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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55112564
· 쪽수 : 448쪽
· 출판일 : 2014-10-29
책 소개
목차
1권
1. 목에 걸린 실
2. 하늘을 품다
3. 봄프리 부인
4. 조르반 호테로
5. 하얀 나무, 그리고 아이들
2권
6. 요원한 길
7. 불가분의 관계
8. 마지막 아이
9. 리시, 그 이름 기쁨이어라
3권
Chapter 9-2. 리시, 그 이름 기쁨이어라 / 7
Chapter 10. 검은 두루마리 / 35
Chapter 11. 현재를 잣는 신 / 93
Chapter 12. 자각 / 122
Chapter 13. 벼랑의 끝으로 / 158
Chapter 14. 이별 여행 / 258
Chapter 15. 소녀는 그렇게 어른이 된다 / 346
The last chapter. 그리하여 영원히 / 397
Epilogue.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 420
축전 by 누리 / 436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지센은 턱을 괸 채 두 사람 사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양쪽의 이야기를 꽤나 고심해서 듣는 기색이었다. 각각의 주장은 이러했다.
이 성에 사는 사람 모두가 알다시피, 라필로는 가뜩이나 숙면에 예민한 탓에 늘 홀로 잠을 청했다. 하루 일정을 끝마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잠든 그를 경악하게 한 것은 느닷없이 이른 새벽, 제 몸 위에 얹힌 사람의 그림자였다. 자객인가 싶어 여자를 밀치는 순간 목이 따끔했고, 불을 켜고 보니 여자의 목에 웬 실이 감겨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목에 이어져서.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해 있는데, 저 지독한-그의 표현에 따르면-여자가 눈을 뜨자마자 기겁하며 헛소리와 함께 방 밖으로 뛰쳐나갔고, 여자가 멀어지자 어느 순간 실이 당기더니 목에 깊다란 상흔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뭔지 몰라 일단은 잡아 두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 실을 보지 못한다고 했다.
여기까지가 라필로의 주장.
비윤의 이야기 또한 경청하였다. 물론 지센은 그녀의 말을 거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략적인 핵심을 잡아내기엔 무리가 없었다. 그녀는 대학교라는 것을 다니는 상식적인-그녀의 주장에 따르면-여대생으로 이틀 전, ‘남친’이라는 물건에게 차이고 지독한 ‘생파’라는 것을 친구들과 함께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저앉았다. 그것이 마지막 기억이며, 눈을 뜨니 라필로의 침대 위였다고 한다.
다 큰 처녀가 상반신 ‘누드’의 ‘외국인’과 침대에 누워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 놀라서 도망쳤는데, 목에 실이 감겨 있었고 그 실은 지금도 목에 감겨 있다고.
그녀는 꾸준히 본인이 라필로에게 납치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지만, 지센은 그녀의 의견에 크게 동의할 수가 없었다.
지센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간결하게 정리했다. 라필로야 익히 아는 사내이니 거짓은 없겠지만, 여자는 조르반의 사람이 아니었다. 익숙하지 않은 어휘도 그렇고, 무엇보다 조르반인을 외국인이라 표현했으니.
“일단 두 분의 이야기는 알겠습니다…… 근데…… 아무리 봐도 안 보입니다만.”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으나, 듣고 있자니 꽤 우스웠다. 지센의 웃음기 서린 답에 라필로가 이를 갈았다.
“네 눈에도 보이지도 않는다 이거지.”
“예, 다만 실…… 이라. 분명 두 분의 눈에는 보인다는 거지요?”
“조르반의 술사로는 너보다 나은 이가 없는데, 네 눈에도 이게 보이지 않으니 해결할 수가 없다는 건가?”
지센이 제 머리칼을 천천히 쓸어 넘겼다.
“실이라 하니 짐작 가는 것이 있긴 합니다만, 그것이 눈에 보인다고 하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서 지금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저 여성분과 이어진 실 때문에 라필로님께서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이리 계신 겁니까? 검으로는 잘리지 않아서? 고대종에게는 확인해 보셨습니까?”
라필로의 표정에 당혹감이 서렸다.
“경황이 없어 잊었군.”
“정령 쪽과는 관계가 없다 여겨지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혼잣말하듯 사태를 정리한 지센이 엄지와 검지를 부딪쳤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산뜻한 바람이 불었다.
비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돋아난-정말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반쯤 뒤 풍경이 비치는 한 필의 말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요. 가르, 들었지요. 당신 눈엔 보입니까?”
납득할 수 없는 현상에 기겁한 비윤이 뒷걸음질 치다 침대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말! 말이 생겼어!’
쿠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비윤의 입술 사이로 비명 아닌 신음이 터졌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말이 대나무 죽순 자라듯 자라났다는 말이다. 말도 안 된다.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해?’
그런데 더 기함할 문제는 저 두 남자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흐, 으, 아!”
“왜 그러십니까?”
“말, 말이, 허공에서…….”
“아, 앨버런의 고대종입니다만.”
비윤은 대답 대신 꿈쩍도 하지 않는 반투명한 말을 응시하며 숨을 헐떡였다. 말의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다시 한 번 산들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는 것을 느꼈다.
“가르.”
지센이 채근하듯 부르자 푸른빛을 띠는 반투명한 말이 발굽으로 바닥을 느리게 때렸다. 그리곤 잘 빠진 목을 숙이는가 싶더니 지센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듯 입김을 불었다.
라필로는 심각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비윤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지센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정체 모를 말이 이번엔 하늘로 흩어지듯 사라졌다.
“죄송하지만, 두 분만 보이시는 것 같군요. 실제로 있다면 말이죠.”
라필로가 이를 갈았다.
“있어, 있다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하기 전까지는 당분간 저 여성분과 동행하는 것이 나을 듯싶습니다만.”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 않았나?”
“짐작 가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센이 팔짱을 낀 채 하얗게 질린 비윤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몇 걸음 만에 그녀의 앞에 선 그가 손을 뻗어 비윤을 부축하듯 잡았다.
“붉은 실에 관한 속설은 어디에나 있지요.”
“네가 짐작하는 게 고작 그거냐?”
“달아래 노인께서 이르시길, 사람은 누구나 운명의 상대와 실로 이어져 있다 하셨지요. 라필로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비윤이 반응을 하기도 전에 라필로가 격하게 응수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나?”
“짐작이라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여태까지의 전과를 보자면 가능성이 전혀 없다 보이지는 않지만. ……확실히 말하자면, 당장 설명 가능한 것은 그것뿐인 것 같습니다.”
그녀의 잠든 모습을 보는 것도 익숙해졌다. 다른 사람의 작은 인기척에도 금세 잠에서 깨버리는 탓에 늘 잠자리에 까탈스럽다는 평이 자자한 남자가 이젠, 그 상대가 없으면 신경이 쓰여 잠에서 깨게 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적어도 그녀는 그에게 어떤 의미로는 안전한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아는 상식선의 사람들이란 한결같다. 결국 다들 제각각의 이유로 움직이며 그것은 스스로의 신념과 이득에 기인되어 있다. 그러나 신념도, 이득도 필요 없이 마음을 내어줄 수 있는 이는 없는 게 사실이다. 언젠가 일레오르가 스치듯 했던 말. 무조건적으로 믿을 수 있는 상대라면 비윤이었다. 비윤은 무언가를 탐내지도 않고, 타인을 얕잡지도 않으며 그를 음해할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
그러나 아마…….
“그러지 말아요. 자연스럽지가 않잖아요.”
그러나 모든 것은 그녀가 말하는 것처럼, 이 실 때문일 수도 있다.
“청문회가 또 있다고 들었어요. 그전에 저는 폐하를 찾아뵙고 말씀드릴 생각이에요. 하지만 라필로.”
“…….”
“우리가 상황을 조금은 더 이해했으면 좋겠어요. 이제 실은 제가 돌아가는 날까지 자유로울 거라 했고, 당신은 제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고, 저도…….”
비윤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튼 그래요. 제가 그렇게 하고 싶다 했을 때, 저는 충동으로 그런 게 아니에요. 교묘하고 교활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저 이곳에 빚을 남기고 싶지 않아요.”
“무슨 빚.”
“…….”
“아직도 집에 가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무슨 수로. 달아래가 돌려보내준다고 해도 나는.”
라필로가 약간 격앙된 음성으로 말을 뱉다 멈추었다. 비윤은 한없이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라필로가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올려다본 후 낮은 한숨과 함께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널 데리고 레반트로 돌아갈 생각인데.”
카신이 길길이 날뛸 테지만, 이미 망가진 신뢰는 어쩔 수 없다. 후일 얌전히 레반트 령에 처박혀서 그에게 납작 엎드려 믿음이 회복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물론 그것도 테시아라의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희망적이지 않았다.
비윤이 뜻밖의 정곡을 찔렀다.
“폐하께서 그리 두신대요?”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라필로, 저 때문에 당신이 더 곤란해질 필요가 없다고.”
“넌 내게 할 수 있는 말이 늘 그런 거절뿐이냐? 단 한 번이라도 거절 아닌 알았다는 말을 해봐.”
“……빚지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갚지도 못할 빚이다.
비윤이 스스로 생각해도 말도 되지 않는 물음을 뱉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혹시 나 좋아해요?”
그녀의 거침없는 물음에 라필로는 순간 말문이 막혀 목 졸린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지나친 호의와 보호를 그녀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긴 했다. 심장이 사슬 묶인 듯 갑갑해짐과 동시에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이것을 수긍하면. 만약 아니라도, 좋다. 호의를 내비치면 조금은 무언가 바뀔까.
사실 그녀에게 좋지 않은 기억투성이일 것을 알아서 더욱 무어라 답하기가 주저되었다. 그가 잠시 호흡을 고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내뱉으려는 찰나.
“그러지 말아요. 진짜인지도 모르잖아.”
라필로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차마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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