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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씨책] 정암 문집

[큰글씨책] 정암 문집

왕궈웨이 (지은이), 류창교 (옮긴이)
  |  
지식을만드는지식
2014-12-16
  |  
4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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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씨책] 정암 문집

책 정보

· 제목 : [큰글씨책] 정암 문집 
· 분류 : 국내도서 > 고전 > 동양고전문학 > 중국고전-산문
· ISBN : 9791130459271
· 쪽수 : 396쪽

책 소개

중국 최고의 국학자 왕궈웨이. 그가 직접 편찬 교정해 출간한 첫 학술 문집. 중국 최초로 독일 철학을 소개하고 아울러 중국의 전통 철학과 서양 철학의 비교 연구를 시도했다. 그의 철학과 미학, 문학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보아야 할 책이다.

목차

자서(自序) 3
1. 인성을 논함(論性) 5
2. 이치에 대한 풀이(釋理) 39
3.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교육학설(叔本華之哲學及其?育學說) 74
4. 홍루몽 평론(紅樓夢評論) 116
5. 쇼펜하우어와 니체(叔本華與尼采) 184
6. 현 왕조의 한학파 대진, 완원 두 사람의 철학 학설(國朝漢學派戴阮二家之哲學說) 215
7. 쇼펜하우어 유전설 후기(書叔本華遺傳說後) 240
부록: 쇼펜하우어의 유전설(附: 叔本華氏之遺傳說) 259
8. 최근 몇 년의 학술계를 논함(論近年之學術界) 284
9. 새로운 학술 용어의 수입에 대해 논함(論新學語之輸入) 298
10. 철학자와 예술가의 천직을 논함(論哲學家與美術家之天職) 309
11. 교육우감 4칙(?育偶感 四則) 316
12. 대중 교육주의를 논하다(論平凡之?育主義) 329

해설 335
지은이에 대해 341
지은이 연보 384
옮긴이에 대해 388

저자소개

왕궈웨이 (지은이)    정보 더보기
마지막 황제 푸이(傅儀)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 자는 정안(靜安), 정암(靜庵), 백우(伯隅) 등이고 호는 예당(禮堂)이며, 만년에는 영관당(永觀堂)이라고 했다가 관당(觀堂), 영관(永觀)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했다]는 철학, 미학, 문학, 희곡사, 갑골문, 금문(金文), 고대 기물, 은주(殷周) 역사, 한대와 진대(晉代)의 목간(木簡), 한위(漢魏)의 비각(碑刻), 둔황(敦煌) 문헌, 서북지리(西北地理), 몽고사 등을 연구해 각 영역에서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 왕궈웨이는 1877년(청 광서 3년) 12월 3일(음력 10월 29일) 진시(辰時)에 저장성(浙江省) 하이닝[海寧, 지금의 하이닝시(海寧市) 옌관진(鹽官鎭)] 솽렌항(雙仁巷)에서 태어났다. 1892년(광서 18년, 만 15세) 7월에 주학(州學)에 들어가 하이닝주(海寧州)의 세시(歲試)에 참가해서 21등으로 합격해 수재(秀才)가 된다. 이때 왕궈웨이는 그 고을에서 이름을 떨쳐 천소우첸(陳守謙), 예이춘(葉宜春), 주자요우(褚嘉猷) 등과 함께 “하이닝의 네 재주꾼(海寧四才子)”으로 불렸다. 1898년 2월에 왕궈웨이는 상하이로 가서 일을 찾던 중 친구의 주선으로 시무보관(時務報館)에 취직한다. ≪시무보≫는 진보적 저널리스트인 왕캉녠(汪康年)이 주필을 맡고 있던 유명 시사 잡지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서기와 교정 일을 보았다. 3월 22일에 뤄전위(羅振玉)가 세운 동문학사(東文學社)가 개학하자 왕궈웨이는 왕캉녠의 동의를 받아 이곳에서 매일 오후 몇 시간 동안 영어와 일어,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습득했는데, 주로 화학, 물리, 수학, 지리 등의 자연과학이었다. 동문학사에서 왕궈웨이는 평생의 후원자인 뤄전위를 만난다. 1901년, 봄에 왕궈웨이는 친구 판빙칭(樊炳淸)과 함께 뤄전위의 요청으로 우창(武昌)의 후베이농무학당(湖北農務學堂)으로 가서 농업 관련 서적과 사건들을 번역하게 된다. 이해 5월에 뤄전위는 상하이에서 잡지 ≪교육 세계(敎育世界)≫를 창간해 왕궈웨이에게 주필을 맡겼다. 왕궈웨이는 이 잡지를 통해 자신의 글과 번역문을 많이 발표하게 되는데, 나중에 여기에 수록된 글의 일부를 모아 ≪정암 문집≫을 출간한다. 1902년 2월 왕궈웨이는 뤄전위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다. 왕궈웨이는 일본에서 스승 후지타의 권유로 이과 공부를 하게 되는데 낮에는 영어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도쿄 물리학교에 가서 수학을 공부했다. 왕궈웨이의 일본 유학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도쿄에 머문 지 4, 5개월 만에 각기병이 재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뤄전위의 동의를 얻어 결국 여름에 귀국하고 말았다. 1903년 3월 왕궈웨이는 퉁저우사범학당(通州師範學堂)에 부임했고 1904년 말에는 장쑤사범학당에서 심리학, 윤리학, 사회학 등을 가르쳤다. 이때 후지타 선생 역시 이 학교에 있었으므로 왕궈웨이는 틈나는 대로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06년(광서 32년, 만 29세) 봄에 청 정부는 학부(學部)를 신설한다. 이때 뤄전위는 돤팡의 추천으로 학부에서 일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정식으로 참사관(參事官)이 되었다. 이에 왕궈웨이 역시 뤄전위를 따라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왕궈웨이는 뤄전위의 집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교육 세계≫의 원고를 집필했다. 1907년 봄에는 뤄전위의 추천을 받아 학부총무사행주(學部總務司行走)가 되었고, 학부 도서관에서 편집과 교과서 등을 편역하고 심의하는 일을 맡는다. 베이징에 온 이후 대략 이 시기부터 왕궈웨이는 철학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되는데, 대략 2, 3년 전, 즉 1904년경부터 이미 철학에 대해 번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형이상학적 염세주의의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체계가 자기 자신의 견식 있는 직관적 지식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철학에 대한 이와 같은 회의가 지속된 결과 1907년경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문학으로 전향하게 된다. 1907년은 왕궈웨이가 철학에 대한 사상적 번민을 거친 뒤 문학을 통해 ‘직접적 위로’를 얻기 위해 사와 희곡 연구로 학술 방향을 전환한 시기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이해 12월에 왕궈웨이는 뤄전위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다. 1911년 이후부터 뤄전위가 왕궈웨이의 학문에 끼친 영향은 특별하다. 뤄전위는 회의주의와 서양 관념의 영향으로 청조가 몰락했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이 줄곧 인정하고 지원했던 왕궈웨이와 같은 사람이 학자적 의무로서 국학을 하기를 희망했다. 뤄전위는 왕궈웨이에게 국학 연구에 최선을 다해 보자고 권유했고 왕궈웨이는 이때부터 “이전의 학문을 다 버리고 오로지 경학과 역사학을 연구했다”. 1916년 1월 2일 왕궈웨이는 4년 동안 머물던 일본을 떠나 상하이로 돌아왔다. 1916년 초에 하둔이 새로 만든 잡지 ≪학술 총편(學術總編)≫의 편집인으로 고용되어 학술 잡지를 편집하면서 교토에서와 마찬가지로 학술 연구에 매진했다. 그 후 1918년부터 창성밍즈대학(倉聖明智大學) 교수를 겸임했다. 왕궈웨이는 상하이에서 약 7, 8년간을 머물렀다.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했지만 학술상의 업적은 풍요로웠으니 그의 유명한 논저는 모두 이 시기에 쓰였고, 명성도 점점 높아만 갔다. 1923년 음력 3월 1일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양종시(楊鍾羲), 징팡창(景方昶), 원쑤(溫肅), 왕궈웨이를 모두 남서방 행주로 임명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직무는 학문 강론, 서적 조사, 시 낭송, 그림 그리기, 골동품 감상 등으로 청반(淸班), 즉 소위 문학(文學) 시종지신(侍從之臣)에 속했다. 그러나 황제의 신임을 얻어 초안 작성을 돕거나 정무를 처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서방 행주라는 직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924년 펑위샹(馮玉祥)의 국민군이 베이징을 침략해 새로운 내각을 만들고 푸이를 자금성에서 내쫓았다. 황제가 일본 영사관으로 피신한 뒤 왕궈웨이는 후쓰의 추천을 받아들여 1925년부터 칭화대(淸華大) 국학연구원의 교수가 되었다. 칭화대학에서 왕궈웨이의 생활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무엇보다 연구소에서 그는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둘러싸였으며 그들은 모두 그를 학자로서 인간으로서 존경해 주었다. 왕궈웨이는 이곳에서 그 자신의 지적 흥미를 추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후에 그는 초기 몽골 시기의 역사와 지리 연구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 이 시기에 왕궈웨이는 또한 국가적 사업으로 서북 변경 지리(西北邊疆地理)와 요(遼), 금(金), 원(元)의 역사를 연구했다. 당시 그는 학계의 거두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이 되었는데, 거의 쉰이 다 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와 고대 소수 민족 문자에 정통한 소장학자 뤄쥔추(羅君楚, 당시 20여 세)와 천인커(陳寅恪, 당시 30여 세)에게 찾아가 배움을 청할 정도로 학문에 정열을 쏟았다. 청화원에서 조용한 생활을 보내던 그는 1926년 말엽 일련의 심각한 사건을 겪으면서 우울해졌다. 1926년에 그의 장남이 사망한 데다 장례 문제로 그의 아내와 며느리(뤄전위의 딸)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오랜 후원자인 뤄전위와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하게 된다. 게다가 1927년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시대의 불안감은 극대화되었고 그는 나라의 미래와 황제의 안전에 대해 낙담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해 대단히 비관적이었고 자살하기 바로 전날인 1927년 6월 1일에 삶의 허무와 체념을 드러낸 글을 남기고, 다음 날 오전 이허위안(頤和園) 쿤밍호(昆明湖)에서 투신자살했다. 그의 몸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이 세상의 변화를 겪게 되었으니, 옳음으로 다시는 욕되지 않으리라”라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 황제 푸이는 왕궈웨이에게 “충각(忠悫)”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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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창교 (지은이)    정보 더보기
안동 하회에서 태어나 한국고등 교육재단에서 한학연수 장학생으로 사서삼경을 수학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왕국유(王國維) 문예 비평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동아시아어문과 특별연구원, 중국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방문학자, 숙명여자대학교 인문학부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미국(美國)의 중국 문학(中國文學) 연구(硏究)≫(2003), ≪세상의 노래 비평, 인간사화(人間詞話)≫(역주서, 2004),≪왕국유 평전≫(2005), ≪완역 설도 시집≫(2012), ≪완역 어현기 시집≫(2013) 등이 있고, 중국 고전 문학과 중국 여성 문학에 대한 논문이 여럿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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