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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고전 > 동양고전문학 > 중국고전-산문
· ISBN : 9791130459264
· 쪽수 : 396쪽
· 출판일 : 2014-12-16
책 소개
목차
자서(自序) 3
1. 인성을 논함(論性) 5
2. 이치에 대한 풀이(釋理) 39
3.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교육학설(叔本華之哲學及其教育學說) 74
4. 홍루몽 평론(紅樓夢評論) 116
5. 쇼펜하우어와 니체(叔本華與尼采) 184
6. 현 왕조의 한학파 대진, 완원 두 사람의 철학 학설(國朝漢學派戴阮二家之哲學說) 215
7. 쇼펜하우어 유전설 후기(書叔本華遺傳說後) 240
부록: 쇼펜하우어의 유전설(附: 叔本華氏之遺傳說) 259
8. 최근 몇 년의 학술계를 논함(論近年之學術界) 284
9. 새로운 학술 용어의 수입에 대해 논함(論新學語之輸入) 298
10. 철학자와 예술가의 천직을 논함(論哲學家與美術家之天職) 309
11. 교육우감 4칙(教育偶感 四則) 316
12. 대중 교육주의를 논하다(論平凡之教育主義) 329
해설 335
지은이에 대해 341
지은이 연보 384
옮긴이에 대해 388
책속에서
지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으로는 하나는 선천적 지식이고, 하나는 후천적 지식이다. 선천적 지식은 공간과 시간의 형식 및 오성(悟性)의 범주처럼 경험할 필요 없이 생겨나 경험이 그것을 경유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으로 칸트의 지식론이 나온 뒤부터 오늘날 거의 정론이 되었다. 후천적 지식은 바로 경험이 나를 가르치는 것으로 무릇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이것이다. 양자의 지식은 모두 확실성이 있는데 다만 전자는 보편성과 필연성이 있고, 후자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 확실함은 다를 게 없다. 지금 시험 삼아 묻겠는데 본성[性]이라는 것을 과연 선천적으로 아는가? 아니면 후천적으로 아는가? 선천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지식의 형식이며 지식의 재질에는 미치지 못하는데 본성[性]은 진실로 지식의 한 재질이다. 만약 후천적으로 그것을 안다면 아는 것은 또한 본성[性]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으로 아는 본성[性]은 유전과 외부의 영향을 받는 것이 적지 않아서 본성[性]의 본래 면목이 아님이 진실로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언컨대 본성[性]이라는 것은 우리의 지식을 뛰어넘는다.
칸트는 통상 이성이라고 말하는 것을 오성이라고 말하고, 이성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우리가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감각을 결합함으로써 직관을 이루는 것은 감성의 일이고, 직관을 결합해 자연계의 경험을 하는 것은 오성의 일이며, 경험의 판단을 결합해 형이상학의 지식을 만드는 것은 이성의 일이라고 했다. 이 특별한 해석으로부터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은 마침내 이성을 우리가 감각적 능력을 초월해 본체의 세계와 그 관계를 곧장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다만 셸링과 헤겔 무리는 유쾌하게 만족해서 이성의 체계를 조직했는데 그러나 우리의 지력 중에 과연 이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본체의 세계가 과연 이 능력으로 인해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두 따지지 않았다. 쇼펜하우어가 나타나 비로소 엄격하게 오성과 이성을 구별했다. 그는 <충족 이유의 논문>에서 직관 속에 이미 오성의 작용이 존재함을 증명했다. 우리에게 오성의 작용이 있어 이에 직관의 세계가 있고, 이성의 작용이 있어 비로소 개념의 세계가 있다. 그러므로 소위 이성이라는 것은 개념과 분석 종합의 작용을 만드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 작용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사업은 이미 충분히 동물을 훨씬 능가한다. 초감각의 능력은 우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그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충족 이유의 논문>에서 그것을 수천만 마디로 구별했고, 그런 뒤에 이성의 개념이 찬란히 다시 세상에 밝혀졌다. 맹자가 말했다. “마음이 똑같이 그러한 바는 무엇인가? 이(理)고, 의(義)다.” 정자(程子)가 말했다. “성이 곧 이다(性卽理也)”. 이(理)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비록 논리학적 가치 외에 또 윤리학적 가치를 부여했지만 그러나 그들이 이(理)를 마음의 작용으로 본 경우를 살펴본다면 진실로 이성(理性)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설에 따르면 비극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 비극은 극악무도한 사람이 그가 지닌 능력을 다 동원해 얽어 놓은 경우다. 둘째는 맹목적 운명에서 비롯한 것이다. 셋째 비극은 극 중 인물의 위치와 관계가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로 반드시 악독한 성질이나 뜻밖의 변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보통의 인물이 보통의 경우를 당해서 그를 핍박해 이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로 그들은 그 해악을 훤히 알아 번갈아 가하고 번갈아 받으며 각기 애를 다 써 보지만 각자 허물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러한 비극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앞의 두 가지 경우보다 훨씬 심하다. 왜 그런가? 그것이 인생의 최대의 불행이란 예외가 없고 인생 본래의 것임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앞의 두 비극의 경우 우리는 악독한 인물과 맹목적 운명에 대해 두려워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데, 그러나 그런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오히려 요행히 우리 인생에서 모면할 수 있으며 잠시 쉴 곳을 꼭 찾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셋째 경우에는 이 비상한 세력이 인생의 행복을 충분히 파괴할 수 있어서 때때로 우리 앞에 떨어지지 않음이 없으며, 또한 이와 같은 참혹한 행위는 때때로 자신이 받을 뿐만 아니라 혹은 다른 사람에게 가할 수도 있어 몸소 그 가혹함을 당하면서 불평의 소리를 낼 수가 없으니, 이것은 천하에서 지독한 참혹이라고 할 만하다. ≪홍루몽≫의 경우는 바로 셋째 비극이다. 여기서는 보옥과 대옥의 사건을 들어 말해 보겠다. 가모(賈母)는 보채의 아름다움과 유순함을 사랑하고 대옥의 괴팍함을 경계했다. 또한 금옥(金玉)의 사악한 말을 믿고 보옥의 병을 진정시킬 생각을 했다. 왕 부인은 진실로 설씨(薛氏)와 친하고, 봉저는 집안 살림을 돌보고 있기 때문에 대옥의 재주를 시기하고 그것이 자신을 불편하게 할까 봐 걱정했다. 습인(襲人)이 우이저(尤二姐)와 향릉(香菱)의 사건을 경계하다가 대옥이 “동풍이 서풍을 넘어뜨리지 않으면 서풍이 동풍을 넘어뜨리기 마련이다”라고 한 말(제82회)을 듣고는 재앙이 미칠까 두려워 스스로 봉저에게 붙은 것은 또한 자연의 형세다. 보옥은 대옥에게 날마다 맹세하면서도 그를 가장 사랑하는 조모에게는 말할 수 없었으니 보편적 도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하물며 대옥 같은 일개 여자의 경우에랴? 이 몇 가지 원인으로 금과 옥이 합하고 나무와 돌은 헤어지게 되었으니, 또한 어찌 악독한 인물이 있었다거나 특이한 변고가 그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겠는가? 보편적 도덕과 보편적 인정 그리고 보편적 경우가 그렇게 만든 것일 뿐이다. 이로 볼 때 ≪홍루몽≫은 비극 중의 비극이라고 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