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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국내 BL
· ISBN : 9791131572313
· 쪽수 : 384쪽
· 출판일 : 2016-06-29
책 소개
목차
핫라인
외전
저자소개
책속에서
“문제가 있어요. 저는 제 의지로 여기에 온 게 아닙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인간이 핫라인인지 뭔지와 계약을 했다고 하는데, 그 계약은 명백하게 무효입니다.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은 계약은 물론 파기할 수 있겠죠. 제게 계약서와 그 항목을 보여주십시오.”
노만은 자신의 예상이 맞은 것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윌리엄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인님. 미스터 리의 계약에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회사와 직접 계약한 게 아니라고 하는군요.”
“…….”
윌리엄은 침묵을 지켰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 다소 까다로운 상황이 되었다고 노만은 생각했다.
“미스터 리는 옥스퍼드 출신입니다. 그것도 법대에 다니고 있고요.”
“흐음.”
화가 났는지 흥미를 느끼는지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노만은 윌리엄의 어조에서 작은 힌트라도 감지하고 싶었지만 포기했다.
“소송을 걸 수도 있습니다. 아니 확실합니다. 이런 문제는 한시라도 빨리 싹을 자르는 게 좋죠. 사전 동의 없이 미스터 리를 팔아넘긴 자를 찾아내서 직접 협상해야 합니다.”
“난 그 친구가 마음에 들던데. 놓치고 싶지 않아. 그렇게 알고 처리해.”
윌리엄은 전화를 끊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는 식이었다. 노만은 당황했다. 그렇게나 현명하고 약삭빠르던 윌리엄 도미닉 후작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지금 한 행동은 마치 사탕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떼를 쓰는 아이나 다름이 없었다!
노만은 어떤 식으로건 리를 설득해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가장 곤란했던 것은 리가 상당히 일리 있는 주장을 펼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실제로 소송이 벌어진다고 해도 핫라인 UK가 손해를 입진 않을 것이었다. 아무리 논리가 완벽하고 법적 근거가 자신의 편이어도 절대적으로 불리한 건 리였다.
우선 리는 영국에서는 외국인이었고 윌리엄은 최고의 변호사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현재 최대주주로 있는 로펌은 법학도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 보는 영국 최고의 회사이기도 했다. 따라서 리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그럼에도 노만이 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그가 마음에 들고 어쩐지 좋은 청년 같았기 때문이었다.
“죄송하지만 소송에서 승리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포기하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편을 권할게요. 미스터 리. 좀 더 좋은 조건의 협상을 원한다면 조언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님과 싸우려고 들지는 마세요.”
노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 뿐이었다. 리가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주인님인 윌리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주인님이요?”
리가 ‘주인님’이라는 독특한 표현에 흥미를 보였다.
“윌리엄 도미닉 경은 후작 작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에 걸맞은 영지를 가지고 계시고요. 봉건시대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영지 내의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이 주인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또한 주인님은 유능한 사업가이면서 동시에 정치에도 폭넓게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뼈대 깊은 가문의 역사를 몸소 실천하고 계시지요. 그리고 저는 주인님의 개인 비서와 도미닉 대저택을 관리하는 영광스러운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포주를 사업가라고 고급스럽게 표현하기도 하는군요. 핫라인 UK는 콜보이 클럽이라면서요? 성매매를 하는 거죠. 나는 남창이 되고. 불결하게도 말이죠.”
공격적인 리의 말에 노만은 깜짝 놀랐다. 리가 보여준 것은 은신해 있던 암살자가 허를 찌르는 듯한 매서움이었다.
“핫라인 UK에서는 콜보이 사업만 하는 건 아닙니다. 또 핫라인 UK는 정확히는 출장 서비스 업체로 등록되어 있으니 엄밀히 말해 주인님을 ‘포주’라 표현할 수는 없겠지요. 성매매도 아니고요. 보아하니 회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성매매 말고 뭘 또 한단 말입니까?”
“핫라인 UK의 사업라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출장 마사지 서비스이고.”
“성매매네요.”
여전히 리는 공격적이었다. 그럼에도 노만은 그가 밉지 않았다. 단순히 얼굴이 잘 생겨서? 아니었다. 물론 외모가 후광효과를 확실히 내고는 있었지만 노만의 노련한 눈에는 그 이상이 보였다. 리에게는 열정과 냉정이 공존했고 거기에서 독특한 매력이 발산되었다. 그리고 어딘가 비밀스러운 구석도 있었다.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만 같은.
“품위 있는 표현을 써 주신다면 좋겠지만 그건 미스터 리의 자유겠지요?”
노만은 리의 공격에 유연하게 대처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또 하나는 게이 포르노 제작입니다.”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리는 흠칫했다. 포르노에 대한 편견과 게이에 대한 편견 모두가 작용한 결과였다.
한층 더 어둡고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리는 노만을 응시했다.
그 시선을 되받으면서 노만은 확실히 리의 눈빛이 좋다는 인상을 받았다. 만약 리가 적극적으로 핫라인 UK라는 회사에 자신을 던졌다면 그 자신이 GV 라인을 추천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고급 마사지 분야, 그러니까 셀러브리티를 상대하면 프라이버시는 약간 더 보장되겠지만 폭넓은 사랑을 받기는 힘들었다. 또 집착이나 스토킹 문제도 왕왕 발생했다. 노만이 보기에 지금 리는 게이도 아니거니와 일이라고는 해도 그 행위를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끔찍할 정도로 위협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노만의 머릿속에는 리에게 푹 빠질 만한 거물들의 이름이 빠르게 나열되기 시작했다. 그 중 몇몇은 진성 게이임은 물론이요 커밍아웃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 인정을 받기도 했다. BBC 드라마의 흥행 각본가 스타인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2년 전 게이 퍼레이드에서 사랑하는 애인을 테러로 잃은 이후, 스타인은 공식적으로 커밍아웃을 하고 인종 차별주의자만큼이나 악질인 호모포비아들을 상대로 선전포고까지 덧붙였다. 심지어 수사 드라마에서 호모포비아만을 노린 연쇄 살인마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스타인은 따뜻한 성격이었고 특히 애인에게 올인하는 로맨틱한 타입이었다. 노만은 아직까지도 스타인의 모든 사랑을 한 몸에 받은 그의 애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공교로운 일이지만 그도 동양인이었다. 아마 태국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도 있었다. 대리모를 통해 얻은 앙증맞은 여자아이. 이름은 ‘엘리자’였다.
“윤리에 대해서는 접어두고 비즈니스에 대한 이야기만 하자면 마사지보다 포르노 제작 쪽이 미스터 리에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군요.”
리는 혐오스럽다는 듯 오만상을 썼다. 저런 표정에 이미 익숙했던 노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건 윌리엄도 마찬가지일 터. 그라면 악질적인 성미를 자랑이라도 하듯 오히려 즐길 것이 틀림없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구멍을 대주라는 겁니까? 역겨운데요. 어쩐지 생명보험이라도 들어야 할 것 같고. 혹시 제 가치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건가요?”
미어캣이 말했던, ‘섹스 백 번에 백만장자’라는 말을 염두에 두고 리가 물었다. 아무리 잘 봐줘도 포르노는 백 편을 찍는다고 해서 백만장자가 될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흥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미스터 리. 저는 양자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 것뿐이니까요. 분명 마사지 쪽은 한 사람과 오랜 관계를 맺는 것이 전제조건이긴 합니다. 하지만 마사지 서비스는 연애감정을 담보합니다. 보아하니 미스터 리는 헤테로인 것 같은데 확실히 부담스러우리란 생각이 들어요. 헤테로이면서 남자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무슨 뜻이죠?”
“마사지 쪽 고객들은 단순한 서비스를 원하는 게 아닙니다. 매력 있는 남자를 갖고 싶어 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란 말입니다. 연애라는 이름의 구속구를 씌워서 말이지요. 그래서 왕왕 데이트를 하기도 하고 개중에는 스테디한 관계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종의 반려로서 서로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연애? 남자와 사랑을 한다고? 리는 몸서리를 쳤다. 23년의 평생 동안 그는 정상적인 남자로서 살아왔다. 남자와 남자간의 관계에 그런 달콤한 단어가 끼어든다는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듣자 하니 생리적으로 거부감이 드는군요. 말만 들어도 벌써 끈끈합니다.”
“하지만 포르노 쪽은 그런 끈끈한 관계가 애초에 생기지 않습니다. 비즈니스로서 만나고 카메라 앞에서 섹스만을 연기할 따름입니다. 특히 원활한 촬영과 스캔들 방지를 위해 우리 회사에서는 배우끼리의 만남을 엄금하고 있어요. 연애가 금지되어 있으니 불편한 일이 생길 까닭이 없죠. 그저 ‘연기’만 하면 됩니다. 또 그 연기라는 것도, 실제로 촬영장에 계셔보면 알겠지만 보통의 섹스와는 달라요. 좋은 장면을 캐치하기 위해서는 도중에 섹스를 끊기도 하고 사정을 지연시키기도 하며 다음날 재촬영을 하기도 합니다. 변수가 많은 만큼 감정이 개입될 여지는 줄어드는 셈이지요. 말 그대로 ‘비즈니스’입니다.”
“한쪽에서는 연애 판타지를 팔고 또 한쪽에서는 섹스 판타지를 판다 이겁니까?”
노만은 리의 통찰력과 비유에 감탄했다.
“훌륭한 표현인데요. 정확합니다.”
“그리고 나는 연애와 섹스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거고.”
역시나 똑똑하군. 노만은 감탄했다. 머리가 좋으면서 섹시한 남자는…… 이런. 이윽고 그는 당황했다. 완전히 윌리엄의 취향이었던 것이다. 물론 윌리엄은 고용인을 건드리지 않았다. 결코. 우주의 운행 방식이 이전까지와는 정반대로 바뀌게 된다면 몰라도 그런 일은 일어날 리 없었다. 그런데도 노만은 벌써 몇 번이나 그를 들었다 놨다한 감정의 동요를 진정시키기가 힘들었다.
“어느 쪽도 싫은데.”
리가 오만하게 선언했다. 노만은 어째선지 숨이 덜컥 막혔다.
“당신은 고용인이죠? 그렇다면 주인님과 만나게 해 주세요. 계약 파기를 할 수 있게.”
허영이라곤 단 1그램도 없이 리는 위풍당당한 요구를 했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으셔도.”
노만은 말을 멈추고 헛기침을 했다. 갑과 을의 입장이 뒤바뀐 듯한 착각이 순간적으로 그를 압도했기 때문이다.
“주인님은 국제 호텔 인수합병 건 때문에 현재 지구 반대편에 계십니다.”
“지구 반대편이요? 그럼 일주일 뒤에나 만날 수 있나요?”
“전용 제트기가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오실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도 가능하지요. 화상 통화 전용 패드로 연락도 가능하시구요.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그 분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구 반대편? 전용 제트기? 화상전용 패드? 리는 긴장했다. 그가 알고 있고 익숙한 세계에서는 들어 본 적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개념들이었다. 윌리엄은 적어도 그의 영지에 해당하는 영국이라는 나라의 일부를 관장하는 신이었다. 도미닉 왕국은 세계 구석구석에 영향을 끼쳤고 그 안에서 윌리엄은 절대자였다.
리는 오싹해졌다. 그가 지금 오라 가라 명령하는 사람은 사실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부호라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국제 호텔 인수합병이라는 게 뭐죠?”
“주인님은 호텔 체인 사업을 시작할 생각이십니다. 국내가 아니라 국제 체인이오.”
“힐튼 호텔처럼 말인가요?”
“그렇죠.”
“사업을 확장한다는 측면에서 좋은 아이디어로군요. 서로의 분야를 보완해 줄 수 있으니까요.”
노만은 점점 리와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그가 신뢰하는 건 오로지 윌리엄뿐이었다. 그런데 리가 윌리엄이 하는 일에 대해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적절한 코멘트까지 덧붙이는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더구나 리는 대부호의 재력 앞에서도 그리 두려워하거나 눈치를 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건 정말 큰 장점 중 하나였다.
노만은 그 자신이 그렇듯이 비굴한 사람은 싫었다. 킹스 크로스 역의 노숙자였을 때도 함부로 구걸하지 않는 당당한 모습에 윌리엄의 시선을 끈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점은 윌리엄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윌리엄 도미닉에겐 비굴해야 할 필요도 상황도 거의 생기지 않았지만. 노만은 윌리엄의 마음에 쏙 들만 한 것들만 골라 가지고 있는 리를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외모만 매력적인 게 아니라 성격도 당차군요. 성공할 캐릭터입니다.”
드물게 농담을 구사하는 노만이었다.
“냉담한 걸 잘못 말씀하신 것 같은데요. 전 재를 뒤집어쓴 아가씨가 아니거든요. 그렇게 구슬리셔도 호모놈들에게 후장을 대주고 싶진 않습니다.”
노만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아무리 자기 자신이 노멀이라고 해도 차별적인 언사를 듣는 것이 기쁘지는 않았다. 더구나 윌리엄 주인님은 진성 게이인데!
“교양 있는 언어를 쓰시는 편이 좋을 텐데요.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하면 불편한 사람들이 생길 겁니다. 일할 때 차질을 빚고 싶진 않으실 것 아닙니까. 미스터 리.”
정중하게 경고하는 노만에게 리는 한층 더 도도하게 쏘아붙였다.
“기분 나쁘다니 잘됐군요. 당장이라도 주인님이란 사람에게 좀 전해줄 수 없습니까? 호모새끼들이랑 엮이기 싫어한다고. 모두를 위해 계약은 해지하도록 하라고 말입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리의 성공을 예상했던 노만은 그의 아슬아슬한 언행에 불안해졌다. 윌리엄은 어쨌건 품위 있는 귀족이었다. 그가 리의 폭력적인 말과 행동거지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윌리엄의 성격도 썩 좋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거물 특유의 고집스러움과 전통주의자라고 일컬어지는 귀족들의 보수성, 그리고 가진 자의 오만함을 비롯해 약간의 악덕을 즐기는 기질까지, 한마디로 부족함 없는 나쁜 남자였다. 윌리엄이 리를 마음에 들어 하건 그렇지 않건 못된 버릇을 보인다면 고쳐주려 할 게 뻔했다. 그만의 방식으로.
“당신을 위해 하는 말입니다. 어차피 일을 하게 될 거, 시작부터 불쾌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몇 번이나 말씀드리지만 주인님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슬슬 화가 나는 리였다. 아무리 윌리엄이 부자라고 하더라도 신이 아닌 이상 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할 권리는 없었다.
“계약을 한 건 제가 아니라니까요!”
마침내 화를 터트리는 리를 향해 노만은 무덤덤한 시선을 보냈다.
“당장 그 주인님인지 뭔지한테 전화하세요!”
노만은 웃지도 않았다. 리가 속아서 계약을 했다면 화가 날 수밖에 없고 또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동정심을 느끼는 것도 그의 가치에 비추어 보면 예의가 아니었고 또 그를 도와줄 수도 없었다.
“아직까지 식사를 하지 않으셨죠. 처치 후 식사를 도와드리겠습니다.”
화제를 돌리는 노만에게 리는 불신의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곧 닥터 콜먼이 나타났고 리는 순순히 치료에 응했다. 처치가 끝나자 얼마 안 있어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크리스마스답네.”
칠면조 구이를 얇게 썰어 만든 클럽 샌드위치를 집어 들며 리가 중얼거렸다. 그의 음성은 약간 쓸쓸했다. 셰프가 직접 만든 디종 머스터드소스가 잘 구워진 번에 맛좋게 스며들어 있고 곁들여 나온 샐러드는 상큼했다. 리는 시간을 들여 샌드위치를 먹고 샐러드도 마지막 한 잎까지 꼼꼼히 먹었다. 그런 다음 달콤한 스파클링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제법 도수가 있는 모양인지 식도가 달콤하게 타들어갔다.
리는 몸이 나른해지는 걸 느끼며 침대에 앉았다. 치료가 끝나고 배도 채우고 나니 피로가 급격하게 몰려왔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충분히 널찍하고 푹신한 침대에 엉덩이라도 걸쳐 본 것이 도대체 언제였지. 저도 모르게 흔들리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리는 생각했다. 돈이 없어 하숙집에서 쫓겨난 이후 영국식 아파트인 플랫에서 살고 있는 동기의 신세를 지거나 쪽방을 전전하거나 하느라 제대로 자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미스터 리. 주인님의 전화입니다. 받아보시겠습니까?”
막 잠이 들려는 찰나 노만이 들어왔다. 리는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여보세요?”
“미스터 리?”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음성이 자신을 찾는 순간, 갑자기 가슴 근육이 팽팽해지고 긴장한 턱이 안쪽으로 당겨졌다. 이게 무슨 현상이지? 리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목소리로 짐작건대 윌리엄 도미닉 후작의 목소리는 리의 기대보다도 훨씬 더 젊었다. 어쩌면 리와 그다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을지도……. 목소리 그대로 젊고 압도적인 거물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펼쳐지면서 리의 심장이 뛰었다.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되어서 반가워요. 대우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이야기해요. 노만은 그걸 위해 있는 사람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