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전기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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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전기(656?∼716?)의 자(字)는 운경(雲卿)으로, 상주내황(相州內黃), 즉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네이황현(內黃縣) 사람이다. 14세 무렵에 무협(巫峽)과 형양(荊襄)을 유람했던 것으로 전해질 뿐이다. 약관의 나이에 진사에 급제했으며, 이후 협률랑(協律郞)의 벼슬을 거쳐 통사사인(通事舍人)을 지내게 되는데, 이때 그는 ≪삼교주영(三敎珠英)≫의 편찬 사업에 참여해 장안(長安) 원년(701)에 완성했다. 또한 같은 해에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으로 전직했다가, 2년 뒤인 703년에 급사중(給事中)으로 승진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 뜻하지 않게 뇌물수수죄로 탄핵을 받게 되어 환주[驩州: 현재의 베트남(越南) 북부의 빈(Vinh)]로 유배를 당하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 49세였다. 그러나 유배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2년 뒤 그는 사면을 받았고, 조정으로 복귀해 수문관학사(修文館學士), 중서사인(中書舍人), 태부소경(太府少卿) 등을 역임하는 등 비교적 순탄한 관직 생활을 영위하다가 그의 나이 61세인 716년경에 세상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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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문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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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문(656?∼712?)의 자(字)는 연청(延淸)이고 일명 소련(少連)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괵주홍농, 즉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링바오현(靈寶縣) 사람이다.
상원(上元) 2년(675)에 송지문은 심전기와 나란히 약관의 나이로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이때부터 관직 생활을 시작한다. 그 후 35세까지 습예관학사(習藝館學士) 등의 벼슬을 지내며 비교적 순탄한 관직 생활을 유지하다가, 약 36세에 병이 들어 40세까지 육혼산장(陸渾山莊)에서 칩거한다. 이후 다시 관직의 세계로 돌아와 낙주참군(洛州參軍) 등을 지냈고, 심전기 등과 더불어 ≪삼교주영≫의 편찬 사업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의 나이 약 42세부터는 봉환령(奉宦令)의 신분으로 당시의 권력자인 장역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 두 형제를 섬기는 데 전념하게 되었다. 후일 신룡(神龍) 원년(705)에 장간지(張柬之), 경휘(敬暉) 등이 장역지 형제를 척살하고 동시에 무후(武后)를 강제로 폐위시키며 중종(中宗)을 옹립하는 정변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송지문 역시 이에 연루되어 농주(瀧州)로 폄적을 당한다. 그러나 이듬해에 황제의 사면을 받는다.
조정에 돌아온 송지문은 그해 바로 홍려주부(鴻?主簿)가 되어 정치에 복귀하게 되는데, 이후로는 특히 위후(韋后), 무삼사(武三思)와 안락공주(安樂公主) 등의 정치 세력과 가깝게 지낸다. 그런데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태평공주(太平公主)가 송지문이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으로서 지공거(知貢擧)를 지낼 때 뇌물을 받았다고 고발해 월주(越州), 흠주(欽州) 등으로 유배를 돌다가 끝내 현종(玄宗) 원년(712)에 사약을 받아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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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석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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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송대학교 글로벌복수학위학과 부교수.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 國立臺灣大學 중문학 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중국고전문학 박사. 중국고전문학 및 중국고전시가 연구에 종사.
[주요 논문 및 저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심전기·송지문의 시가연구'(2005)가 있으며, '李白의 行役詩 초탐', '陶淵明 四言詩의 특색과 그 지위' 등 다수의 소논문이 있으며, 저역서로는 <魏晉四言詩硏究>(2006, 巴蜀書社/최우석 저), <중국문화의 즐거움>(2009, 차이나하우스/최우석 공저), <漢韓學習詞典>(2011, 북경대학출판사/최우석 공저) 외 다수의 저서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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