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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88932044736
· 쪽수 : 260쪽
· 출판일 : 2025-11-07
책 소개
부서지는 꿈속에서마저도 혼자 남아 있다는 감각,
끝나지 않는 불행을 노래하면서도
사랑만큼은 심판하지 않는 시인 백은선의 다섯번째 시집!
시인 백은선의 다섯번째 시집 『비신비』가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627번으로 출간되었다. ‘비신비’는 시인이 첫 시집 『가능세계』(문학과지성사, 2016) 때부터 써왔던 연작시의 제목으로 ‘신비롭지 않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별이 폭발한 뒤 남은 물질들이 각자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세상의 조각을 이룬다고 믿는 시인은 더는 새롭거나 신비로울 것이 없는 세계와 타자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단번에 연상되지 않는 단어와 이미지를 중첩시켜 전혀 다른 시 세계를 구축해내는 백은선에게 세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신비’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우리 안에 각자의 별이 있다는 말은 시적 은유나 빈약한 상상이 아닌 시인이 정교하고도 치밀하게 만들어낸 꿈속과 꿈 바깥의 세상이라 할 수 있다.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을 내줘본 사람만이 깊은 절망을 겪는 것처럼 백은선의 시는 끝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부분까지 모두 쏟아내어 타인의 목소리를 갈구한다. 이번 시집의 발문을 쓴 시인 김승일은 “백은선의 시집을 해로운 시집 취급하라”라고 말하며 “이 시집 『비신비』를 노래하라. 고통받으라, 전부 읽었다고 속단하지 말라, 죽고 싶다는 백은선의 말에 속지 말라, 목격자가 되지 말라, 해로워져라, 숨지 마라”라고 끊임없이 당부한다. 이렇듯 백은선의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감정의 여백을 남길 만한 여유를 주지 않은 채 쉼 없이 언어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친다.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의 죄를 낱낱이 고발하는 듯하면서도 그 누구의 사랑도 심판하지 않는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 이면의 진실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시. 시인이 온몸으로 다 태우고 남겨둔 신비로운 세계가 이 시집 한 권에 담겨 있다.
자기 안의 불행을 다시 한번 아로새기며
영원을 쥐고 미래로 나아가는 소녀들
아름다움에 눈뜨며
생기는 불행이 소녀들에게는 있지
주름진 레이스를 짓밟으며
나 기다렸어
오늘이 도래하길
영원히 길어지는 잠 속에서
필름이 타오르길
[······]
미래
생각할 때마다 입속에 침이 고이는 이름
―「소녀 경연 대회」 부분
소녀들은 마치 “깨진 유리 조각 위에서 텀블링을 연습”하는 것처럼 매 순간 “추락의 포즈를 연구”한다. 그들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란 “완성되는 순간/허물어지는 아름다움”에 불과한 것이기에. 매일 밤 꿈속에서 무엇을 무너뜨려야 하는지 궁리하는 이들은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불안에 떨면서도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깨진 조각조각 사이로 다채로운 색상과 리듬을 부여한다. 이렇듯 백은선의 시에서 “드뷔시는 부서진 유리가/아닌/부서지는 유리”(「세계의 배꼽─생일 편지」)와도 같고, 무엇이든 손에 쥐고 있는 마법사들의 언어는 “멀리서 들으면 유리구슬이 부딪히는 소리처럼”(「마법의 영역」) 느껴진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시인의 말’과 수록 시 「기도」에서 반복해 말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 어렸을 때 매일 기도했지. 진짜 엄마 아빠가 날 데리러 오게 해달라고. 그러나 그들은 날 찾지 않았어.//난 버려졌어//흘러내리는 은빛//누가 날 갖길 원할까?” 이때 화자는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속에서 “절망 속에 갇혀 노래”(「기도」)한다. 하지만 절망과 고독을 깨뜨리고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는 서글픔이나 괴로움이 아닌 분노와 고통의 언어가 처절하게 담겨 있다. 시인은 마치 사랑을 질병으로 취급하는 이들을 단죄하기 위해 찾아온 메두사처럼 제 안의 언어를 쏟아낸다. 자신과 마주하는 모든 이를 돌로 만들어버리는 메두사의 고대 그리스어 어원은 ‘여왕’ 혹은 ‘지배자’로, 백은선의 시를 읽는 이들은 자신의 몸과 정신이 의지와 무관하게 얼어붙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백은선의 시가 고통만을 전가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처절한 고백과 끊임없이 중첩되는 검정과 빨강의 색채는 마치 페르세우스의 방패와도 같이 우리 자신에게 무기를 쥐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세상의 신비와 우주의 비밀을 향해
영원히 시작되는 무수한 첫 문장
너를 빛 속에 두고 돌아설 때 천사와 천사 다정한 모든 것
플랫폼에 서서 생각해
모든 게 홀로그램이 아닐까 우리는 작은 상자 속에 누워 머리에 전선을 꽂고 있는 게 아닐까
밀려오는 창
[······]
괜찮아 어차피 우리는 다 가짜니까
그렇게 말하며
차곡차곡 쌓여가는 어둠 속
우리와 우리
데시벨을 높이며
아아아
빛과 유사해질 때
마침내 불이 될 때
―「비신비」 부분
“사랑을 말하면 사랑이 다 사라질 거라는 이상한 믿음”(「불행 중독」)으로 시인은 “사랑을 질병으로 여기던 시대의 이야기”(「인간은 신의 알레고리」)를 털어놓는다. 시에서 사랑은 비유의 대상이 아닌 진실을 재구성해나가는 열쇠로 “사랑한다는 말은 무수한 별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거대한 밤하늘” “가시덤불 속에 핀 하얀 찔레꽃”(「영원을 발음할 수 없게 된 다음부터 인간은 자라나기 시작한대」)이 되어 시 속 화자의 창백한 손과 발을 칭칭 묶어버린다. “어차피 우리는 다 가짜”라고 말하면서도 “내 몸에 늘어나는 멍을/사랑했다”(「세계의 배꼽─Watch me burn」)고 털어놓는 시인의 고백은 “아름다움은 다 망가져버렸으면 바랐어”(「나에게 밤을 주세요」)라고 말하면서도 이내 “흔들리는 그림자” 밖으로 “가장 아름다운 사물”(「빛과 놀기」)을 찾아내는 백은선 시의 미학을 보여준다. “아프고 아름다운 울림”을 발견해내는 시인은 “아름다움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라고 쓴 적이 있”(「역할 놀이」)는 사람. 이때 우리는 더는 신비를 추구하지 않는 비신비의 세계에 매혹된다. 백은선 시인은 세번째 시집 『도움받는 기분』(문학과지성사, 2021) 출간 당시 ‘비신비’가 의미하는 ‘신비롭지 않음’이란 엄청난 신비와 포개지는 지점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자신의 시 세계 안에 “비신비”라는 장르가 있다고 말한 시인이 첫 시집부터 지금까지 불 속과 물 위를 서성이며 탐구해나갔던 세상의 신비와 우주의 비밀이 드디어 『비신비』라는 물성 안에 담겼다. 시집 맨 뒤에 자리한 뒤표지 글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다 타고 남은 것들을/여기 남겨둔다//네가 보고 잊을 수 있게//그렇게 사랑해”라고.
목차
시인의 말
1부
소녀 경연 대회 | 비신비 | 침묵의 서(書) | 노래는 빛 | 세계의 배꼽 | 뾰 | 말 없는 애인 | 빛과 놀기 | 데스노트 | 나에게 밤을 주세요 | I’m Finally a Ghost | 청명
2부
누가 내 무엇을 가져갔는데 나는 그게 뭔지 모른다 | 마법의 영역 | 바닥을 치우는 방법 | 21세기식 사랑 | 세계의 배꼽 | 세계의 배꼽 |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 빈칸 | 비신비 | 네 잘못이 아니야 | 메커닉 로맨스
3부
나비 안기 | 인간은 신의 알레고리 | 임진각에서 | 지옥 체험관 | 역할 놀이 | 사랑의 이름 | 아주 느슨한 시 | 프랙털 | 꿈의 노래 | 일그러진 세계의 반영 | 기도 | 목격자
4부
비신비 | 의미 없는 삶 | 사랑하는 머리 | 영원을 발음할 수 없게 된 다음부터 인간은 자라나기 시작한대 | 망각의 코트(court) | 불행 중독 | 눈보라의 나날 | 태양은 비누를 주조하는 커다란 솥 | 기쁨을 빚어 만든 | 완벽한 투명 | 노래를 듣는 사람 | 무간나락(無間奈落): 영원한 겨울
발문
가이드 · 김승일
저자소개
책속에서
집에 돌아오니 아이가 물었어 엄마 데스노트를 갖게 되면 누구 이름을 쓸 거야?
난 내 이름이라고 말했고 아이는 슬픈 표정으로
보내줄게
그렇게 말했지
―「데스노트」 부분
머리에는 늘 새것처럼 반짝이는 하품을 뒤집어쓰고 하하하 웃으며 미친 듯이 달리는 기차의 리듬으로 네가 시작하고 네가 끝내는 놀이를 우린 함께한다고 말하고 맞아요 그게 바로 21세기식 해방이고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놀이 요즘 유행이에요 가까워지기 멀어지기 끌어안기 밀치기 파도의 태도로 벽이 되기
부탁하는 이유는 오직 거절당하기 위해서죠 잘린 나무처럼 평평하게 영혼을 가꾸려고 며칠 동안 벌레와 흙을 채운 베개를 베고 잤어요 매일 꾸는 네 얼굴이 사라지는 꿈 얼굴이 사라진 자리에서 돋아나는 뾰족한 산 나는 거길 헤매다 영영 길을 잃고 싶었는데 너무 쉬어 너무 쉬어서 차라리 심장이 돌이 되는 병에 걸리기로 했죠
바다를 찢어 벽에 바르면 물결 사이로 솟구치는 색색의 풍선들 사랑은 계속되는 비명이에요 마차에 치인 사람이 땅 위를 뒹굴 때 조용해지는 창문들 투명은 흉내 내기 좋은 아픔인데 섬은 잃어버린 바다를 앓느라 부서지는 손이에요 우린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죠
―「21세기식 사랑」 전문
이것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쌍둥이가 만나는 이야기다
사랑을 질병으로 여기던 시대의 이야기다
빨간 지붕이 늘어선 언덕을 넘고
바다를 지나 숲을 건너는 이야기다
두 손을 앞으로 뻗은
가녀린 식물의 수런거림이다
이것을 읽으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인간은 신의 알레고리」 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