혼들이 자신들의 혼란을 잠재우고자 일제히 바리에게로 다가섰다. 이미 제대로 사고할 능력을 상실한 바리는 그 상황을 묵묵히 바라봤다. 힘이 제어되질 않았다. 점점 귀안에서 흘러나온 붉은 기운이 바리의 몸을 둘러쌌다.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점차 들려왔다. 폭주된 힘으로 인해 귀가 열린 것인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그들이 바리에게 구걸하는지는 구별 가지 않았다. 죽은 이의 목소리가 바리의 귓가를 감쌌다.
[살…… 려줘.]
살려주고 싶어도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다. 들리지만 대답을 해줄 수 없는 것이 슬프고 고통스럽다.
바리와 가까이 있을수록 그들의 모습이 구체화되어 갔다. 이젠 저들의 살아 있을 적 모습까지 흐릿하게나마 보였다. 바리는 그런 그들이 반가웠다. 이렇게라도 다시 만날 수 있음에 기뻤다. 그리고…… 괴로웠다.
그들이 애절하고도 처절한 눈으로 바리를 바라봤다. 늙은 노파의 모습을 한 사령이 손을 뻗어 바리를 잡으려 했으나 잡히지 않았다. 이어 다급해진 다른 마을 사람들이 바리에게 매달리고자 했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그들이 절망스런 눈으로 바리를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는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바리의 오른쪽 붉은 눈동자 귀안(鬼眼)을.
[구해줘…….]
그들의 감정을 표현하듯 사령들의 모습이 사념(思念)에 물들어 붉게 변해갔다. 그것은 핏빛보다도 더 붉은 절망의 색이었다. 잠시 끊어졌던 눈물이 다시금 바리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와 함께 또 다른 목소리가 바리의 기억 속에서 외쳤다. 저 이들이 살아 있을 적, 그녀를 향해 늘 외치던 말들이었다.
애절한 소리와 경멸과 두려움에 가득 찬 소리가 교차한다. 가슴에 진득하게 남아 있는 상처와 새로운 상처가 바리의 심장을 속절없이 할퀴었다.
“이 역귀(疫鬼)!”
[제발, 우리를…….]
“꺼져라, 이 요괴! 이 역귀야!”
[넌, 넌…… 우리를 볼 수 있잖아…….]
“사악한 저 붉은 눈동자! 저 눈동자가 우릴 죽일 거야!”
꿰뚫린 심장보다도 가슴을 옭아매는 과거의 잔상이 바리의 숨을 억압했다. 귓가엔 죽은 이들의 경멸과 두려움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고, 시야엔 그들의 매서웠던 시선만이 가득했다. 그들이 자신을 향해 던지는 돌멩이가 잔상처럼 스쳤다.
언제 이 마을로 흘러들어 온지는 모른다. 어느 순간부턴가 자신은 이 마을에 존재했고, ‘마을에 버려진 아이’라 하여 ‘바리(鉢里)’라 불려왔으며, 이내 배척받았다. 남들과 다른 눈동자를 가졌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의 경멸과 두려움이 가득 담긴 시선을 받았다. 하여 사랑받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랑받지 못했다.
메꿔지지 않은 상처는 더욱더 벌어져 갔다. 바리는 이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괴롭다. 저들이 저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려서 괴롭고, 끝끝내 사랑 한 번 받지 못하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에 괴롭다.
‘싫어. 이제 듣기 싫어. 그만 가. 그만 사라져 줘, 제발……!'
바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몸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이미 한 번 폭주하기 시작한 귀안은 그녀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점점 죽음의 향기가 바리의 코끝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리의 몸에 사령들이 감겨왔다. 있을 수 없는 그들의 촉감이 느껴져 진절머리가 났다. 그렇게 두려움이 바리를 잠식했다.
‘다가오지 마. 다가오지 마, 제발! 세상에 정말로 신이 있다면, 제발 나를 도와줘!’
“도와줘!”
억눌린 목소리로 기어이 토해내고 마는 간절한 염원.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이 멈췄다. 귓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목을 조르던 그들의 촉감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갑작스런 상황에 바리가 슬쩍 눈을 뜨자, 눈앞에 보인 것은…… 무한한 정적이었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사령들이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죽기 직전의 모습을 띄었던 그들의 모습이 사르륵 허물어져 다시 작은 등불 같은 영혼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갑작스런 상황에 바리가 멍하니 사령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오른쪽 눈을 쓰다듬었다. 귀안은 여전히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하고 있는 상태였다. 오히려 핏빛으로 물든 귀안이 더 붉고 진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이어가며 짧은 시간이 지났다. 갑자기 사령들이 일제히 동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그들의 갑작스런 행동에 바리 역시 고개를 돌렸고, 이어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점차 커져갔다.
가장 먼저 그녀가 본 것은 해가 사라지는 광경이었다. 해가 지는 것이 아닌, 푸른 달이 해를 먹는 모습이었다. 그래, 말로만 듣던 일식(日蝕)이 그녀의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대기를 가득 메운 양기가 음기에 사로잡히고 그 음기는 음산한 향을 풍기며 자욱해졌다. 곧 이어 두구구구- 하는 소리가 하늘과 땅에 울려퍼졌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바리가 땅을 바라보니, 차갑게 메말랐던 대지가 갈라지고 있었다. 명계(冥界)의 음습한 향기가 대지 위로 새어나오면서 인간계와 명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바리는 불현듯 그 옛날, 어느 늙은이가 지나가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인간계, 그래 이곳 주(周)나라 서쪽 끝엔 선계와 인간계를 잇는 곤륜산의 입구가 있고, 동쪽 끝엔 인간계와 명계를 잇는 영혼의 길이 존재하지.”
이곳은 인간계의 가장 동쪽 끝. 하늘을 비추는 두 개의 별이 떠오르는 동쪽 끝이자 명계와 인간계의 접점이었다. 하여 양기보다 음기가 다른 곳보다 많아 마을 사람들이 귀신을 보는 일이 더러 있던 곳이기도 했었다.
바리는 왜 갑자기 그 말이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릴 적부터 은연중에 그 늙은이의 말이 진실이라 생각했었고, 그말이 지금 현실로써 눈앞에 증명되고 있었다. 순간 귀안이 따갑게 아려왔다. 몸 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귀기(鬼氣)가 자신에게 속삭였다.
[보이지? 너의 근원이란다. 너를 만들어낸 자가 속한 세계야. ‘저것’이 바로 죽은 자들의 세계 ‘명계(冥界)’란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위해, 죽은 자들의 세계가 지상 위로 올라오는 것이야.]
그것의 말처럼 땅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그 끝까지 차츰 갈라졌다. 땅을 가르며 그 사이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대기 중에 넘실댔다.
명계의 향기에 취한 영혼들이 땅을 열며 밖으로 나오고자 하나 무언가의 힘에 저지당했다. 반대로 지상에 있던 사령들은 어떻게든 명계로 안 끌려가기 위해 몸을 비틀었지만, 이 역시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가로막혔다.
마침내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지고 어둠만이 자욱해졌다. 오직 사령들의 빛만이 세상을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바리는 보았다. 저 멀리, 균열이 시작된 그곳에서부터 우아하고도 장엄하게 명계(冥界)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그를…….
윤기 나는 길고 검은 머리칼이 반짝이며 바람에 휘날렸고, 붉은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빛나며 모든 것을 옭매었다. 바리는 그의 마력에 걸린 것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두렵고도 아름다운 사내였다.
마음속에서 귀기가 속삭인다. 아니, 이번엔 바리의 온몸이 속삭이는 것이다.
[왔어. 왔어. 그가 왔어, 명계의 주인! 죽은 자를 다스리는 염라대제(閻羅大帝)! 그가 지상에 강림했어!]
염라대제가 드디어 대지에 발을 디뎠다. 바리와 같은 붉은 눈동자, 그러나 바리의 귀안보다 더 불길하고도 강력한 힘을 가진 그의 두 눈동자가 지상의 모든 것을 억눌렀다.
“이리로 오라, 명계에 속할 자들이여.”
그의 말 한마디에 영로(靈路: 영혼의 길)가 환한 빛을 내며 대지 위로 길게 형성되었다. 길고 긴 그 영로는 바리가 있는 곳에서부터 염라대제, 아름다운 명계의 신이 있는 곳까지 이어졌다.
모든 사령들이 마치 속박에 걸린 듯 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경직되어 있는 모습으로 본능적인 끌림에, 혹은 거부하고 싶지만 거부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는 것처럼 보였다.
바리는 멍하니 이 상황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렸다. 이윽고 그녀는 사령들과 함께 영로 위에 올라탔다. 점차 그녀의 걸음이 빨라지다 이내 뛰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만 저 사내를 만나고 싶은 욕구가 자신을 가득 메울 뿐이었다.
“허, 허억…….”
얼마나 뛰었는지 모른다. 갑작스런 뜀박질에 놀란 폐가 조여왔다. 그 고통에 자연스레 얼굴이 찡그려졌지만 바리는 계속해 뛰었다. 마침내 걸음을 멈췄을 땐, 마을의 가장 외곽에 위치한, 거대하지만 앙상한 가지가 눈에 띄는 벚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그리고 그 벚나무 아래 군왕의 위압감을 내뿜는 아름다운 남신(男神), 염라대제가 서 있었다.
“아!”
염라대제와 바리의 눈이 마주쳤다. 바리가 숨을 멈추며 짧은 단말마를 삼켰다. 자성에 이끌리듯 이곳에 당도한 사령들은 간신히 몸을 비틀어 바리의 곁에서 맴돌았다.
염라대제가 예기치 못한 존재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바리의 오른쪽 귀안에 머무는 듯했다. 북풍한설보다 차가운 그 눈길에 바리는 온몸이 얼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존재군. 넌 무엇이지?”
“……바리…….”
그러다 잠시 멈칫하곤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을 바꿨다.
“아니, 역귀. 역귀랬어요, 사람들이…….”
그녀의 말에 염라대제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가 손을 들어 바리의 곁에 맴도는 사령들을 가리켰다. 염라대제의 시선을 받은 사령들이 두려움에 파랗게 질려갔다.
“역귀? 틀렸다. 역귀 따위가 사령을 거느릴 순 없다.”
바리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전, 전 이들을 거느린 적이 없어요.”
“거느린 것이다.”
바리의 부정을 맞받아치는 염라대제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네 몸 속에 있는 귀신의 기(氣)가 저들을 이끄는 것이지. 그래, 차라리 반인반귀라 하는 것이 옳겠구나. 인간의 기와 귀신의 기가 섞여 있는 육체라……. 하여, 죽을 수도 없는 겐가?”
반인반귀(半人半鬼).
그의 말에 바리가 눈을 깜빡였다. 드디어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는 기쁨, 그리고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바리가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피는 멈췄으나, 상처는 여전히 벌어져 있었다. 날카로운 창에 찔려 가슴에 뻥 뚫린 상처가 만져졌다.
염라대제 율(栗)은 눈앞에 보이는 새로운 존재가 퍽 흥미로웠다. 잔잔한 바다와도 같던 권태로운 일상에 작은 해일이 몰아쳐 왔다. 인간계의 갑작스런 전쟁으로 윤회의 고리가 엉켜 버리고 말아, 수고스러움을 무릅쓰고 길 잃은 사령들을 수습하러 지상으로 올라온 보람이 있었다.
‘이치를 어긴 존재라……. 세상에 반쪽짜리 존재가 또 존재한다니…….’
무심과 흥미. 권태와 잔인함. 차가운 심장과 뜨거운 광기가 융합되지 못하고 율의 몸속에서 자맥질하기 시작했다. 율은 자신의 상처를 쓰다듬는 바리를 잠시 지켜봤다.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희한한 것이 나타나, 자신의 나른함을 깨웠다. 작은 꼬마 계집의 오른쪽 귀안이, 형형하게 붉게 빛나는 그 눈동자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명계의 신들만이 가질 수 있는 귀안을 비록 한 짝이라도 가지고 있는 계집. 존재도, 그리고 능력도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것.
이윽고 율의 시선이 계집 곁을 맴도는 사령들에게로 돌아갔다. 사령들이 흠칫하며 바리 뒤로 숨었다.
‘고작 죽은 영혼 주제에 사념을 품다니. 이것도 저 계집의 영향인가?’
자신의 명을 거역하는 것들은 필요 없다. 율이 사령들을 없애기 위해 손을 들어 힘을 응축했다. 공기가 진동하며 음기로 가득찬 명계의 기운이 그의 왼손에 점차 모였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것은 바리였다. 바리가 명계의 기운에 두려움을 느끼며 덜덜 떨리는 입을 열었다.
“지금 무, 무슨 짓을 하시려는 겁니까?”
“저것들을 없애려 한다.”
“어, 어째서요? 저들을 명계로 이끄는 것이 염라대제께서 하셔야 할 일이 아닙니까?”
예상치 못한 율의 대답에 바리는 당황하여 손을 뻗어 사령들을 뒤로 감췄다. 그녀의 행동에 율의 눈썹이 꿈틀했다. 누군가가 이리 자신의 행동에 토를 다는 것은 신이 아닌 존재치곤 처음이었다. 아니, 설령 신이라 하여도 이리 무례할 순 없다.
“사념에 물든 것들은 명계에 초대받지 못한다. 그래, 너로 인해 사념에 물들었구나. 너의 존재가 저이들에게 허튼 희망을 심어주었겠지. 사령은 본디 투명한 존재. 그것은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한데, 보아라. 저들의 영혼은 무슨 ‘색’을 띄느냐?”
바리가 고개를 돌려 사령들을 돌아봤다. 사념. 그래, 이들은 지금 사념에 물들어 있었다. 율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 바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안 돼…….’
또다시 바리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또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가 염라대제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자신의 과오다. 귀안을 제어하지 못한 자신의 미숙함이 저들에게 허튼 희망을 심어주었다. 하여 결국 저들의 마지막 안식까지 빼앗고 말았다. 바리가 허물어져 가는 몸을 지탱하고자 두 팔로 땅을 짚었다. 그러곤 간절하게 율을 향해 빌었다.
“몰랐습니다. 저 때문에 명계에 가지 못한다니……. 제발, 제발 저이들에게 안식을 허락해 주십시오, 명계의 주인이시여. 제발 저들을 용서해 주세요…… 흐, 흐윽…….”
율은 아이의 질질 짜는 모습이 퍽이나 마음이 들지 않았다. 울음소리라면 명계에서 팔백여 년의 시간 동안 질리도록 들어왔다.
‘감히 타인의 용서를 대신 빌다니.’
자신이 여태 보았던 인간들은 절대 저리 남을 위해 빌지 않았다. 바리의 몸 위로 인간의 추악함이 겹쳐졌다. 점차 바리를 바라보는 율의 시선에 어두운 빛이 차올랐다. 그녀가 자신의 오만함을 깨닫고, 인간 특유의 이기심으로 덜덜 떠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결국 그는 딱 한 번, 변덕을 부려보기로 했다. 신에게는 변덕이, 그러나 인간에겐 신의 시험이 될 것이다. 이것은 신이 내리는 시험이자 거래였다. 통과한다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죽음이 찾아오리라.
율이 손 안에 모아놓은 힘을 증발시켰다.
“좋다. 들어주지.”
율의 대답에 바리가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눈에 보인 율은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차갑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름답고도 이질적이라 소름이 돋았다.
“단, 대가가 필요하다.”
“무, 무슨 대가를 원하십니까? 저에게 있는 것입니까?”
“있지, 있고말고.”
“무엇을 원하시옵니까?”
율이 검지로 바리를 가리켰다.
“너.”
“네? 저를…… 말입니까?”
“대가는 동등해야 한다. 저들이 소중하다면 대가로 너를 내놓아라. 단, 지금 널 명계로 데려가진 않는다. 내가 원하는 순간에 내 것이 되면 된다. 그 순간이 언제든.”
자아, 대답해 보라. 율이 매혹적인 목소리로 요구했다. 그는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계집이 자신의 오만을 깨닫고 철저히 무너지는 모습을……. 그럼 그땐 흥미고 뭐고 계집을 죽여 버리고 저 사령들을 연옥의 불로 태워 버리고 명계로 내려가리라.
그러나 바리의 대답은 율의 생각을 빗나갔다. 바리가 무척이나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더 이상 그녀의 눈꼬리에서 눈물방울이 흘러내리지 않았다.
“좋아요. 저로써 저들이 안식을 찾을 수 있다면…… 드릴게요. 드리겠습니다.”
바리는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 기뻤다. 마을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도. 마음 깊은 곳에선 자신이 이리 행한다면, 마지막의 마지막엔 저들에게 사랑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들었다.
“……평범하지 않는 계집이로고.”
율의 눈동자가 한없이 가라앉았다. 인간이란 이기적인 존재라는 명제에 의외의 곳에서 예외가 생겨났다. 결국 율은 이번만큼은 적어도 저 계집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생겼다가 이내 곧 지워졌다.
“재미있군. 좋다.”
순식간에 율이 바리의 코앞에 나타났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바리의 턱을 잡곤 시선을 맞췄다.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작은 몸집은 율의 몸에 비해 현저히 작았다. 율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약간은 아플 게다.”
미처 율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일은 벌어졌다. 율이 잡고 있던 바리의 턱을 제 쪽으로 끌어당겨 가느다란 아이의 목에 짧고도 농밀한 입맞춤을 선사했다. 아찔한 순간에 바리의 얼굴이 붉게 물들려는 찰나였다. 원인 모를 고통이 입맞춤을 당한 자리에서부터 퍼져 나왔다.
“으윽……!”
숨을 빼앗아갈 듯한 진득하고도 뼈아픈 고통에 바리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고통스러워하는 바리의 모습을 율이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짧은 시간이 지나, 입맞춤을 당한 그 자리엔 고통 대신 푸른 주인(主印)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인(主印)이다. 네가 내 것이라는 증표이지. ……그리고 하나 더.”
‘하나 더’라는 말에 바리의 몸이 움찔했다. 하지만 의외로 율의 시선은 한결 풀려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율이 시선을 옮겨 바리의 가슴 언저리에 벌어진 상처를 내려다봤다.
“뭐, 이건 신의 작은 선물이라 해두지.”
이것 또한 한순간의 변덕에 불과하니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바리의 목에 새겨진 주인이 밝게 빛나며 바리의 상처를 치유해 나갔다. 이어 율의 몸이 바리에게서 떨어졌다. 단 한 걸음에 율은 이미 바리와 서너 보 떨어진 거리에서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거래는 성립되었다. ……이젠 차디찬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올 때지.”
그의 말이 끝맺음과 동시에 앙상했던 거대한 벚나무가 때 아닌 꽃을 맺기 시작했다. 하늘하늘 떨어지는 꽃잎이 바리의 근처를 맴돌다, 이내 북풍을 타고 날아갔다. 그 속에서 율의 목소리가 바람과 함께 스쳐 지나간다.
“염라대제, 율(慄). 기억하라. 다시 만날 그 순간까지…….”
그 후, 분홍빛이 고왔던 벚꽃은 마치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는 듯 흔적을 감췄다. 바리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염라대제 율도, 자신 곁에 있던 사령들도, 명계의 문도…… 모든 것이 사라진 뒤였다.
그렇게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도 매서운 겨울은 스러져 가고, 푸르른 잎이 돋아나는 봄이 돌아왔다. ……시간은 흘러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