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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란도트의 남편

투란도트의 남편

이수진 (지은이)
청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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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란도트의 남편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투란도트의 남편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04908606
· 쪽수 : 392쪽
· 출판일 : 2016-07-19

책 소개

이수진 장편소설. 3년 전, 아버지의 강요로 지헌과 결혼한 서린.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아버지의 인정을 받아 후계자가 되는 것뿐이었다. 결혼도 그 일환으로 생각하던 서린은 자신을 사랑한다 하며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는 지헌을 이해하지 못한다.

목차

1 007 / 2 037 / 3 060 /
4 083 / 5 113 / 6 136 /
7 156 / 8 179 / 9 206 /
10 233 / 11 260 / 12 287 /
13 316 / 14 349 / 에필로그 376
작가 후기

저자소개

이수진 (지은이)    정보 더보기
언제나, 그때까지, 모두 다, 해피엔딩! 출간작 5월의 귀인/반하다, 네게/ 마리오네트 신부/밤의 아내/사랑이 고이다/금기애/투란도트의 남편/그대와의 스캔들/마이 에너미/슬픈 동화/인형의 눈물/말썽쟁이 약혼녀/심연의 늪/부서지다/은월루(1,2)/열(1,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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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늦게라도 들러.]
“동문회가 늦게 끝나요.”
[그러니까 늦게라도 들르라고 하는 거잖아?]
“엄마, 안 된다고 어제 말씀드렸어요. 허락해 주신 걸로 아는데요?”
[엄마와의 약속이잖아! 일주일에 한 번 얼굴 보여주는 게 그렇게 힘드니?]
“솔직히 힘들어요. 엄마. 나, 노는 사람 아니잖아요. 예현에서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는 최서린 이사라고요. 그동안 비쥬와의 합작을 성공시키느라 바쁘고 힘들었어요. 그럴 때도 엄마와의 약속 한 번도 어긴 적 없고요.”
[그래서 엄마가 너무한다는 거야?]
‘너무하세요’라는 말이 하마터면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서린은 가까스로 삼키고 차갑게 대꾸했다.
“내일 들를게요. 됐죠?”
[알았다. 내일 보자꾸나.]
서린의 모친 임효정 여사가 전화를 먼저 끊었다.
서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의 집착은 1년 전부터 더욱 심해졌다. 어렸을 때부터 서린은 엄마의 아픈 모습을 보고 자라왔다. 병약한 엄마는 서린을 늘 곁에 두고 싶어 했고, 서린이 아무 말 없이 사라질 때면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처럼 불안해했다.
서린은 갑자기 모든 게 짜증스러워졌다. 어제의 승리로 한껏 고양되어 있었는데, 웬일인지 아침부터 심드렁해졌다. 게다가 엄마는 아이처럼 칭얼거리기 바빴다. 겉으로는 이성적이고 침착하여 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지만 실상은 태풍을 감추고 사는 사람이 바로 서린이었다.
왜 이렇게 기분이 저조하지? 잔뜩 부풀린 공에서 푸시시 바람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사님?”
서린은 비서 현주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안. 먼저 먹어.”
서린이 현주와 식사를 하는 이곳은 이태원에서 브런치로 유명하다는 한 레스토랑이었다. 서린은 현주가 자신의 말에도 포크를 들지 않자 형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만약 현영이었다면 눈앞에 있는 팬케이크가 본래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을 거야. 금방 난도질을 당했겠지.”
“현영이의 그런 면을 마음에 들어 하시잖아요.”
“맞아. 그런 현영이가 좋아. 직설적이고 솔직하지. 하지만 난 널 더 믿어.”
현주는 서린의 2년 대학 후배였다. 경영학과에 눈에 띌 만한 예쁜 쌍둥이가 입학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서린은 심현주, 심현영 자매들과 이렇게 가까이 지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는 발랄하고 생기 있는 아름다움으로, 하나는 도도하고 정중한 아름다움으로 서린에게 다가왔다. 우연한 기회에 서린과 친분을 쌓은 그녀들은 예현이라는 제국의 공주님에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녀들은 서린의 친구와 다름이 없었다.
특히 현주는 빈틈없는 날카로운 일 처리로 서린의 오른팔이 되었다. 예현에서 서린이 일적인 면에서 당당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현주의 뒷받침이 컸다. 현주의 과묵한 면은 신임 받을 만한 조건 중에서도 최고의 조건이었다.
“숍 예약이 몇 시랬지?”
“4시입니다.”
“동문회 시간에 딱 맞췄네.”
“네.”
“5시로 늦춰.”
“예?”
“주인공은 원래 마지막에 나타나는 법이잖아.”
서린의 목소리가 일순간에 낭랑해졌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현주는 서린의 뷰티숍 예약 시간을 바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까지도 서린은 브런치에는 손도 대지 않고 탁자만 노려볼 뿐이었다.

화선여고 동문회가 열리는 곳은 메그레즈 호텔 스카이라운지 ‘헤븐’이었다. 재계에서 행세깨나 한다는 사람들과 셀러브리티들이 선호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바로 이런 ‘헤븐’이 오늘은 오랜만에 만나는 동문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화선여고는 강남에서 알아주는 사립명문고였다. 매년 열리는 동문회가 ‘헤븐’에서 개최된다는 것만 보더라도 화선여고의 인맥과 금력은 어마무시했다.
화선여고의 동문회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은 ‘로즈버드’의 회장 출신들이었다. ‘로즈버드’는 스노보드 동아리로 여고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활동적인, 약간은 과격한 클럽 활동이었다. 스포티한 동아리 성격만 보고 학생들이 가입을 기피한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대단한 오산이었다. 외려 ‘로즈버드’는 아무나 쉽게 가입할 수 있는 동아리가 아니었다. 가입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 신입생들은 입학과 동시에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로즈버드’의 19대 회장이자 현 동문회 회장인 선여정은 자부심 가득한 당당한 워킹으로 ‘헤븐’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붉은 드레스는 그녀가 자랑스러워 마지않는 동아리의 이름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정말 개화 직전의 장미 봉오리 같았다. 그것도 무척 농염한…….
화선인의 밤은 곧 ‘로즈버드인’의 밤과 다를 바 없었다.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회장에 당선된 선여정은 JS그룹의 외동딸이었다. 그녀는 현재 JS 홈쇼핑 영업본부장 상무이사였다. 미스코리아를 능가할 만한 키와 잘생겼다고 말할 수 있는 시원한 이목구비는 여정의 대담하고 추진력 있는 성향을 대변했다.
15년 전 ‘로즈버드’ 겨울캠프 때 여정이 보여준 스노보드의 회전은 후배들 사이에서 전설의 UFO턴이라고 회자되고 있었다. 겨울 하늘에 날아든 번쩍이는 동선이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 동계올림픽 스키 점프에 출전할 만큼이었다고 한다.
운동이면 운동, 미모면 미모, 일이면 일. 모든 부문에서 완벽한 그녀에게도 유일한 아킬레스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여정아. 왔어?”
동문회 총무를 맡고 있는 수연이 여정을 반갑게 맞았다.
“준비는?”
“완벽하지. 누구 명이라고?”
“초대장 확인은 철저하게 진행했겠지?”
“당연하지. 보안업체가 삼엄하게 경비를 보고 있어. 후후. 경호실장이라는 사람 되게 잘생겼다?”
여정은 나사가 하나 빠진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수연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초대 가수는 언제 온대?”
“총회 끝나고 식사할 때 즈음 도착한다고 연락 왔어.”
“설마 아이돌은 아니겠지?”
“아니야. 얘! 작년에 그토록 네게 타박을 당했는데, 내가 또 그러면 무뇌아지, 안 그래? 요즘 핫하다는 발라더야. 물론 네가 원하는 품위도 있어. 그 이미지로 유명해졌대.”
“잘했어. 선배님들은 어디 계셔?”
“로열 룸에 계셔.”
“알았어. 인사하고 갈 거니까 진행 준비나 매끄럽게 잘 해놔.”
“염려 붙들어 매. 근데 서린이 말이야. 오늘도 역시 안 오겠지?”
지나치려던 여정은 걸음을 멈추고 수연을 노려보았다.
“무슨 소리야?”
“아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너 서린이한테 완전히 발렸다고 하던데.”
왠지 고소하다는 뉘앙스가 풍겼다. 여정은 눈꼬리를 치켜 올리며 그동안 수연의 기를 너무 살려놨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그런 소리 해?”
“우리 그이가. 서린이가 차려놓은 밥상을 날름 먹으려다가 된통 당했다면서?”
“그래서 네 남편은 남의 일에만 신경 쓰느라 작년에도 회사를 말아먹었다니? 재기를 하려면 자기 일에만 집중해야지.”
“뭐! 우리 그이 얘길 왜 여기서 꺼내? 그이는 재계 동향을 알아보다가 우연히 알게 된 것뿐이라고.”
“시야가 좁기도 하지. 재계 동향을 알아본다면서 왜 JS와 YH에만 관심을 가질까? 그것도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말이야. 처가가 너무 빵빵해서 앞뒤 분간도 못 하고 주절대는 건가?”
“야! 선여정. 말이 심하잖아.”
“너나 입 조심해. 백수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안 보여? 화선인의 밤이라고.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중요한 날에 그런 시답지도 않은 말은 내뱉고 싶어도 집어 삼켜야지. 아무리 네가 내 친구라고 해도 내 눈 밖에 나면 친구도 뭐도 안 되는 수가 있으니까.”
싸늘하게 말을 내뱉으며 여정은 앞으로 걸어갔다. 후배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여정은 의전용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그녀의 앞으로 홍해가 갈리듯 동문들이 길을 비켜주었다.
“저 기집애, 코가 납작해지는 꼴을 한 번만 보면 소원이 없을 텐데.”
수연은 상처 입을 말만 골라 하는 여정이 꼴사나웠다. 씩씩거리던 그녀의 뇌리로 조금 전 한 통의 전화가 떠올랐다.
“어쩌면 오늘이 그날이 될지도 모르겠네. 후훗.”
동창인 진선미가 초대장을 잃어버려 초대장 없이도 ‘헤븐’에 들어올 수 있도록 로비에 요청했다. 진선미가 온다면 최서린도 올지 모른다. 수연은 경호실장에게 단단히 일러놓았다. 초대장이 없는 입장객 중 진선미와 최서린이라고 밝히는 사람은 지구가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정중하게 안으로 모시라고……. 선여정의 아킬레스건인 최서린이 행차하실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화선여고의 겨울 여왕, 최서린.
그녀의 시크하고 우아한 회전이 간절히 보고 싶은 백수연이었다.

동문회의 시작을 알리는 선여정의 인사말이 끝난 후 임원들의 사업 및 결산 보고가 이어졌다. 모교의 지속적인 발전뿐만 아니라 사회 상류계층으로서의 화선인의 사회 사업은 일개 동문회가 벌이는 사업치곤 규모가 큰 것이었다.
“선여정 대단하지 않아? 회사 일도 바쁜데, 언제 동문회 일까지 이렇게 해냈대?”
“그러게. 예전이나 지금이나 지치지 않는 정력은 여전해.”
“여정이 그거 자뻑이야. 저 말고는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병이라고.”
“어쨌거나 슈퍼 우먼은 맞잖아.”
“외계인이지. UFO턴을 할 때부터 알아봤어.”
“그렇지?”
여정에 대한 동창생들의 말들이 살금살금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실내악의 고전적인 선율이 귀를 자극하고 프렌치를 기본으로 한 뷔페가 동문회의 화려함을 극치로 이끄는 그때.
“저기, 진선미 아니야?”
“그러네. 그렇다면, 혹시?”
“세상에! 최서린이잖아!”
“최서린? 진짜 서린이야.”
“무려 3년 만이야. 서린이 결혼하고 나서는 한 번도 동문회에 나온 적 없었지?”
“응. 한 번도 없었어.”
“오늘 계 탔네. 라이벌 선여정이 회장으로 있는 동문회 행사에 참석하다니. 정말 흥미진진한데?”
“그러게. 근데 겨울 여왕의 아성은 그대로인 것 같지?”
“네 말이 맞아. 겨울 여왕은 언제나 도도해. 근데 저 드레스는 어디거야? 올해 S/S 오트쿠튀르 콜렉션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드레스인 것 같은데. 넌 본 적 있니?”
“아니. 처음 봐. 빨리 가서 아는 척하자. 다른 애들한테 선수 빼앗기기 전에.”
서린을 알아본 무리들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선미는 등장하자마자 좌중을 휘어잡는 서린의 마력을 실감했다. 삼 년 만의 등장인데도 어제 본 것처럼, 졸업하기 전 서린을 흠모하고 동경하던 눈빛들이 여기저기서 반짝거렸다. 선미는 쇼를 제대로 즐길 작정인 서린의 고약함을 사랑했다. 하긴 가끔은 돌출 행동도 해줘야 인간미가 느껴지는 법이다.
“파티가 한창이네.”
서린의 낮은 톤이 선미의 귓가에 울렸다.
“진 선생. 파티에 올 때는 예를 갖춰야지. 너무 고리타분한 거 아니야? 벗겨놓으면 몸매는 이곳에서 제일일 테면서.”
서린은 남성 턱시도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진선미의 슈트를 아래위로 훑어 내렸다.
“그건 너와 여정이가 없을 때 하는 말이지.”
“진부해.”
“너무 많이 들어서?”
“아니, 네 겸손.”
서린은 우아한 걸음으로 앞장섰다. 벌써부터 그녀를 알아본 몇몇 친구들이 서린에게로 달려왔다.
화선여고 입학과 동시에 뛰어난 외모와 성적, 운동 실력으로 단번에 ‘로즈버드’의 선배들을 사로잡은 서린은 신입생 중 유일하게 면접을 보지 않고 ‘로즈버드’ 멤버가 된 최초의 케이스였다.
그해 겨울. 서린의 스노보드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로즈버드’의 위명에 아주 걸맞은 아름답고 안정적인 스노보드의 자세. 채공 시간은 상당했고 공중에서 보여주는 정적이면서 놀랍도록 빠른 스피드의 회전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서린은 제18대 ‘로즈버드’의 회장으로 선출되었지만 고2 여름방학 때 돌연 사퇴했다. 그리고 사퇴와 동시에 동아리에서도 탈퇴했다. 화가 난 선배들이 그녀를 불러내어 위협했지만 서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한 번 작심한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꾸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서린의 신념이었다.
이후 제19대 회장으로 선임된 선여정은 2학년이 회장직을 수행해야 함에도 반쪽짜리 회장이 되기 싫어 3학년까지 악착같이 회장직을 유지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교내에서 ‘로즈버드’의 회장으로 목소리를 내며 봉사 등 갖가지 일을 벌였다. 그녀로 인해 ‘로즈버드’는 더욱 명성을 더해갔다. 그때부터 여정의 사업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창들은 서린을 유심한 눈으로 관찰했다.
다들 서린의 패션에 대해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저 큼지막한 삼각형 귀걸이는 어디서 샀을까? 포마드를 잔뜩 바른 단발 헤어스타일은 단정하고 세련됐다. 그 헤어스타일 앞으로 메탈 귀걸이가 독특하게 빛나며 찰랑거렸다. 특이하게도 반대편 귀걸이는 언밸런스한 형태의 작은 마름모꼴 형태의 귀걸이였다.
드레스는 또 어떠한가? 은어처럼 반짝이는 드레스는 목을 완전히 감싼 형태였지만 하늘하늘한 재질로 가슴 부위에 드레이퍼리한 주름을 만들었다. 하반신은 풍만한 골반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밀착된 디자인이었다.
정숙하고 우아한 이미지라고 여기려는 찰나, 서린이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를 따라가던 수많은 눈들이 서린의 드러난 맨 등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에서 보면 젖가슴의 둥근 형태가 보일락 말락 하는 무척이나 과감하고 섹시한 드레스였다. 웬만한 영화제에도 손색없을 만한 패션 감각에 동문들은 서린의 숍이 어딜까, 궁금증이 일었다.
“미스코리아 납셨네.”
로열 룸에 서린과 선미가 들어가자마자 여정의 비아냥거림이 날아들었다. 로열 룸에는 화선여고 동문회의 현 임원 인사들과 몇몇의 선배들이 앉아 있었다. 서슬 퍼런 여정 때문에 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린을 쉽게 알은 체 할 수 없었다.
서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정이 마주 보이는 곳에 착석했다.
“오해는 하지 말라고. 선미더러 한 말이니까. 선미야, 오랜만이야. 병원은 잘 되지? 요즘은 워낙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아서. 찾아보면 우리 가까운 곳에도 있을지 몰라.”
“오해는 무슨? 고릿적부터 들어왔던 농담인데. 진선미 하면 미스코리아지.”
정신과 의사인 선미는 쿨하게 대답하며 서린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았다. 서린은 여정을 일별하지 않고 웨이터가 따라준 와인을 음미했다.
“여왕님께서 친히 행차하시니 보기 힘든 우리 진 박사님도 동문회를 다 나오시고 말이야? 이거 참 무궁한 영광이라고 해야 되나?”
수연은 치밀어 오르는 웃음을 참고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여정의 도발은 절박해 보일 정도였다. 서린은 여정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는데, 여정 홀로 분기탱천하며 겨울 여왕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것도 사람 좋은 만만한 선미를 방패막이 삼아서……. 오랜만의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도도한 선여정을 서린이 어떻게 개박살 낼 것인지 자못 궁금해졌다.
“무슨 바람이라도 불었니?”
여정은 줄기차게 싸움을 걸었지만 서린은 와인 한 잔을 비우고 웨이터가 내어온 애피타이저를 입에 넣었다.
“맛있네.”
룸 안으로 들어온 후 서린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고작 ‘맛있네’였다. 여정의 표정은 활화산 폭발 직전이었다. 덩달아 룸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 싸해졌다.
“사람 말이 말 같지도 않아? 3년 만에 동문회에 나타나 놓고선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은 건 또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일까? 선배님들도 와 계시는데.”
서린은 께느른한 고양이처럼 포크로 음식을 뒤적이다 선배들의 면면을 둘러보며 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잘 지내셨죠?”
선배들은 마지못해 서린과 눈을 맞추었다. 그러곤 서린은 서비스된 메인 디쉬에 집중했다.
“네가 뭔데 이 자리에 끼는 거야?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서린이 나이프와 포크를 갑자기 내려놓고 여정과 시선을 맞추었다.
“화성인이 되어보려고.”
수연은 서린의 그 한마디에 ‘풋’ 하고 웃음이 터졌다. 기름에 불을 붙인 듯 여정의 얼굴이 더욱 매섭게 변했다. ‘화성인이 되어 보련다’의 뜻은 화선여고의 동문회 회장이자 UFO처럼 스노보드를 타던 여정을 한마디로 비웃는 단어였다.
“어서 여기서 나가! 네 자리는 로열 룸이 아니라 바로 저곳이라고!”
용케 서린의 도발을 참아낸 여정은 턱짓으로 넓은 홀을 가리켰다. 동문회 참석자들이 친구들과 반가움을 표시하는 일반석으로 가라는 뜻이었다.
“자리는 맞게 찾아온 것 같은데?”
“제정신이 가출한 모양이구나. 무책임하게 회장직에서 사퇴한 네가 무슨 낯짝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 선배님, 후배들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니?”
“내가 그만두지 않았더라면 넌 ‘로즈버드’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을까? 아마도 평생 그 자리에 못 앉았을걸?”
“뭐야?”
“밥이나 먹어. 기운 없는데 큰소리까지 내면 동문회는 엉망진창이 될 거야.”
“내가 왜 기운이 없어?”
“있었어? 아, 그렇지? 밥 안 먹어도 힘이 나겠네. 어제 그렇게 물을 많이 먹었으니까.”
“이게 어디서 굴러와 가지고 난장을 쳐?”
드디어 폭발한 여정은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사실이잖아. 너 어제 물 먹었어. 나한테.”
“공과 사 구분 못 해? 이곳은 동문회라고!”
“공과 사 구분하시는 분이 남의 것, 제 것은 구분 못 했나 보네. 남이 공들인 걸 날름 가로채 가겠다고 상도덕 따윈 개에게 줘버렸지 않나?”
서린이 쏘아붙이는 말들은 이미 말이 아닌 얼음 파편이었다. 나오는 족족 여정의 얼굴에 꽂혔다. 이미 평정심을 잃은 여정의 안색은 터질 듯이 피가 모여들었다.
“야!”
“왜?”
두 사람의 언쟁에 선미와 수연을 비롯한 사람들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개와 고양이와 다름없는 앙숙지간의 싸움이 발발할 터였다. 마지막으로 룸을 나선 선미는 난처한 미소를 띠우며 그녀들의 품위 유지를 위해 룸의 문을 닫아주었다.
룸에는 졸지에 두 사람만 남겨졌다. 여정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살벌하게 서린을 노려보았다.
“발린 기분이 어때? 선여정?”
“내가 언제 발렸다고 그래!”
“기억력에 문제가 생겼나 봐? 너 어제 꽤 장렬했었어.”
독사 같은 년!
여정은 심하게 벌렁거리는 가슴을 겨우 주저앉혔다. 사실 여정은 오늘 서린의 방문을 예감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공방전은 지루하게도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져 왔는데, 문제는 서린이 여정을 라이벌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더 자존심 상했다. 그래서 그렇게 서린을 이기려고 기를 쓴 건지도 모른다.
공교롭게도 동종업계에서 서린의 회사와 그녀의 회사도 세기의 라이벌로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었다. YH 홈쇼핑을 찍어 누를 만한 아이템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여정은 무슨 일이 있어도 YH의 독주만은 막겠다고 노선을 선회했다. 그것은 바로 서린의 앞길을 막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여정이 서린을 미워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서린의 남편, 라이언 류 때문이었다. 그를 알아본 여자는 서린이 아니라 여정이 먼저였다. 여정은 뉴욕 유학 시절 라이언 류라는 남자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를 몰래 짝사랑한 전적이 있었다. 그와의 만남을 노리던 여정에게 라이언 류의 한국행은 장밋빛 미래를 예감케 했다. 어쩌면 그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었다.
그런데 라이언 류가 YH 홈쇼핑의 사장으로 취임하고, 귀국한 지 석 달도 지나지 않아 서린과 결혼하였을 때, 여정은 서린과는 절대 휴전조차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토록 빛나는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도 서린은 진심으로 웃지도 감사해하지도 않았다. 제 손에 든 다이아몬드를 자갈처럼 취급하는 서린에게 보석은 가당치가 않다. 서린에게 지기 싫은 마음이 앞서 여정도 곧 맞선을 봤고 두 달 뒤에 결혼식을 올렸다.
3년 전의 일도 어제 일처럼 느껴지는 건 모두 눈앞의 최서린 때문이었다. 서린 앞에서 여정이 주워 삼킨 단어는 열패감, 자기비하, 자존감 저하와 같은 죄다 부정적인 것들이었다.
여정은 서린의 얼음 가면을 벗길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도 좋을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 행운이 바로 여정에게 굴러들어 왔다.
‘그러니까 침착해야지. 선여정! 다 된 밥에 코 빠뜨리지 말고. 그깟 비쥬와의 콜라보 실패는 일 분기 영업 실적만 날아갈 뿐이지만 이건 다르잖아? 최서린의 인생을 시궁창에 집어 처넣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정은 심호흡을 하며 서서히 제 페이스를 찾았다.
“맞아. 승리는 네 거야. 축하해, 최서린.”
서린은 자신의 시나리오에 들어 있지 않은 여정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여정을 밟아주리라 결심했고 차근차근 실천하고 있는데, 마음에 들지 않게도 여정은 금세 침착함을 찾았다.
재미없는데?
“그런데 말이야. 서린아, 결혼 반지가 안 보이네?”
결혼 반지? 여정의 뒤바뀐 말투가 심하게 거슬렸다.
“소중한 반지잖아. 잃어버릴 수는 없지.”
“일하는데 거추장스러워서 빼놓은 건 아니고?”
서린은 대답 대신 입을 앙다물었다.
“바이어가 보면 너 미혼인 줄 알 거야. 아, 이건 그냥 노파심에 하는 소리이고. 신성한 결혼 반지를 빼놓는 사람치고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이 없더라고.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서린은 잠자코 여정을 주시했다.
“남편 단속이나 잘해.”
청천벽력 같은 말이 서린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번쩍하는 번개가 눈앞에서 치는 것 같았다. 여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 한 것은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이 선여정이라는 것이다.
“일하느라 정신 팔려서 남편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도 모르지?”
서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여정의 말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주먹을 말아 쥐고 떨림을 제어하려고 노력했다.
전세역전.
“넌 알고 있고?”
“알다마다. 궁금하면 내가 말해줄까?”
“말해봐. 들어줄 테니까.”
“그냥 말해도 되나 몰라?”
여정은 얄미운 고양이 흉내를 내고 있었다. 서린의 한쪽 입매가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손에 쥔 패를 가지고 거래를 하시겠다? 거래는 응하지 않으면 성립이 되지 않지.
“그럼 너만의 소중한 비밀로 간직하시든가.”
서린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클러치 백을 집어 들고 룸 밖을 나가려는 순간 여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편과 관련 있는데도 그냥 가시겠다고? 역시 최서린이야.”
“맞아. 네가 이기고 싶어 안달하는 최서린이 바로 나지.”
“못된 계집애!”
“칭찬 고마워.”
“언제까지 잘난 척하는지 내가 두고 보겠어.”
“잘난 척하는 게 아니라 네 눈에 내가 잘나 보이는 건 아니고?”
“하! 감정 없는 로봇도 너보단 나을 거야. 이러니 어느 남자가 밖으로 안 돌겠냐고? 사람들은 네 면상에 자신들이 속고 있다는 걸 몰라. 얼굴이 반반하니까 마음도 반반할 거라 생각하지만 너만큼 모난 애도 없어.”
“난 네가 알고 있는 이야기에 흥미가 있었지, 네 이야기에 흥미가 있었던 건 아냐.”
“그래. 계속 그렇게 살아. 눈과 귀를 막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그러다가 피눈물 흘려봐야 정신 차리지.”
여정의 악담은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냉정함으로 가장하고 있었지만 서린의 서늘한 가슴에도 분노의 불꽃이 사라락 튀어 올랐다.
하나, 둘, 셋. 서린이 여정과 다른 점이라면 감정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우위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어. 여정아. 난 네가 여전해서 고맙고 즐거워.”
서린은 홱 등을 돌렸다. 더 이상 여정과 말을 섞을 이유가 하등 없다고 판단 내렸다. 결정을 하면 어떤 결과가 놓여 있더라도 번복이 없는 것이 서린의 무서운 점이었다. 궁금증은 두말할 것도 없다.
“네 남편에게 여자 있더라? 꽤 깊은 사이로 보였어.”
여자?
누군가 ‘푹’ 하고 심장을 린치하는 것 같았다.
남편 단속이니, 밖으로 돈다느니 하는 말로 짐작컨대 그 예상까지 안 한 바 아니지만 여정의 입에서 회자되는 여자라는 말은 꽤 이질적이고 듣기에 불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막장드라마를 많이 본 모양이네. 지금 네 말을 믿으라는 거야? 날 흠집 내지 못해 안달인 네 말을?”
“때론 적군이 아군이 될 수도 있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네 남편의 부도덕한 현장을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가감 없이 아주 실감나게 전달할 수 있거든.”
“바람?”
“네 남편 아주 좋아 보이던데?”
“헛소리 작작해.”
여정은 서린의 입에서 쏟아지는 분노감이 마음에 들었다. 우연히 접한 상황을 놓치지 않고 유리한 패로 만든 것은 꽤 잘한 일이었다. 여정은 서린의 남편에게 미행을 붙여두었었다.
“남편을 믿어.”
“원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법이다?”
“네가 지어내는 이야기 이제 더 이상 못 들어주겠어. 천박해.”
“지어내는 이야기? 천박? 웃기지도 않아.”
서린은 여정의 확신에 찬 비웃음에 가슴이 선득해졌다. 가슴에 구멍이 났고 알 수 없는 소용돌이가 그곳을 메웠다.
“이걸 보고서도 그런 말이 나올까? 실은 나, 너 오늘 이 자리에 올 줄 알았어. 내 앞에서 으스대면 바로 던져 주려고 가지고 왔지. 후훗.”
여정은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핸드백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서린 앞으로 내던졌다.
서린은 봉투에서 사진을 꺼내들었다. 그 사진의 주인공은 바로 류지헌이었다. 그녀의 남편. 서린은 사진을 넘겨보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이 남자는 누구지? 서린은 생경하게 느껴지는 남편의 웃음을 근래에 들어 좀처럼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의 웃는 모습은 벽에 걸린 웨딩 사진 속에만 남아 있었다.
사진 속의 남편은 혼자가 아니었다. 단아하게 생긴 여자와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긴 또 어디지? 아마도 이 여자의 집인 것 같다. 어느 주택가에서 나오는 남편의 모습, 여자와 백화점을 들락날락하는 모습. 참 많이도 찍혔네.
서린의 굳어가는 모습을 여정은 흥미진진하게 쳐다보았다. 겨울 여왕 최서린이 곧 공룡처럼 불꽃을 뿜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리라. 기대가 되었다.
“뭐라고 말 좀 해보시지?”
서린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여정은 서린을 조롱했다.
“믿는 남편이 벌인 불륜 현장이라 말이 안 나와?”
서린은 그제야 사진에 못 박힌 눈을 여정에게 주었다.
여정은 서린의 눈동자에 멈칫거렸다. 예상과는 다르게 서린의 눈동자는 어떠한 감정도 스며들지 않았다. 무생물 같아. 블랙홀에 빠져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야? 여정은 서린의 반응이 마뜩잖았지만 그래도 충격을 받아 더욱 사람 같지 않게 변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뭐야? 너! 왜 아무 말도 안 해?”
“…….”
“그 여자, 꽤 예쁘지? 너처럼 무뚝뚝하고 쌀쌀맞아 보이지도 않지? 애교도 있어 보이는 게 평생 보호해 주고 싶은 천생 여자랄까?”
“…….”
“충격이 꽤 큰 모양이구나. 남편은 너무 믿는 게 아니야. 말 그대로 남, 편, 이니까. 결국 헤어지면 남남이야.”
서린의 눈이 꿈틀거렸다. 여정은 자신이 고대하던 서린의 이성상실의 모습을 곧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 잔뜩 흥분했다.
“그래서 너처럼 하라고?”
“나?”
여정은 얼른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서린의 말은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다.
“무슨 소리야?”
“너, 그 여자 재기할 수 없도록 밟아놨잖아.”
여정의 얼굴에 어린 웃음이 급속도로 사라졌다.
“아마 비서였다지?”
“야! 최서린!”
“목소리 낮춰. 밖에서 다 듣겠어. 밝혀지면 좋을 것 없잖아. 너에게도 나에게도.”
여정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저 앙큼한 년이 어떻게 자신의 남편의 외도를 알았을까. 그리고 그것은 벌써 3년 전의 일이었다.
“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궁금한 모양이네.”
“어떻게 알았어?”
“네가 비쥬와의 우리 합작에 슬며시 끼어든 것처럼.”
여정은 얼어붙었다. 3년 동안이나 알고 있었으면서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내밀한 여정의 사정까지 알아냈다면, 서린이 심어놓은 스파이는 회사의 기밀사항까지도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서린은 여태껏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걸까? 손에 넣은 정보가 유용한 까닭은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함인데.
하룻강아지를 적수로 취급하지 않는 범 앞에서, 하룻강아지 홀로 경쟁자랍시고 범에게 까분 격이다. 부지불식간에 날아든 모욕감이 여정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날 적수로 생각한 적은 있니?”
“물론. 그러니까 내가 여길 왔지.”
울어야 될지 웃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여정은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남편의 불륜을 남의 입을 통해 전해 들었는데도 평상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저 태도. 설마 사랑하지 않는 건가? 사랑하지 않아도 분은 날 텐데. 진짜 외계인은 최서린이라고!
“여정아.”
퍼뜩 생각의 고리를 끊은 여정은 서린을 쳐다보았다.
“오늘 일, 너와 나만 아는 거야.”
여정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더 이상 말 나오는 건, 원치 않아.”
“지금 부탁하는 거야?”
“마음대로 생각해. 난 널 최소한 친구라고는 생각하니까.”
그래서 자신의 불미스러운 일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그럴 가치도 없는 일이었던 게 아닐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서린의 꿍꿍이를 알 수 없어 답답한 여정이었다.
“생각 그만하고 계속 즐거운 시간 보내.”
서린은 이제 낙낙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여정은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뭐지?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은 난데, 최서린이 아니라 엉뚱한 곳에 분풀이한 이 지저분한 느낌은?
룸 밖으로 나가는 서린을 쳐다보는 여정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렇게 이기고자 애를 썼는데, 결국은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한 것 같은 찝찝한 느낌이 여정에게 달라붙었다. 남편의 불륜 사실에도 여정과 완전 딴판으로 반응한 서린. 죽을 때까지 안 되는 거야, 뭐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휴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그냥 편할 대로 생각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듯싶었다. 서린이 자신에게 부탁했다고. 그래야 정리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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