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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노래비평, 인간사화

세상의 노래비평, 인간사화

왕궈웨이 (지은이), 류창교 (옮긴이)
소명출판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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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노래비평, 인간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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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세상의 노래비평, 인간사화 
· 분류 : 국내도서 > 대학교재/전문서적 > 어문학계열 > 중어중문학
· ISBN : 9788956260778
· 쪽수 : 270쪽
· 출판일 : 2004-08-15

책 소개

동양의 쇼펜하우어라고 일컫는 중국의 천재적 학자 왕국유의 대표작인 '인간사화(人間詞話)"에 대한 번역 및 주석서. 중국의 전통문학을 집대성하면서 동시에 근현대 중국시학의 발전에 영향을 끼친 명작으로 중국의 시가를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로 꼽히고 있다.

목차

역자 서문

제1장 국수학보 발표본 (64조)

1.사 비평의 기준, 경계 / 2.만든 경계와 그린 경계 / 3.유아지경과 무아지경 / 4.우미와 숭고 / 5.사실주의자와 이상주의자 / 6.경계의 조건, 참된 감정과 참된 경물 / 7.한 글자로 경계가 나타난 경우 / 8.큰 경계와 작은 경계 / 10.경계는 근본, 흥취와 신운은 겉모양 / 10.이백의 시와 기상 / 11.온정균의 사 / 12.온정균,위장,이욱의 사의 품격 / 13.이경의 사의 명구 / 14.온정균,위장,이욱의 사의 비교 / 15.이욱의 사 / 16.갓난아이의 마음을 지닌 이욱 / 17.객관적 시인과 주관적 시인 / 18.피로 쓴 이욱의 사 / 19.북송의 기풍을 연 풍연사의 사 / 20.풍연사의 사의 명작들

21.구양수의 사의 명구 / 22.구양수는 풍연사의 사를 배웠다 / 23.봄 풀을 노래한 명작 / 24.시경의 '갈대'와 안수의 '나비는 꽃을 사모하네' / 25.시인의 삶 걱정, 세상 걱정 / 26.성공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경계 / 27.구양수의 '옥 누대의 봄' / 28.진관과 안기도 비교 / 29.진관의 '사초를 밟으며' / 30.시경,초사,시,사에서 기상이 비슷한 작품들 / 31.도연명의 시,설수의 부 그리고 소식과 강기의 사 / 32.숙녀의 노래와 기생의 노래 / 33.주방언의 사 / 34.대체자를 쓰지 말라 / 35.대체자를 쓰지 말라 / 36.주방언의 사와 강기의 사 / 37.소식의 '물 속 용의 노래' / 38.사물을 노래한 사 / 39.가리어진 글자 / 40.가리어짐과 가리어지지 않음

41. 가리어지지 않은 감정묘사와 경물묘사 / 42.강기는 일류작가는 아니다 / 43.남송의 뛰어난 작가,신기질 / 44.소식의 사와 신기질의 사 / 45.소식,신기질,강기의 사 / 46.사 작가 가운데 위선자 / 47.신기질의 신비한 깨달음 / 48.사달조와 주방언의 사에 대한 말들 / 49.오문영의 사의 명구 / 50.오문영의 사와 장염의 사 / 51.천고의 장관, 납란성덕의 '길이 서로 그리워하며' / 52.진실하고 절실한 오랑캐 작가,납란성덕 / 53.시와 사의 창작상의 우열 / 54.시가 장르의 흥망성쇠 / 55.작품의 제목 붙이기 / 56.대가의 작품 / 57.시와 사의 도를 얻는 방법 / 58.창작에서 역사적 사건의 인유 / 59.시와 사의 체제 비교 / 60.세상 안으로 들어가기와 세상 밖으로 나오기 / 61.시인이 사물을 대하는 방법 / 62.음탕한 언어,비속한 언어,불성실한 언어 / 63.원대 마치원의 명작,'하늘의 맑은 모래' / 64.원대의 명극작가 백박이 사에 뛰어나지 못한 이유

제2장 미발표 원고 (50조)

1.강기의 사에서 내가 아끼는 구절 / 2.문학 성쇠의 한 관건 / 3.하늘의 음악에 대한 오해 / 4.천박한 시들 / 5.나는 타인의 운을 차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 6.내 친구 심굉이 지은 '나비는 꽃을 사모하네' / 7.내가 지은 시 / 8.서정시는 국민이 유치한 시대에 짓는 것 / 9.하주의 사는 참맛이 ㅈ거다 / 10.장르별 창작의 난이도 / 11.기쁨과 즐거움의 말을 뛰어나게 표현하기는 어렵다 / 12.천재를 죽이는 문학의 관습 / 13.시의 경계와 사의 언어 / 14.경계는 근본,기질과 신운은 말단 / 15.옛 사람의 경계를 자신의 경계로 만드는 방법 / 16.감정을 묘사한 언어만으로 우수작이 된 경우 / 17.긴 노래에 뛰어난 작가들 / 18.신기질의 뛰어난 사 '신랑에게 축하하며' / 19.북방악곡의 사성통압의 시조,신기질과 한옥의 사 /20.장춘림,항홍조,납란성덕의 사 비교

21.장염의 '사의 근원'에 대한 하상의 평가 / 22.장염에 대한 주제의 평가 / 23.사의 시대에 대한 논의 / 24.살아 있는 향기와 채색한 꽃 / 25.왕사정의 사집 '넘치는 물결' / 26.담헌의 시와 주효장의 사 / 27.송징여와 담헌의 '나비는 꽃을 사모하네' / 28.왕봉운의 명작 '까치가 나뭇가지를 밟다' 10수' / 29.비평가 장혜언의 의도적 오류 / 30.사달조의 사에 대한 강기와 하상의 비평 / 31.억지를 부려 창작하는 것은 쓸 데 없는 짓 / 32.남송 이후의 사는 명작이 없다 / 33.주밀과 장염의 사는 말라비틀어졌다 / 34.놀랄 만한 구절이라고 할 수 없는 사달조와 장염의 사구 / 35.문천상과 유기의 사 / 36.북송 사와 남송 사의 비교 / 37.'사선집 초가집'과 '뛰어나고 훌륭한 사' 비교 / 38.'고금의 사에 대한 평론'의 판본 문제 / 39.정치가의 눈과 시인의 눈 / 40.남송의 기생 엄예의 '예언자'

41.괜찮은 구와 괜찮은 작품 / 42.광대의 사와 속인의 사 / 43.'나비는 꽃을 사모하네'(홀로 높은 누대에 기대어)의 작가 / 44. 경박한 작품은 지어서는 안 된다 / 45.작사가는 충실해야 한다 / 46.사집과 시집의 비교 / 47.명말,청초,청중 후기의 사비평의 문제점 / 48.소식의 활달함과 강기의 활달함의 차이 / 49.문학에서 내면적 알므다움과 갈고 닦음의 중요성 / 50.시인이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성질,해학과 엄중

제3장 삭제한 원고 (12조)

1.쌍성과 첩운 / 2.쌍성,첩운과 사성과의 관계 / 3.경물을 묘사한 언어는 감정을 묘사한 언어이다 / 4.공자도 '진정성'을 시비평의 기준으로 삼았다 / 5.'길이 서로 그리워하며'의 작가 / 6.화응의 '기구한 운명의 여인' / 7.원대 잡극의 선구 / 8.바치는 말 / 9.사총집 '술잔 앞에서'의 편찬자와 연대 / 10.가장 뛰어난 문학은 훌륭한 창조와 훌륭한 계승이 있다 / 11.초사,오언 고시,사의 명작가 / 12.음탕한 사,비속한 사,불성실한 사

해제 - 아름다운 경계,'인간사화'
참고문헌
주요 판본별 조칙 대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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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왕궈웨이 (지은이)    정보 더보기
마지막 황제 푸이(傅儀)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 자는 정안(靜安), 정암(靜庵), 백우(伯隅) 등이고 호는 예당(禮堂)이며, 만년에는 영관당(永觀堂)이라고 했다가 관당(觀堂), 영관(永觀)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했다]는 철학, 미학, 문학, 희곡사, 갑골문, 금문(金文), 고대 기물, 은주(殷周) 역사, 한대와 진대(晉代)의 목간(木簡), 한위(漢魏)의 비각(碑刻), 둔황(敦煌) 문헌, 서북지리(西北地理), 몽고사 등을 연구해 각 영역에서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 왕궈웨이는 1877년(청 광서 3년) 12월 3일(음력 10월 29일) 진시(辰時)에 저장성(浙江省) 하이닝[海寧, 지금의 하이닝시(海寧市) 옌관진(鹽官鎭)] 솽렌항(雙仁巷)에서 태어났다. 1892년(광서 18년, 만 15세) 7월에 주학(州學)에 들어가 하이닝주(海寧州)의 세시(歲試)에 참가해서 21등으로 합격해 수재(秀才)가 된다. 이때 왕궈웨이는 그 고을에서 이름을 떨쳐 천소우첸(陳守謙), 예이춘(葉宜春), 주자요우(褚嘉猷) 등과 함께 “하이닝의 네 재주꾼(海寧四才子)”으로 불렸다. 1898년 2월에 왕궈웨이는 상하이로 가서 일을 찾던 중 친구의 주선으로 시무보관(時務報館)에 취직한다. ≪시무보≫는 진보적 저널리스트인 왕캉녠(汪康年)이 주필을 맡고 있던 유명 시사 잡지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서기와 교정 일을 보았다. 3월 22일에 뤄전위(羅振玉)가 세운 동문학사(東文學社)가 개학하자 왕궈웨이는 왕캉녠의 동의를 받아 이곳에서 매일 오후 몇 시간 동안 영어와 일어,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습득했는데, 주로 화학, 물리, 수학, 지리 등의 자연과학이었다. 동문학사에서 왕궈웨이는 평생의 후원자인 뤄전위를 만난다. 1901년, 봄에 왕궈웨이는 친구 판빙칭(樊炳淸)과 함께 뤄전위의 요청으로 우창(武昌)의 후베이농무학당(湖北農務學堂)으로 가서 농업 관련 서적과 사건들을 번역하게 된다. 이해 5월에 뤄전위는 상하이에서 잡지 ≪교육 세계(敎育世界)≫를 창간해 왕궈웨이에게 주필을 맡겼다. 왕궈웨이는 이 잡지를 통해 자신의 글과 번역문을 많이 발표하게 되는데, 나중에 여기에 수록된 글의 일부를 모아 ≪정암 문집≫을 출간한다. 1902년 2월 왕궈웨이는 뤄전위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다. 왕궈웨이는 일본에서 스승 후지타의 권유로 이과 공부를 하게 되는데 낮에는 영어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도쿄 물리학교에 가서 수학을 공부했다. 왕궈웨이의 일본 유학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도쿄에 머문 지 4, 5개월 만에 각기병이 재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뤄전위의 동의를 얻어 결국 여름에 귀국하고 말았다. 1903년 3월 왕궈웨이는 퉁저우사범학당(通州師範學堂)에 부임했고 1904년 말에는 장쑤사범학당에서 심리학, 윤리학, 사회학 등을 가르쳤다. 이때 후지타 선생 역시 이 학교에 있었으므로 왕궈웨이는 틈나는 대로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06년(광서 32년, 만 29세) 봄에 청 정부는 학부(學部)를 신설한다. 이때 뤄전위는 돤팡의 추천으로 학부에서 일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정식으로 참사관(參事官)이 되었다. 이에 왕궈웨이 역시 뤄전위를 따라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왕궈웨이는 뤄전위의 집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교육 세계≫의 원고를 집필했다. 1907년 봄에는 뤄전위의 추천을 받아 학부총무사행주(學部總務司行走)가 되었고, 학부 도서관에서 편집과 교과서 등을 편역하고 심의하는 일을 맡는다. 베이징에 온 이후 대략 이 시기부터 왕궈웨이는 철학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되는데, 대략 2, 3년 전, 즉 1904년경부터 이미 철학에 대해 번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형이상학적 염세주의의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체계가 자기 자신의 견식 있는 직관적 지식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철학에 대한 이와 같은 회의가 지속된 결과 1907년경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문학으로 전향하게 된다. 1907년은 왕궈웨이가 철학에 대한 사상적 번민을 거친 뒤 문학을 통해 ‘직접적 위로’를 얻기 위해 사와 희곡 연구로 학술 방향을 전환한 시기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이해 12월에 왕궈웨이는 뤄전위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다. 1911년 이후부터 뤄전위가 왕궈웨이의 학문에 끼친 영향은 특별하다. 뤄전위는 회의주의와 서양 관념의 영향으로 청조가 몰락했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이 줄곧 인정하고 지원했던 왕궈웨이와 같은 사람이 학자적 의무로서 국학을 하기를 희망했다. 뤄전위는 왕궈웨이에게 국학 연구에 최선을 다해 보자고 권유했고 왕궈웨이는 이때부터 “이전의 학문을 다 버리고 오로지 경학과 역사학을 연구했다”. 1916년 1월 2일 왕궈웨이는 4년 동안 머물던 일본을 떠나 상하이로 돌아왔다. 1916년 초에 하둔이 새로 만든 잡지 ≪학술 총편(學術總編)≫의 편집인으로 고용되어 학술 잡지를 편집하면서 교토에서와 마찬가지로 학술 연구에 매진했다. 그 후 1918년부터 창성밍즈대학(倉聖明智大學) 교수를 겸임했다. 왕궈웨이는 상하이에서 약 7, 8년간을 머물렀다.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했지만 학술상의 업적은 풍요로웠으니 그의 유명한 논저는 모두 이 시기에 쓰였고, 명성도 점점 높아만 갔다. 1923년 음력 3월 1일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양종시(楊鍾羲), 징팡창(景方昶), 원쑤(溫肅), 왕궈웨이를 모두 남서방 행주로 임명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직무는 학문 강론, 서적 조사, 시 낭송, 그림 그리기, 골동품 감상 등으로 청반(淸班), 즉 소위 문학(文學) 시종지신(侍從之臣)에 속했다. 그러나 황제의 신임을 얻어 초안 작성을 돕거나 정무를 처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서방 행주라는 직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924년 펑위샹(馮玉祥)의 국민군이 베이징을 침략해 새로운 내각을 만들고 푸이를 자금성에서 내쫓았다. 황제가 일본 영사관으로 피신한 뒤 왕궈웨이는 후쓰의 추천을 받아들여 1925년부터 칭화대(淸華大) 국학연구원의 교수가 되었다. 칭화대학에서 왕궈웨이의 생활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무엇보다 연구소에서 그는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둘러싸였으며 그들은 모두 그를 학자로서 인간으로서 존경해 주었다. 왕궈웨이는 이곳에서 그 자신의 지적 흥미를 추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후에 그는 초기 몽골 시기의 역사와 지리 연구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 이 시기에 왕궈웨이는 또한 국가적 사업으로 서북 변경 지리(西北邊疆地理)와 요(遼), 금(金), 원(元)의 역사를 연구했다. 당시 그는 학계의 거두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이 되었는데, 거의 쉰이 다 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와 고대 소수 민족 문자에 정통한 소장학자 뤄쥔추(羅君楚, 당시 20여 세)와 천인커(陳寅恪, 당시 30여 세)에게 찾아가 배움을 청할 정도로 학문에 정열을 쏟았다. 청화원에서 조용한 생활을 보내던 그는 1926년 말엽 일련의 심각한 사건을 겪으면서 우울해졌다. 1926년에 그의 장남이 사망한 데다 장례 문제로 그의 아내와 며느리(뤄전위의 딸)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오랜 후원자인 뤄전위와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하게 된다. 게다가 1927년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시대의 불안감은 극대화되었고 그는 나라의 미래와 황제의 안전에 대해 낙담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해 대단히 비관적이었고 자살하기 바로 전날인 1927년 6월 1일에 삶의 허무와 체념을 드러낸 글을 남기고, 다음 날 오전 이허위안(頤和園) 쿤밍호(昆明湖)에서 투신자살했다. 그의 몸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이 세상의 변화를 겪게 되었으니, 옳음으로 다시는 욕되지 않으리라”라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 황제 푸이는 왕궈웨이에게 “충각(忠悫)”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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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창교 (옮긴이)    정보 더보기
안동 하회에서 태어나 한국고등 교육재단에서 한학연수 장학생으로 사서삼경을 수학했다. 서울대학교에서 ≪왕국유(王國維) 문예 비평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동아시아어문과 특별연구원, 중국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방문학자, 숙명여자대학교 인문학부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 ≪미국(美國)의 중국 문학(中國文學) 연구(硏究)≫(2003), ≪세상의 노래 비평, 인간사화(人間詞話)≫(역주서, 2004),≪왕국유 평전≫(2005), ≪완역 설도 시집≫(2012), ≪완역 어현기 시집≫(2013) 등이 있고, 중국 고전 문학과 중국 여성 문학에 대한 논문이 여럿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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