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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55110287
· 쪽수 : 376쪽
· 출판일 : 2013-06-21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1. 선택의 대가
2. 그녀가 설 자리
3. 인질 혹은 미끼
4. 질투
5.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것
6. 밤의 장막
7. 쳇바퀴를 깨고
8. 비와 롤러코스터
9. 거짓 눈물
10. 돌이킬 수 없는
11. 그녀의 집
12. 이별, 그리고……
13. 새로운 사랑
에필로그
저자소개
책속에서
홀로 겨울 바다에 나섰다.
짜고 냉기를 품은 바닷바람이 그녀의 볼을 갈기고 지나갔다. 눈꽃처럼 고운 피부에 빨간 입술이 더욱 아름답게 빛나 오히려 처연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바람을 타고 허공에 휘날렸다.
유리알 같은 수면에 쨍 깨질 듯 날카롭게 부딪쳐 발하는 햇살, 몰려오는 차가운 파도에 밀려 이곳에서는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다는 듯 미련을 털고 비상하는 갈매기, 얼어붙은 파도에 부딪쳐 냉기를 뿜어내는 바위, 인간이 지나간 발자국을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회색비둘기…….
파도가 검게 휩쓸어버린 추억을 담은 흔적을 떠올리게 하는 모래사장을 무의미하게 흘려 보며 시간까지 흘려보냈다.
가슴을 향해 달려드는 저 파도너머 큰 바다 같은 두려움이 덮쳐왔을 때도 보령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혼이 다 달아나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별은 죽는 것이다. 곁에 있어도 볼 수 없고, 마주하고 있어도 만질 수 없는 그런 죽음 같은 것이다. 이별은 그런 것이다.
그가 하지 말아야 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기에 깊은 회한과 원망이 동짓날 눈처럼 소복이 쌓이는 것이다. 사랑은 아득한 저 바다너머 달아나서 찢어진 심장만 부여잡고 울게 했다.
마음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듯.
이틀 전, 현성이 보령을 밖으로 불러냈다. 그녀의 생일이었다.
어두워져 가로등 불빛이 어깨 위에 서서히 내리고, 대기는 무거웠으며 생활의 소음은 바닥으로 낮게 깔려 흐르고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떠나버린 놀이터의 기름칠을 하지 않은 그네가 보령이 공기를 찰 때마다 끼익끼익 나지막하게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손을 잡고 같은 박자로 그네를 타고 있던 현성이 보령을 돌아보는 기척이 느껴져 그녀 또한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현성이 그녀에게 장미꽃을 내밀었다. 그에게 장미꽃을 선물로 받은 보령은 기분이 좋았다.
현성의 눈동자는 언제나 맑았다. 그녀를 향한 애정이 외부로 뚫려 있는 모든 구멍으로 흘러넘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보령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현성이 미소를 되돌렸다. 순간, 보령은 뭔가 잘못 되어 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의 미소는 약간 경직 되어 있었으며 그녀가 탄 그네와 현성이 탄 그네를 이어주는 그의 손바닥은 전에 없이 축축 했다.
보령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려 그네를 따라 함께 흔들리는 대기 어디에쯤 두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것은 공포와 다르지 않았다.
이 위기를 모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미친 듯이 머리를 굴렸지만 이미 그녀의 머리는 치명적인 오류로 회로가 망가져버린 것만 같았다. 한 박자로 움직이던 두 그네가 잠시 엇박자로 움직이더니 현성의 그네가 아예 멈췄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손은 보령의 손을 짓이길 듯이 부여잡고 있었다.
보령은 생각이 비어버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 현성이 자신의 그네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마침내 그의 손에서 놓여났을 때 그녀의 손바닥에는 현성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것인지 모를 땀이 흥건했다.
그대로 공기를 발로 차 그네를 움직일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멈춰야 하는 것인지 결정한 것은 보령이 아니었다. 아주 잠깐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현성이 그녀의 그네를 세우더니 보령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시선이 낮아진 보령의 눈은 점점 더 커졌다.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고 그 심장소리에 간이 다 녹아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나와 결혼해 주겠니? 어쩌면 그렇게 물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와 결혼하자, 라고 했을지도 모르고. 뭐든 보령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달빛을 받아 검게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만 뇌리에 박혔다.
모, 못해. 어쩌면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에게 왜 이런 짓을, 이라고 원망을 했을 지도 모른다. 기억에 나는 것은 벌떡 일어나 원망스럽게 그를 굽어보며 나무젓가락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가 한 순간 스프링처럼 튀어나가 그 자리를 모면했다는 것이었다.
그날 자신이 얼마나 현성에게 지독하게 굴었는지 기억한 것은 당시의 당혹감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였다. 그길로 내쳐달려 이곳으로 왔다. 그 사이 어떤 두려움 같은 것이 그녀의 심장을 야금야금 좀 먹었다.
보령은 언젠가 그와 깍지 낀 손을 잡고 간간이 눈빛을 마주하며 하릴없이 거닐었던 바닷가의 거리를 망연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차가운 바람으로 옷을 갈아입은 그곳에 남은 그의 체취들이 비통을 북돋웠다.
바람이 온갖 감정을 몰고 달려가 파도에 부딪쳤다. 꿈인 것처럼 아득한 밤바다에 잠들지 못한 보령만이 슬퍼할 뿐이었다. 이별은 참으로 아픈 것이지만, 그가 없는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것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의 목소리, 그의 체취, 그리고 그의 웃음까지도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현성, 이제 그가 없는 시간을 견뎌야만 하는 것인가.
왜 나에게 청혼 따위를 해서는!
스물다섯의 겨울은 그렇게 황망히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