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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55110072
· 쪽수 : 616쪽
· 출판일 : 2013-04-19
책 소개
목차
1. 우리 집 강아지 똥규
2. 새벽 꽃이 피네
3. 살아가는 허위, 살아가는 진실
4. 적(敵) 앞에 굴욕
5. 모두가 슬프거나, 모두가 행복하거나
6. 손전화기는 방수가 필수랍니다
7. 우리 집엔 왜 왔니?
8. 햇살 마루, 연꽃 향에 어린 것은……
9. 한여름 밤의 동화(童話)
10.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11. 헐거운 것들 사이의 바람
12. 다행이야, 참 다행이야
13. 별의 입맞춤, 바람의 포옹
14. 나 못 믿어요?
15. 황민복 씨, 강적이네!
16. 숙적(宿敵), 재회하다
17. 꽃샘바람 불던 날
18. 그대가 내게로 오면
19. 반드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물난리 그 이후의 일들!
저자소개
책속에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집을 사야해요.”
“이유를 말해요!”
“부끄러운 과거지만 할아버지가, 이 집 머슴이었답디다.”
“네에?”
“야밤을 틈타 쌀 한 가마니 짊어지고 도망갔다던가…….”
“오호, 누군지 딱 감 잡았어!”
삿대질하려는 내 손가락을 잡아 그가 얌전하게 아래로 내려놓았다.
“그래요. 이 집에서 상머슴 살던 황민복 씨 손자가 납니다.”
“오호! 잘됐네! 더 용서 못하겠네!”
나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정당하게 커졌다.
“배은망덕하게 쌀 짊어지고 도망간 주제에, 이제는 감히 우리 집까지 강탈하려 하신다? 아무리 과거는 흘러갔다지만, 짚을 건 짚고 넘어가자고요. 공소시효가 지났다지만 말은 바로 해야지! 댁의 할아버지께서 우리 집에서 훔쳐간 건 쌀 한 가마만이 아니라고욧!”
“네?”
“그 쌀 한 가마, 우리 집 소 등에다 싣고 갔다고요!”
정말 황당해하는 얼굴로 남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조용히 물었다.
“정말입니까?”
“지금 당장 증인 불러줘요?”
지금도 병태 할배가 이를 갈고 있는 황민복, 그 인간의 손자님이란 말이지? 너 딱 걸렸어! 아마도 장작개비 들고 후려 패려고 할 걸? 그 해, 소가 없어진 바람에 불쌍하게도 머슴 동기인 병태 할배가 엄청 고생했다지? 등에다 써레를 묶어 끌고 논을 갈았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었다.
“오, 맙소사! 젠장!”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침울하게 뇌까렸다. 쌀 한 섬이 졸지에 황소 한 마리로 변한 터이니 그도 얼떨떨해진 모양이었다.
“망할 노친네 같으니라고! 그런 말은 안 했는데…….”
연좌제는 폐지되었으니, 그로서야 상관없는 일이겠다. 하지만 여하튼 혈육의 죄악상이 낱낱이 드러난 셈이다. 좀 민망했는지 관자놀이께가 불그스레해져 있었다.
“그 시절에 소도둑이면, 멍석말이 당하고 곤장 맞아 죽는 거 알죠?”
“어쩐지 자기가 직접 나설 일은 아니라고 몸을 사릴 때 알아보았어야 했는데, 제길!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고만!”
어쨌거나, 그가 다시 등을 곧게 폈다.
“아가씨 말대로 공소시효는 지났으니 이쯤에서 그만합시다. 나중에 바라신다면, 소 한 마리 값은 꼭 돌려드리지. 여하튼 이러저러한 연유로다가 내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 이 집을 갖고 싶어 해요.”
“염치도 없으시네. 부끄러운 줄 아셔야죠. 엄청 성공했다면서요? 거기서 떵떵거리며 잘사실 일이지 새삼스레 이 집은 왜 탐을 내고 그러신대요?”
이 남자의 할아버지라는 황민복 씨에 대해선 할머니에게 들었다. ‘너희 할아버지 어렸을 적에, 쌀 한 섬 덜어내서 소 몰고 도망친 놈이여!’라고.
아마 그 사람이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뉴스를 보았던 때인 것 같다. 비웃는 것도 아니고 분노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신기하다는 목소리였다. 쌀 한 섬 짊어지고 야밤에 도망치는 머슴들이야 종종 있었을 테지만, 그를 까불어 먹지 않고 용케도 오롯이 건사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승승장구. 이제는 주인집 위세를 뛰어넘어 큰 갑부가 되고, 심지어는 국회의원도 되는 세상이라니.
[그런 이가 말이지, 서울 가서 성공했구나. 저리 뉴스에도 나오고 그런다. 세상 거 참!]
[아니, 흉한 소도둑놈을 왜 그냥 도망가게 내버려 두었대요?]
[낸들 아니? 듣자하니, 너희 할아버지가 저 사람 소학교 후배라서 눈 반 감고 내버려 두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황민복이 누이동생이 있었대, 황민자라구. 인물이 아주 고왔는데, 너희 할아버지가 짝사랑을 했다나 뭐라나. 그래서 인정상 눈감아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여하튼 그래.]
할머니가 엄마더러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었다. 야반도주한 머슴이 성공한 게 배 아파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당신도 나오지 못한 텔레비전에 그이가 나오는 것이 더 화나는 일이었다는 거다.
[너희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기 망정이지, 저거 보면 정말 화병 나서 쓰러지셨을 거다.]
[그랬겠죠?]
[사랑채 양반, 은근히 테레비 좋아하셨어. <여로(旅路)> 할 적에는 아예 테레비를 사랑채에다 갖다 놓고 보신 걸? 태현실이 본다고 서울나들이도 갔어. <명창열전>에 나가는 게 소원이셨는디. 한때는 가수 지망생이었던 기라, 남인수 따라 전국 돌고 그랬어. 거 누구냐? 동백꽃 부른 사람. 그래, 이미자랑은 꼭 연애 한번 걸고 싶다고도 그랬었고. 곧잘 <불효자는 웁니다>도 연습하고 그랬는디…….]
만날 사랑채에 꼿꼿이 앉아 낡은 한문책을 뒤적이던 할아버지의 기억만 있다. 우리 문중에서 세운 중학교 졸업식에도, 투표할 때도 갓을 쓰고 하얀 도포를 입은 채였다. 단아한 유림의 표상으로 근엄하게 읍내며 서울이며 출입하시던 할아버지가, 실상은 딴따라 기질이 농후하였단다. 연예인이 되어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것이 소원이었다니. 그런데 도망간 머슴이 먼저 국회의원이 되어 텔레비전에 나온 것을 보았다면…….
그날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나는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신 것을 정말 다행으로 여기며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그런데 그 당사자께서 마침내 마각을 드러내고 나타났다, 이 말이다.
“할아버지 입장에서야 품은 한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요. 솔직히 나도 이 일이 달갑지는 않습니다.”
그가 짜증스레 내뱉었다.
“무작정 달려들어서, 이 집을 빼앗으려는 악당으로 제발 생각하지만 말란 말입니다. 우리 가족들 전부 다 노친네를 설득하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겁니다. 하지만 노친네가 요지부동이니 어쩌겠습니까?”
“그래서 최후로 직접 나를 설득하려고 손자분인 그쪽이 나서셨다?”
“이수하 씨, 한번만 노친네 사정을 생각해줘 봐요. 소 훔쳐 도망간 머슴이 객지에서 성공했어요. 아쉬운 것 하나 없이 떵떵대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부러울 것 없는 그 양반이 딱 하나 못한 게, 고향 땅으로 금의환향하는 거란 말입니다.”
“켕기는 게 있으니 그렇죠. 그러게 황소는 왜 훔쳐?”
내가 쏘아붙이든 말든 그 남자는 제 할 말만 했다.
“우리 집 영감이 금가마, 아니지 요새는 벤츠겠군. 벤츠 타고 떵떵대며 고향 돌아와서, 떡하니 언감생심 올려다보지도 못한 주인댁 사랑채를 차고앉아 어흠거리는 게 마지막 인생의 절정이라는데 누가 말려? 나도 이제 이 집 타령 듣는 거 지겹다 못해 아주 짜증납니다.”
듣자 하니, 이 남자도 지금껏 가난한 머슴 시절의 한풀이를 하려는 조부에게 단단히 당하고 산 것이 분명했다. 짜증과 분노와 어처구니없다는 냉소가 서려 있었다.
“듣다보니, 황도규 씨 참 대단하네요. 할아버님 소원 이루어 주기 위해 귀찮은데도 직접 여기까지 내려오시고, 진짜 효성 지극하셔?”
뱅글거리는 내 말이 실상은 진심이라고는 전혀 없는 조롱이자 모욕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 남자는 제꺽 알아들었다.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그렇게 착하게 보입니까?”
엄청난 모욕을 당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느릿느릿한 어조로 내뱉었다.
“내가 여기 온 건 순전히 영감이 억지로 떠밀어서 온 거요. 영감이 팔순 선물로 이 집을 선물하라고 날마다 들들 볶아댄단 말입니다. 이 집을 사주기만 하면 황민복 씨 재산을 내가 다 차지하는 거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