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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30814216
· 쪽수 : 240쪽
· 출판일 : 2019-04-30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1. 모정
방언 / 배롱나무 아래에서 / 만쿠르트의 전설 / 탱자나무집 남자 / 아그배꽃 향기 / 어둠 속의 댄서 / 꼬마 천사 은성이와 이별 / 서랍 속 편지 / 굴뚝 낮은 집
2. 세상, 그물코의 비밀
툰드라의 야생화 / 종자의 비밀 / 에덴의 동쪽, 알혼섬 / 기다림이 낳은, 세한도 / 누가 부른 재앙인가? /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 멈추다, 그 꽃에서 / 굴뚝 청소부 / 돌아온 꾀꼬리 / 절름발이 염소의 몫
3. 도원을 찾아서
보길도에서 취하다 / 잠향(潛香)이 흐르는 명화 / 탱자나무 가시는 제 살을 찌르지 않는다 / 그이의 무덤가에 조팝나무 한 그루 심어주고 싶다 / 기린에 대한 단상 / 천상의 방 / 되재공소를 찾아서 / 유림(柳林) 속을 걷다 / 문향(文香) / 파에야, 재회의 약속
4. 책과 영화의 뒷담화
유랑의 성자, 니코스 카잔자키스 / 소설은 회의주의자의 문학 / 누군가의 고뇌와 비통으로 태어난 문장들! / 현대인의 정신적 내상을 그린 소설 / 노학자의 깊은 눈길을 따라 겸재와 만나다 / 수상쩍은 경계를 맛보다 / 찬이슬 같은 소설 / 참 다행이었다, 놓칠 뻔했던 『위대한 개츠비』 / 아슬아슬한 감정의 경계를 실핏줄처럼 그려냈다 / 작은 소리지만 울림이 깊다 / 짭조름하게 간이 밴 중국 보고서 / 베르길리우스의 지팡이 / 암컷의 속울음 / <귀래(歸來)>를 보고 / 다문 입 / <간신>, 흥청의 제국
5. 내가 따를 사표
무(無)에의 추구 / 칠층산 / 눈먼 이의 소원 / 줄탁동시의 기적 / 파스카 신비 / 노회한 그물망 / 성 아우구스티누스 / 창공의 새들처럼 / 온생명
저자소개
책속에서
천장에서부터 늘어뜨린 무명천이 만장(輓章)처럼 너울거렸고 요령 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지고 또 흐릿했다가 명료해지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영혼은 갈팡질팡 걸음을 뗄까 말까 망설이며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았다. 첫걸음마를 하는 어린애처럼 벌벌 떨며 황천길을 노려보고 있던 망자의 모습. 그때, 정덕미 선생의 하얀 버선발이 내 눈에 띄었고, 순간 숨이 콱 막히며 예리한 금속성이 가슴을 긋고 지나가는 통증을 느꼈다. 절체절명의 순간처럼 오목가슴께가 찔리듯 아팠다. 3년 전에 떠나가신 어머니, 그분 관 속에 가지런히 묶였던 옥양목 버선발이 거기 있었다. 불교식으로 염습(斂襲)을 해드렸었다. 어머니는 동생이 직접 지은 한복 수의를 입고 가셨다. 그때 신으셨던 옥양목 버선발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입속말로 계속 주문을 외고 있었다. “한 발 한 발 내딛으세요, 어머니! 빛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세요.” 하고. 한참을 비틀거리던 영혼은 마지막으로 뒤를 길게 돌아보더니, 훨훨 춤을 추며 떠났다. 그런데 이상하게 콱 막혔던 내 가슴도 시나브로 뚫리며 폐 깊은 곳까지 숨결이 닿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이 쏟아졌던지 공연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 얼굴을 들지 못했다. 겨릅대처럼 가볍고 농익은 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이 공연장을 숨죽이게 했다. 소싯적부터 몸 안에 켜켜이 쌓인 춤출 거리가 예순이 넘어 깨어났다고 했다. 정덕미 소피아, 그의 오랜 기다림의 기도가 영성의 꽃을 활짝 피워내는 순간이었다. 화양연화(花樣年華)와 같은 절정의 순간!
장미 가시가 제 꽃을 보호하기 위해 독을 품었다면 탱자나무 가시는 남을 지켜주기 위해 날카로움을 지녔다. 지금도 제 품에 깃든 생명들을 다소곳이 품고 초록 가시를 짱짱히 굳히며 겨울을 나고 있다. 나는 지금 신참내기 작가 시절 다짐했던 약속을 지켜가고 있는가, ‘생명을 살리고 보듬는 자연을 닮은 글’을 쓰겠다던 그 약속을. 탱자나무처럼 누군가에게 의지가지가 되어주고 품을 내주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한 해의 삶을 돌아보면서 가슴 철렁한 계절이다.
탱자나무 울타리 앞에 자식들을 세워놓고 ‘낱생명’들의 이름을 알려주고 오묘한 곤충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눈을 뜨게 해주신 아버지, 그분의 밝은 눈길이 그리운 계절이다. 가죽나무처럼 키가 껑충했던 아버지는 뒷짐을 진 채 탱자나무 울타리 앞에서 늘 서성거리며 그 너머의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저 올망졸망한 여섯 생명들을 두고 떠날 날이 천둥처럼 다가오고 있음을 짐작했을 것이다. 붉은 핏덩어리를 한 대야쯤 쏟아내던 그날 아침, 얼마나 눈앞이 캄캄했을까? 당신 병환 중에 이 몸을 잉태시켜 부실한 DNA를 물려받아, 평생을 골골거리며 살아가고 있지만,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곳 세상에서는 숨 좀 쉴 만하시던가요?
나는 가슴이 몹시 답답할 때면 이곳에 온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강한 것에 중독되어 작은 소리는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소수의 뜻이거나 소외계층의 힘없는 소리들이…….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상대방이 나의 속내를 몰라주거나 내 작은 소리가 세상을 향해 옳다고 소리쳐도 반응이 없을 때도, 나는 나를 영악하게 대변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질 때 이 무덤가에 서면, 조금은 어눌한 듯한 손돌 공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보기에는 막힌 듯하오나 좀 더 나아가면 앞이 확 트일 터이니 괘념치 마시옵소서.’ 이 어눌한 외침이 나를 위로한다.
지금 우리 시대에도 손돌공의 외침 같은 순박한 소리는 묵살당하고, 그의 목숨처럼 억울하게 희생되는 이는 없는가? 날 선 목소리들이 세상을 이끌어가고 작은 소리는 뒷전으로 밀려나 저 손돌목의 물소리처럼 울고 있지는 않은지. 귀를 열고 작은 소리를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