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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화

인간사화

왕궈웨이 (지은이), 조성천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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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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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인간사화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외국에세이
· ISBN : 9791173076688
· 쪽수 : 353쪽
· 출판일 : 2025-01-16

책 소개

왕궈웨이의 문예미학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인간사화≫에 대한 역주서다. 시대의 선후에 따라 전국시대에서 청 초에 이르는 시인, 사 작가, 사 작품을 논해 중국 사를 총체적으로 접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원의에 가장 부합하는 판본을 번역의 텍스트로 삼아 ≪인간사화≫의 진면목을 두루 살필 수 있다.

목차

권1 인간사화
1. ‘사(詞)’는 ‘경계(境界)’를 최상으로 여겨
2. ‘창조하는 경계’, ‘묘사하는 경계’가 있어
3. ‘자아가 있는 경계’, ‘자아가 없는 경계’가 있어
4. ‘자아가 없는 경계’는 ‘우미’, ‘자아가 있는 경계’는 ‘굉장’
5. 자연 경물이 예술로 묘사될 때 서로의 관계나 제약에서 벗어나야
6. 인간의 희로애락 또한 마음속의 경계
7. 한 글자로 경물의 경계를 완전히 드러내
8. ‘경계’의 우열은 작품 내용, 정교한 언어에 의해서 구분
9. ‘흥취’·‘신운’은 표면만을 말하는 것에 불과, ‘경계’로 근본을 탐구해야
10. 이백은 기상으로 뛰어나
11. 풍연사는 깊고 아름다우며 넓고 간약, 온정균은 정묘
12. 온정균, 위장, 풍연사의 가사와 사풍
13. 이경의 사는 황량하고 쓸쓸한 감회가 있어
14. 온정균, 위장, 이욱의 뛰어난 점
15. 이욱에 이르러 시야가 넓고 감개가 깊어
16. 사 작가는 아이의 천진한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라야
17. 서사 시인은 세상 경험이 많아야 하지만, 서정 시인은 그럴 필요는 없어
18. 피눈물로 쓴 이욱의 사
19. 풍연사의 사는 북송 시대의 기풍을 열어
20. 위응물, 맹호연의 명구라도 풍연사의 사보다 좋을 수 없어
21. 구양수의 명구는 풍연사의 사에 근거하지만 더욱 세련
22. 구양수는 풍연사의 사풍을 배우려
23. 봄풀의 영혼을 노래한 가락들
24. 안수의 작품은 《시경·겸가》와 시인의 깊은 정취를 최고로 표현
25. 삶과 세상의 근심을 노래한 시와 사
26. 문학도 문학 수양과 예술 능력을 배양, 연마하는 과정을 거쳐야 위대한 작품이 나올 수 있어
27. 구양수의 사는 호방한 가운데 진지하며 들뜨지 않은 정취가 있어
28. 진관은 불행한 신세를 노래하여 운미와 정취가 흘러넘쳐
29. 진관의 사는 〈답사행〉에 이르러 처참하고 격양돼
30. 역대의 시와 사 가운데 기상이 비슷한 작품들
31. 사에는 도연명과 설수의 기상이 적어
32. 전아와 음란의 구별은 정신에 있고 외형에 있지 않아
33. 주방언은 음조에는 뛰어나지만, 뜻에는 뛰어나지 못해
34. 사는 대체자 사용을 꺼려
35. 대체자로 뛰어남을 삼는다면 사가 필요 없어
36. 주방언은 경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강기는 안개 사이로 경물을 본 것 같아
37. 사 작가의 문재에 따라 작품 수준이 결정돼
38. 경물에 대한 노래는 소식이 최고
39. 경물 묘사에서 시인의 감정과 언어 사이에 간격이 있는 작품들
40. ‘간격이 있는 것’과 ‘간격이 없는 것’의 구별
41. 참된 감정과 경물을 묘사해야 ‘간격이 없는[不隔]’ 작품이 될 수 있어
42. 강기의 사는 ‘의경’을 강구하지 않아 언외의 맛, 현외의 소리가 없어
43. 신기질의 사는 성정과 경계가 있어서 뛰어나
44. 소식은 광달, 신기질은 호방, 두 사람과 같은 흉금이 있어야 그들을 배울 수 있어
45. 소식과 신기질은 초탈의 정취가 있고, 강기는 속세에 구속돼
46. ‘광자’·‘견자’·‘향원’ 부류의 사 작가
47. 사 작가의 상상은 과학 이치와 밀접하게 부합
48. 주제와 유희재의 말을 빌려 사달조와 주방언을 평가
49. 주제의 평가만큼 오문영의 사는 아름답지 않아
50. 오문영과 장염의 사풍(詞風)을 그들의 사구(詞句)로 개괄하면
51. 시는 사영운·사조·두보·왕유의 작품이 천고의 장관, 사는 납란성덕의 변새 작품이 그러해
52. 납란성덕은 자연스런 눈과 언어로 사물을 관찰하고 감정을 표현
53. 사는 감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체제가 되어 높은 성취에 도달
54. 문학 체제는 구투와 구속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에서 창조되어
55. 제목은 작품의 뜻을 표현할 수 없어, 제목이 생겨 시와 사가 없어져
56. 대가의 작품은 가슴 깊이 파고들고, 이목에 생생하게 펼쳐져
57. 시나 사의 창작에서 금기해야 할 사항
58. 전고를 사용하지 않아도 출중한 문재를 드러낼 수 있어
59. 시와 사의 체제
60. 시인은 우주와 인생에 대해서 반드시 그 내부로 들어가고 또 그 외부로 나와야
61. 시인은 반드시 외부 경물을 경시하면서도 중시해야
62. 음란과 비속은 허황되고 진실하지 못한 말의 병폐
63. 마치원의 〈천정사〉는 절구의 묘경을 깊이 체득
64. 작가에 따라 잘하고 못하는 장르가 있어

권2 인간사화 미간고
1. 좋아하는 강기의 사 두 구절
2. 시와 사는 교제 도구가 됨으로써 쇠락
3. 문의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4. 남송의 사는 천박한데, 근인들은 도리어 숭상
5. 나는 장조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6. 내 친구 선훙의 사는 안수와 안기도의 풍격을 가지고 있어
7. 나는 사의 새로운 경계를 개척하고 최고의 예술 경지를 추구
8. 장르의 발전은 국민의 문화 수준과 연관되고 창작 규율과도 관계있어
9. 하주의 사는 진실한 뜻이 적어
10. 배우기 쉽지만 잘 쓰기 어렵고, 배우기 어렵지만 잘 쓰기 쉬운 장르
11. 시와 사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 발생하는 예술
12. 문학상의 관습은 천재를 죽여
13. 서정 문학으로 시와 사의 예술 특성
14. 경계는 근본, 기질·신운은 말단
15. 나의 ‘경계’가 있어야, 남의 ‘경계’도 내 것이 될 수 있어
16. 순전히 감정만을 표현한 언어로 절묘한 경지에 이른 작품들
17. 장조로 뛰어난 작품들
18. 신기질의 〈하신랑〉은 신묘의 경지에 이르러
19. 신기질, 한옥의 사는 북곡 사성통압의 선례
20. 장춘림, 항홍조의 사는 장점은 있지만, 납란성덕과 비교할 수 없어
21. 하상의 장염 사에 대한 평가
22. 주제의 장염 사에 대한 평가
23. 사론가들의 북송 사와 남송 사에 대한 평가
24. 당·오대·북송의 사는 “천연 향기와 본래의 색”, 명 대의 사는 “채색한 꽃”
25. 왕사정의 사
26. 담헌, 주샤오짱의 사는 뛰어나지만, 자연스럽고 신묘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해
27. 송징여, 담헌의 사는 감흥 기탁이 심오하며 미묘해
28. 왕펑윈의 사를 읽으면 감정을 억제할 수 없어
29. 작품 해석에서 장혜언의 왜곡
30. 사달조의 평가는 하상보다는 강기의 관점을 따르고 싶어
31. 시와 사는 자연·청신·진실의 정감이 중요, 자구 찾아 고심하는 것은 정신 낭비
32. 북송 사에는 좋은 구가 있지만, 남송 이후로는 없어져
33. 주밀과 장염의 사는 무미건조
34. 사달조, 장염의 구는 경구라 할 수 없어
35. 문천상의 사는 풍격이 높고 경계도 있어
36. 북송 사와 사달조 이후의 남송 사
37. 사집 《초당시여》와 《절묘호사》의 비교, 평가
38. 《고금사화》는 송·명 대에 존재했고, 청 대 심웅이 편찬한 것은 다른 것
39. 사 작가는 시인의 시각을 가져야지, 정치가의 시각을 가져서는 안 돼
40. 송 대의 필기는 믿을 수 없어
41. 좋은 구는 있으나 훌륭한 작품은 없고, 훌륭한 작품은 있으나 좋은 구는 없어
42. 가무·기예인의 사가 될지언정 속인의 작품이 될 수 없어
43. 구양수라야 〈접련화〉 같은 작품을 쓸 수 있어
44. 애정 가사는 지을 수 있지만, 경박하고 교묘한 말은 지을 수 없어
45.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충실한 뜻을 가져야
46. 역대 시집과 사집에는 평선 준칙, 의취, 예술 풍격에서 비슷한 유형이 있어
47. 명 말, 청 초 및 청 중기·말기 사론에서 두 가지 잘못된 점
48. 소식과 강기의 ‘광달’의 차이
49. 사는 서정 문학이라서 내재미가 더욱 중요
50. 모든 사물은 창작의 소재, 창작은 열정으로 진행해야 하며 해학·엄중이 병존해야

권3 인간사화 산고
1. 시와 사에서 쌍성과 첩운의 문제
2. 쌍성, 첩운은 평측의 구속을 받지 않아
3. 시와 사의 제목은 자연과 인생 때문에 일정한 제목이 없어
4. 경물을 묘사한 언어는 바로 감정을 표현한 언어
5. 진실한 감정을 표현하면 공자 문하에서도 삭제되지 않아
6. 〈장상사〉는 옛날 가사, 백거이가 지은 구가 아니다
7. 화응의 〈장명녀〉
8. 원 대 잡극의 선성이 되는 작품들
9. 치어와 그 연출 형식
10. 《존전집》의 편집 연대와 편집자
11. 훌륭한 음악은 창시를 잘해야 하지만 계승도 잘해야
12. 문학 체제는 창시·발전·쇠락의 과정이 있고, 우수한 작가와 작품은 발전의 극성 시기에 나와
13. ‘음란한 사’, ‘저속한 사’, ‘유희의 사’

권4 인간사화 부록
1. 쾅저우이의 사
2. 쾅저우이의 〈동선가〉, 〈소무만〉은 ‘의경’이 주방언과 유사
3. 주샤오짱의 〈완계사〉는 필력이 웅건하며 빼어나
4. 쾅저우이의 듣는 노래 중에 〈만로화〉가 뛰어나
5. 황보송의 사 중에 〈억강남〉은 정취가 심원
6. 위장의 사는 감정이 심후하고 언어가 아름다워
7. 모문석의 사
8. 위승반의 사
9. 고형의 사
10. 모희진의 사
11. 염선의 사는 〈임강선〉 제2수가 뛰어나
12. 장필의 〈완계사〉가 그윽하며 염려
13. 손광헌의 사
14. 주방언의 예술 성취는 두보와 같아
15. 주방언의 사에 대한 강환의 평가는 ‘지언’을 한 것
16. 주방언의 사는 사람 마음에 깊이 파고들어
17. 주방언은 분노·불평 속에 온화·완곡이 풍부하고, 빠름과 느림, 청탁과 억양이 조화를 이루어
18. 운요집 가운데 〈천선자〉
19. 하언은 명 대 사의 명맥을 진작시켜
20. 판즈허우 《인간사》 서문(1) : 문학은 경물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감흥을 심원하게 기탁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
21. 판즈허우 《인간사》 서문(2) : 문학의 관건은 ‘의’와 ‘경’의 심미 결합에 있어
22. 구양수의 〈접련화〉
23. 주방언의 《청옥안》
24. 진관의 〈화당춘〉은 청출어람의 묘미가 있어
25. 강기의 사는 그래도 내용은 있지만, 장염은 단지 걸인과 같아
26. 주방언의 사는 억지로 꾸미는 병폐가 있어
27. 장염을 숭상하는 이유는 모방하기 쉬워서
28. 역대 사 작가에 대한 나의 관점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저자소개

왕궈웨이 (지은이)    정보 더보기
마지막 황제 푸이(傅儀)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왕궈웨이[王國維, 1877∼1927, 자는 정안(靜安), 정암(靜庵), 백우(伯隅) 등이고 호는 예당(禮堂)이며, 만년에는 영관당(永觀堂)이라고 했다가 관당(觀堂), 영관(永觀)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했다]는 철학, 미학, 문학, 희곡사, 갑골문, 금문(金文), 고대 기물, 은주(殷周) 역사, 한대와 진대(晉代)의 목간(木簡), 한위(漢魏)의 비각(碑刻), 둔황(敦煌) 문헌, 서북지리(西北地理), 몽고사 등을 연구해 각 영역에서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 왕궈웨이는 1877년(청 광서 3년) 12월 3일(음력 10월 29일) 진시(辰時)에 저장성(浙江省) 하이닝[海寧, 지금의 하이닝시(海寧市) 옌관진(鹽官鎭)] 솽렌항(雙仁巷)에서 태어났다. 1892년(광서 18년, 만 15세) 7월에 주학(州學)에 들어가 하이닝주(海寧州)의 세시(歲試)에 참가해서 21등으로 합격해 수재(秀才)가 된다. 이때 왕궈웨이는 그 고을에서 이름을 떨쳐 천소우첸(陳守謙), 예이춘(葉宜春), 주자요우(褚嘉猷) 등과 함께 “하이닝의 네 재주꾼(海寧四才子)”으로 불렸다. 1898년 2월에 왕궈웨이는 상하이로 가서 일을 찾던 중 친구의 주선으로 시무보관(時務報館)에 취직한다. ≪시무보≫는 진보적 저널리스트인 왕캉녠(汪康年)이 주필을 맡고 있던 유명 시사 잡지였는데, 이곳에서 그는 서기와 교정 일을 보았다. 3월 22일에 뤄전위(羅振玉)가 세운 동문학사(東文學社)가 개학하자 왕궈웨이는 왕캉녠의 동의를 받아 이곳에서 매일 오후 몇 시간 동안 영어와 일어, 서양의 새로운 학문을 습득했는데, 주로 화학, 물리, 수학, 지리 등의 자연과학이었다. 동문학사에서 왕궈웨이는 평생의 후원자인 뤄전위를 만난다. 1901년, 봄에 왕궈웨이는 친구 판빙칭(樊炳淸)과 함께 뤄전위의 요청으로 우창(武昌)의 후베이농무학당(湖北農務學堂)으로 가서 농업 관련 서적과 사건들을 번역하게 된다. 이해 5월에 뤄전위는 상하이에서 잡지 ≪교육 세계(敎育世界)≫를 창간해 왕궈웨이에게 주필을 맡겼다. 왕궈웨이는 이 잡지를 통해 자신의 글과 번역문을 많이 발표하게 되는데, 나중에 여기에 수록된 글의 일부를 모아 ≪정암 문집≫을 출간한다. 1902년 2월 왕궈웨이는 뤄전위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다. 왕궈웨이는 일본에서 스승 후지타의 권유로 이과 공부를 하게 되는데 낮에는 영어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도쿄 물리학교에 가서 수학을 공부했다. 왕궈웨이의 일본 유학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도쿄에 머문 지 4, 5개월 만에 각기병이 재발했기 때문이다. 그는 뤄전위의 동의를 얻어 결국 여름에 귀국하고 말았다. 1903년 3월 왕궈웨이는 퉁저우사범학당(通州師範學堂)에 부임했고 1904년 말에는 장쑤사범학당에서 심리학, 윤리학, 사회학 등을 가르쳤다. 이때 후지타 선생 역시 이 학교에 있었으므로 왕궈웨이는 틈나는 대로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06년(광서 32년, 만 29세) 봄에 청 정부는 학부(學部)를 신설한다. 이때 뤄전위는 돤팡의 추천으로 학부에서 일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정식으로 참사관(參事官)이 되었다. 이에 왕궈웨이 역시 뤄전위를 따라 베이징으로 갔다. 베이징에서 왕궈웨이는 뤄전위의 집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교육 세계≫의 원고를 집필했다. 1907년 봄에는 뤄전위의 추천을 받아 학부총무사행주(學部總務司行走)가 되었고, 학부 도서관에서 편집과 교과서 등을 편역하고 심의하는 일을 맡는다. 베이징에 온 이후 대략 이 시기부터 왕궈웨이는 철학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되는데, 대략 2, 3년 전, 즉 1904년경부터 이미 철학에 대해 번민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형이상학적 염세주의의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체계가 자기 자신의 견식 있는 직관적 지식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철학에 대한 이와 같은 회의가 지속된 결과 1907년경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문학으로 전향하게 된다. 1907년은 왕궈웨이가 철학에 대한 사상적 번민을 거친 뒤 문학을 통해 ‘직접적 위로’를 얻기 위해 사와 희곡 연구로 학술 방향을 전환한 시기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이해 12월에 왕궈웨이는 뤄전위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다. 1911년 이후부터 뤄전위가 왕궈웨이의 학문에 끼친 영향은 특별하다. 뤄전위는 회의주의와 서양 관념의 영향으로 청조가 몰락했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이 줄곧 인정하고 지원했던 왕궈웨이와 같은 사람이 학자적 의무로서 국학을 하기를 희망했다. 뤄전위는 왕궈웨이에게 국학 연구에 최선을 다해 보자고 권유했고 왕궈웨이는 이때부터 “이전의 학문을 다 버리고 오로지 경학과 역사학을 연구했다”. 1916년 1월 2일 왕궈웨이는 4년 동안 머물던 일본을 떠나 상하이로 돌아왔다. 1916년 초에 하둔이 새로 만든 잡지 ≪학술 총편(學術總編)≫의 편집인으로 고용되어 학술 잡지를 편집하면서 교토에서와 마찬가지로 학술 연구에 매진했다. 그 후 1918년부터 창성밍즈대학(倉聖明智大學) 교수를 겸임했다. 왕궈웨이는 상하이에서 약 7, 8년간을 머물렀다.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못했지만 학술상의 업적은 풍요로웠으니 그의 유명한 논저는 모두 이 시기에 쓰였고, 명성도 점점 높아만 갔다. 1923년 음력 3월 1일 청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양종시(楊鍾羲), 징팡창(景方昶), 원쑤(溫肅), 왕궈웨이를 모두 남서방 행주로 임명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직무는 학문 강론, 서적 조사, 시 낭송, 그림 그리기, 골동품 감상 등으로 청반(淸班), 즉 소위 문학(文學) 시종지신(侍從之臣)에 속했다. 그러나 황제의 신임을 얻어 초안 작성을 돕거나 정무를 처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서방 행주라는 직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924년 펑위샹(馮玉祥)의 국민군이 베이징을 침략해 새로운 내각을 만들고 푸이를 자금성에서 내쫓았다. 황제가 일본 영사관으로 피신한 뒤 왕궈웨이는 후쓰의 추천을 받아들여 1925년부터 칭화대(淸華大) 국학연구원의 교수가 되었다. 칭화대학에서 왕궈웨이의 생활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무엇보다 연구소에서 그는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둘러싸였으며 그들은 모두 그를 학자로서 인간으로서 존경해 주었다. 왕궈웨이는 이곳에서 그 자신의 지적 흥미를 추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다. 후에 그는 초기 몽골 시기의 역사와 지리 연구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 이 시기에 왕궈웨이는 또한 국가적 사업으로 서북 변경 지리(西北邊疆地理)와 요(遼), 금(金), 원(元)의 역사를 연구했다. 당시 그는 학계의 거두로 자타가 공인하는 인물이 되었는데, 거의 쉰이 다 된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아시아와 고대 소수 민족 문자에 정통한 소장학자 뤄쥔추(羅君楚, 당시 20여 세)와 천인커(陳寅恪, 당시 30여 세)에게 찾아가 배움을 청할 정도로 학문에 정열을 쏟았다. 청화원에서 조용한 생활을 보내던 그는 1926년 말엽 일련의 심각한 사건을 겪으면서 우울해졌다. 1926년에 그의 장남이 사망한 데다 장례 문제로 그의 아내와 며느리(뤄전위의 딸)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 오랜 후원자인 뤄전위와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을 하게 된다. 게다가 1927년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시대의 불안감은 극대화되었고 그는 나라의 미래와 황제의 안전에 대해 낙담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정치 상황에 대해 대단히 비관적이었고 자살하기 바로 전날인 1927년 6월 1일에 삶의 허무와 체념을 드러낸 글을 남기고, 다음 날 오전 이허위안(頤和園) 쿤밍호(昆明湖)에서 투신자살했다. 그의 몸에서 발견된 유서에는 “이 세상의 변화를 겪게 되었으니, 옳음으로 다시는 욕되지 않으리라”라고 적혀 있었다. 마지막 황제 푸이는 왕궈웨이에게 “충각(忠悫)”이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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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천 (옮긴이)    정보 더보기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했다. 고려대학교 대학원 중어중문학과에서 〈왕선산 시론 연구(王船山詩論硏究)〉로 석사학위, 〈왕부지(王夫之) 시학(詩學)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려대·홍익대 강사를 거쳐 현재 을지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 문학 비평을 전공, 중국 시론(詩論)을 연구했는데, 왕부지의 문예 사상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그 저서로 《왕부지 시가 사상과 예술론 연구》, 역주서로 《강재시화(薑齋詩話)》 등이 있다. 그 논문으로 〈중국 시론상 ‘흥회(興會)’의 역사성과 문예 미학적 의의〉, 〈왕부지 시론상의 온유돈후(溫柔敦厚)론〉, 〈王夫之의 李白詩歌 품평론〉, 〈왕부지 두보 시가 창작에 대한 비평론〉, 〈왕부지의 역대 시론 수용 양상〉, 〈왕부지의 두보 시가에 대한 호평론(好評論)〉, 〈王夫之의 蘇軾 詩文 비판론 初探〉, 〈王夫之 《夕堂永日緖論·外編》의 ‘經義’ 論 고찰〉, 〈王夫之 〈連珠〉의 형식과 표현수법 연구〉, 〈王夫之 《連珠二十八首》의 明朝에 대한 志操·忠貞사상과 反淸의식 고찰〉, 〈王夫之의 시가와 음악의 화해 미학〉 등이 있다. 이외에, 왕부지의 《薑齋文集》에 대한 다수의 역주 연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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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문학이란 작가가 내부로는 자신의 뜻을 충분히 펼치고 외부로는 독자를 충분히 감동시키는 것으로, 그 관건은 ‘작가의 뜻[意]’과 ‘경물[境]’ 두 가지일 뿐이다. 최상의 문학은 ‘작가의 뜻’과 ‘경물’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고 그다음은 경물이 뛰어나거나 혹은 작가의 뜻이 뛰어난 것이다. 만약 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문학이라고 할 수 없다.


세 사람이 주방언 사를 따라 지었고, 두 사람이 주방언 사에 주석을 달았다. [강환(强煥)본에도 주석이 있는데, 이 내용은 (명나라) 모진의 발(跋)에 보인다.] 사대부에서 부녀자에 이르기까지 주방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각종 근거 없는 유언비어도 이로부터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사가 이처럼 사람 마음에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겠는가?


시인은 모든 외물을 모두 정신 유희(문학 창작)의 소재로 본다. 그러나 그들의 유희는 열정으로 진행해야 한다. 때문에 해학과 엄중 이 두 가지 특성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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