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30810898
· 쪽수 : 248쪽
· 출판일 : 2017-04-05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1 유랑하는 자들
베를린 지하철역의 백수광부 / 특별한 소포 / 별장지기 조씨 / 국경 노인 / 랍샤의 유랑 / 불목하니 / 퓌센에서 / 베르쿠치 카잔 / 침낭 속의 남자
2 술의 시간
동경월야(東京月夜) / 가다가 돌아온, 최씨 / 월하독작 / 일진 사나운 날 / 처용의 변명 / 야경국가 시민
3 고요를 깨뜨리는 소소한 옛이야기
인왕제색(仁王霽色)을 그리다 / 택견의 고수 / 손돌목 / 성약, 지치의 효과 / 화관을 쓴 남자 / 피형극(皮影戱) / 투계(鬪鷄)의 전설
4 탱자나무집 계집애
섣달 그믐날 / 그 어쩔 수 없던 봄밤 / 독한 년 / 진눈깨비로 인하여 / 살비듬 / 탱자나무 가시는 제 살을 찌르지 않는다 / 기우도(騎牛圖) / 단경기(斷經期) / 속살 / 그 가을의 전설
5 증미산 사람들
치명적 실수 / 매파 시대 / 연비어약정 / 신만무방뎐 / 길 잃은 팜티루엔 / 보물 서점 / 끽연가 / 첨탑 꼭대기에서 / 옹(翁)과 환(幻)의 대화
6 별종들
작업반장 조씨 / 쟁기 / 짝귀 / 먹물꽃 / 급성 중독 / 먹물 1 / 먹물 2· / 반추동물의 입냄새 / 세상의 소금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
7 천지자연이 나의 스승
불무골의 여름밤 / 꽃물 / 구들장 / 낙타, 멍에를 벗다 / 매미 / 이화원경(梨花遠景) 1 / 이화원경(梨花遠景) 2 / 자웅동체(雌雄同體) / 기억 저편의 기억 / 밥 / 민달팽이
[발문] 영원히 끝나지 않을 세헤라자데의 저녁_ 손종업
찔딱! 찔딱! 그의 발짝 소리가……_ 심아진
저자소개
책속에서
나는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다. 그래서 책을 파게 되었고 거기서 옛사람 노자를 만났다. 어질고 총명했다던 그는 “텅 빈 골짜기에 무궁무진의 생명〔谷神不死〕이 들어 있으며, 그 골짜기를 현묘한 암컷〔玄牝〕이라 부르고 천지의 뿌리가 그 현묘한 암컷에 닿아 있어 면면히 이어져 오늘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젊은나는 이 낡고 사악한 문장에 홀려, 여우굴로 떨어졌다.
어느 인간이든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감추고 싶은 옹색한 골짜기 하나씩을 갖고 있다. 그늘지고 축축한 골짜기에 웅크리고 있는 취약한 존재, 그 취약한 영혼에게 말을 걸며 손을 잡아주는 것이 소설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또 옛사람이 말한 텅 빈 골짜기, 그곳을 드나들며 이야기를 채웠다 덜어내기를 반복해서 성채를 짓는 작업이라고. 인생 굴곡진 터널을 더듬더듬 짚어가는 과정을 글로 담겠다고, 야무진 꿈을 꾸기도 했다. 세상과의 불화 때문에 마음이 꽉 닫혀버린 이에게 바늘귀만큼의 구멍이라도 뚫어주고, 깊은 상실감으로 가슴 한편이 구멍 난 사람에겐 바람막이 점퍼를 입혀주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제 입술을 열어 스스로 말하고 집 한 채씩을 짓도록 돕고 싶었다.
그동안 짬짬이 써놨던 짧은 소설을 묶으며 다시 소설 쓰기를 돌아본다. 짧든 길든 소설은 작업자만의 언어로, 고유한 소재와 고유한 무늬로 집 한 채를 짓는 것이다. 개인의 소소한 이야기로 소품 하나를 만들기도 하지만 짧은 분량 안에 긴 서사를 압축시켜 졸박하게 완성할 때도 있다. 보통 나뭇잎 한 장 또는 A4 용지 한두 장에 쓸 수 있는 소설이라 해서 엽편소설(葉篇小說) 또는 초단편이라고 명한다. 짧다고 해서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다. 그렇다고 어려운 작업도 아닌 것이 초단편 쓰기다. 문학작품은 저마다 생명을 지녀 제 키를 제가 결정하고 독생자처럼 탄생한다. 작가는 그들의 말을 받아 적고 거기에 숨결 한 줌을 불어넣어줄 뿐이다.
문득 돌아보니, 맑은 눈에 머리숱 많던 여자는 어디로 가고 중늙은이 하나가 무한 삽질의 노역장에서 바닥을 기고 있다. 여자는 힘겹게 등짐을 지고 가파른 비탈길을 오르는 낙타 꼴이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시력을 앗긴 노역장에서 아직도 칼을 갈고 있었다. 애초에 칼을 좀 쓸 줄 알았더라면 궁금증의 헛것들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사악한 고문(古文) 따위에 말려들지도 않았으며 등골 휘는 집자 노역에 사로잡혀 애면글면 삶을 탕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먼 길을 에둘러 걸어왔다. 어쩌겠는가, 깨달음은 늘 뒤통수를 치며 한걸음 뒤에서 쫓아왔으니. 요즘은 내 귀가 참말로 순해졌다. 그래서 다시 노자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동안 세상을 떠돌며 만났던 천지자연이 모두 나의 스승이었고, 참을 수 없는 호기심 때문에 여우굴로 떨어졌던 참담함,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취약한 존재를 만난 것, 바로 그것들이 나를 살게 한 생명력이었음을 비로소 알았다. 음습하고 황량한 골짜기를 오르내렸던 힘으로 오늘도 나는 유랑길에 서 있다. 갈 길은 먼데 날이 저물었다. 저물녘의 내 그림자는 자꾸 무릎이 꺾여 허방을 짚기도 한다.
- 책머리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