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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55116227
· 쪽수 : 456쪽
· 출판일 : 2016-06-07
책 소개
목차
00. Prologue 7
01. Drifters 21
02. Conspiracy 44
03. My own girl 83
04. Heartbreaker 105
05. Such a lot of things 133
06. Switch 170
07. Velvet 191
08. Flowers bloom 214
09. Love affair 227
10. Crisis 297
11. Nightmare 337
12. Conclude 387
13. A thousand dreams of you 430
Postscript 454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그러니까 유혹해 줘.”
커피 전문점. 주문대 앞에 선 여자의 목소리는 심상했다. 커피에 시럽 추가, 또는 투 샷으로. 마치 원하는 메뉴를 주문하듯이 일상적이고 편안한 목소리였다.
15평 남짓한 가게는 마침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서 있었고, 카운터 안의 그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불편한 내색을 했다.
“내가 무슨 재주가 있다고. 무슨 수로 꼬시라는 거야? 그리고 유혹하면 그다음은? 나는 걔에게 별 관심이 없어.”
마침내 남자가 말하기 시작했다. 목소리엔 짜증이 어렸다.
“해 줄 거잖아. 어차피 내가 하자는 대로 해줄 거면서.”
여자는 단호했다. 아무나 소화하기 힘든 큰 꽃이 화려하게 프린트된 붉은 원피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다. 식상한 표현이겠지만 마치 커다란 장미꽃 같았다. 그렇게 크고 아름답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네 치다꺼리를 해 주는 게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 이제 혈연 따위 지겨워.”
남자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녀는 누구도 그 앞에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난 그저 오빠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을 얘기했을 뿐이야.”
문득, 전혀 닮은 줄 모르고 있던 두 사람의 얼굴에서 유사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태양에 왜소해지지 않는 눈부신 장미꽃을 닮았다면, 그는 달빛에 의지하여 그 존재를 드러내는 희미한 별과 같았다. 그리고 분위기를 걷어내고 자세히 보면 이목구비가 매우 닮았다. 단정한 콧날도, 보기 좋게 솟은 광대뼈도, 속세를 떠난 초월의 미를 구현하는 우아한 얼굴의 선도.
“은주는 오빠를 좋아하게 될 거야. 오빠도 정말 걔에게 관심이 없어? 좋아했었잖아. 좋아했었는데 포기한 것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감정이 없었다. 사실을 적시하는 듯이 또렷하고 분명했다.
“그건 아주 오래전의 일이야.”
그는 부인하지 않았다.
“오빠는 오빠가 가져야 했을 것을 찾는 거야. 오빠가 괜히 포기한 거잖아. 나는 포기 안 해. 나도 내가 가져야 할 것을 갖는 거야.”
“……궤변이야.”
그녀는 대답 없이 바닥에 힐을 부딪쳐 또각 소리를 냈다. 분하다는 감정이 순간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별 볼 일 없는 애인데 내게 중요한 사람들이 두 사람이나 그 애에게 빠져 있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이름은 지연이었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의 이름은 태경이었다. 태경은 문득 저항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동생에게 저지른 죄를 아직도 다 갚지 못했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얼굴을 기억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잘 웃는 여자였지만 머리가 좀 모자랐다. 또래보다 일찍 눈치가 빨랐던 태경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어머니가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계산도 잘 할 수 없어 시장에 가면 틀린 거스름돈을 받아 왔다. 식당에서 일을 해도 어머니는 오래지 않아 쫓겨났다. 그래도 돈을 벌기 위해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르바이트를 한다며 동네 아줌마와 웃으며 나갔다. 그 아줌마도 머리는 떡져서 하얗게 비듬이 낀 사람이었다. 태경이 사는 동네에는 그런 사람이 많았다.
지연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어머니는 동네의 어떤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 엄마는 낮에 태경과 지연이 단둘이 남은 반지하방에 와서 밥을 해주고 갔다. 집은 너무 더러웠다. 지연은 자주 감기에 걸렸지만 병원에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렇게 두 남매는 방치된 채 하루 종일 TV만 봤다. 두 남매는 TV를 통해서 세상을 배웠다. 태경이 3학년이 되었을 때 낮에만 오는 엄마는 배가 불러 있었다. 어린애였지만 태경은 깨달았다. 어른이라고 해도 나약할 수 있고 부모라고 해도 무능할 수 있다.
그런 어머니가 밉지는 않았다. 학원이나 학습지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학교에서 배운 것은 습자지처럼 빨아들여 늘 백점을 맞던 태경은 세상은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일찍 깨닫고 있었다. 엄마는 의지할 수 없었고 가여웠고 남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가족은 동생뿐이라고 생각했다. 예쁜 동생은 낡고 초라한 옷을 입고 있어도 마치 인형처럼 예뻤다. 그리고 어렸다.
게임기. 그래, 친구들이 하는 걸 보고 늘 부러워했던 게임기였다. 같은 동네에 사는 중학생 형이 있었다. 한동안 친했다. 중학생 형 밑으로 갖가지 사연의 어렵고 방치된 아이들이 꼬붕처럼 붙어서 놀고 있었다. 태경도 그 무리에 끼게 되었다. 가끔 집에만 있던 지연도 따라 나갔다. 중학생 형은 지연에게 예쁘다고 했다.
어느 날, 중학생 형과 5학년 형이 태경의 집에 왔다. 밤이 되어도 그들은 가지 않았지만 집에 가라고 말할 어른이 없었다. 태경은 중학생 형이 준 게임기에 빠져 있었다. 신기하고 재밌었다. 한 판 끝나고, 또 끝나도 더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반짝거리는 화면에 몰두했다.
TV는 계속 틀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돈이 없으면서도 어른이 없는 집의 케이블 TV와 인터넷은 끊지 않았다. 아마 끊는 방법을 잘 모르거나 귀찮았을 것이었다. 알뜰하게 규모 있게 살림을 할 능력은 애초에 없었다. 지루한 듯 중학생 형은 채널을 계속 돌렸다. 여자의 신음 소리에 그는 채널을 고정했다. 지연은 화면을 흘낏 봤지만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고 그냥 졸렸다. 아직은 그런 의미를 잘 몰랐다. 태경은 게임기에 홀려 있었고 오빠의 발치에서 지연은 잠이 들었다.
중학생 형과 5학년 형은 뚫어지게 화면을 쳐다보았다. 발가벗은 여자가 와이셔츠와 팬티만 입은 남자 아래서 몸을 비틀며 신음을 냈다. 오빠, 좋아. 오빠 죽여. 더 해줘. 달뜬 목소리에 두 소년은 숨도 쉬지 않고 쳐다만 보았다.
“자는 거야?”
문득 중학생 형이 지연의 몸을 흔들며 깨웠다. 손은 치마 속으로 들어가 어린 지연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지연은 잠이 깨어 눈을 뜨고 껌벅거리고 있었다.
“잠깐만 구경만 할게.”
중학생 형은 5학년에게 눈짓을 했다. 5학년 남자아이가 눈을 껌벅거리고 있는 지연의 팬티를 벗겼다.
“구경만 하는 거야. 잠깐 다리를 벌려봐.”
지연이 가만히 태경을 불렀다.
“오빠.”
게임기에 정신이 팔려 있던 태경은 화면에 눈을 떼지 못한 채 응, 하고 대답했다. 뭔가 이상하단 느낌은 들었다. 그런데 게임을 놓을 수 없었다. 열심히 키를 조작했다. 손에 달라붙은 것 같은 키는 자신의 팔다리 같았다. 실제보다 더 강력해진 자신의 몸이 게임 속에서 활개를 치고 있었다.
얼마간 있다가 두 소년은 나가 버렸다. 태경은 게임기를 줘야 하는 게 아쉬웠다. 지연이 새 팬티를 꺼내 입는 것이 보였다. 울 듯 말 듯 잔뜩 찌푸린 얼굴이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도 태경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 뒤로도 몇 번 형들이 왔고 같은 학교를 다니던 5학년 형의 입에서 나온 말에서 소문이 퍼졌다.
태경과 지연은 학교 선생님에게 불려갔다. 어떻게 안 건지 학교 선생님과 보건 선생님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선생님들의 반응으로 지연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학교와 동네에 소문이 가득 퍼진 걸 사람들의 시선으로 알 수 있었다.
태경은 자신이 지연에게 큰 잘못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겨우 한 살 차이였지만 자신은 오빠였다. 게임기에 정신이 팔려서 지연이 무서운 일을 당하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그렇지만 그 얘기를 다시 꺼낼 수는 없었다. 지연에게는 기억을 하는 것만으로도 큰 충격일 것 같았다.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을 못 했다.
두 남매는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학대 수준의 방치가 그 이유였다. 보육원은 그동안 살았던 동네와 학교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라 태경은 차라리 안심이 되었다. 자신이 평범해진 느낌이었다.
얼마 후 어머니가 동거남의 아이를 출산하다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서야 태경은 자신과 지연이 어머니의 호적에 올라가 있고 아버지의 흔적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슬펐을까. 두 남매에게는 슬픔이란 것도 낯선 감정이었다. 태경은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보육원에서는 제때 밥을 주고, 공부도 봐주고, 아침이 되면 잘 잤냐고 인사해 주는 어른도 있었다. 모든 것이 예전보다 나았다.
보육원에서 자란 두 남매는 여동생의 입양으로 헤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양부모의 배려로 서로 연락은 주고받을 수 있었다. 태경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보육원에 있었다.
엄청난 부자는 아니었지만 적당히 살 만하고 인품이 좋은 양부모 아래서 지연은 부족함 없이 자랐다. 양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세에 위기가 온 것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양어머니는 스스로 돈을 벌 줄 몰랐다. 물려받은 유산을 아껴 쓰며 살아가고 있는 양어머니는 아직 재산이라도 남아 있을 때 수양딸을 최대한 좋은 집안에 시집보내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지연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돈이다. 돈이 모든 삶의 바운더리를 결정한다. 바닥에 있어 보았던 그녀는 다시는 그 세상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성인이 된 그녀는 자신이 휘두를 수 있고, 자신이 원하는 걸 해줄 수 있는 재력의 배우자들을 물색했다. 대형 병원의 후계자이자 자신도 의사인 기호준은, 지연에게 제법 괜찮은 상대였다.
그는 그녀에게 함락되었다. 치밀히 계획된 유혹이었지만 기호준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끌려 사랑을 하게 되었다고 믿었다. 두 사람은 약혼을 했다. 겉으로 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아.”
그녀는 오랫동안 자신의 그늘이 되어주었던 오빠에게 자신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친구에 대해 투덜거렸다.
김은주. 그녀는 지연의 고등학교 동창이었으며 기호준과도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은주의 집안은 대대로 부유하고 명망이 있는 집안이었다. 할아버지부터 저명한 학자이자 교수였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같은 대학의 교수였다. 곱게만 자란 은주는 순진하고 또 순진했다. 은주는 지연에게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장기의 말과 같은 존재였다. 순진한 데다가 남을 의심하지 않는 그녀는 지연에게 쉽게 이용당했다. 은주의 인간관계에 힘입어 지연은 자신이 만날 수 있는 남자들보다 더 좋은 조건의 남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기호준도 은주를 통해서 만난 남자들 중 하나였다. 가장 머리가 좋고, 가장 유능하고, 성격도 좋고 가장 재력이 있었다.
은주의 인간관계는 지연의 인간관계로 쉽게 편입이 되었다. 아름답고 기품이 있는 지연을 사람들은 환영했다. 그리고 지금은 기호준의 약혼녀였다. 그녀는 완벽했다.
“나야말로 모든 것을 가질 자격이 충분한데 그걸 알아주지 않아.”
약간은 화난 목소리였지만 품위를 잃지는 않았다.
지연은 기호준과 결혼하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은 딱 맞는 짝이었다. 인물도 좋고, 능력과 재력을 겸비한 호준은 누구보다 좋은 신랑감이었고,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우며, 좋은 대학을 나와 이제 막 사회에 선 지연은 누구보다 좋은 신붓감이었다. 누가 봐도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당연했다.
은주는 두 사람의 오랜 친구였다. 은주를 통해 두 사람은 만나 연인으로 발전할 만남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부모들끼리 초대장을 주는 사교 모임에 은주는 지연을 데리고 갔고, 그런 가운데 기호준은 지연과 사랑에 빠졌다. 이 모든 것에 장애는 없다. 은주에게 기호준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한 오빠였고 지금 기호준의 약혼녀는 지연이었다. 그런데 지연은 무엇이 두려운 걸까.
두 남매는 우두커니 말없이 서 있었다. 뎅그렁, 문에 달아 놓은 종이 울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모른 척 돌아서는 지연의 등 뒤로 태경이 말했다.
“알았어.”
지연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지연은 따로 떨어져 유복하게 자라왔으며 지금은 태경보다 훨씬 괜찮은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여동생에게 가진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동안 태경은 수없이 지연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때로는 나쁜 일도. 그래서 지연은 지금도 생각했다. 오빠는 자신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라고.
사실, 어린 시절의 사건은 지연에게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자기가 잘못한 일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오빠들이 나쁜 일이었다. 학교 선생님도 그렇게 얘기했다. 너는 하나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지연은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태경에 대해서도 크게 원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빠가 가지고 있는 죄책감은 이용하기 쉬웠다.
그때의 그 오빠들은 쓰레기였다. 엄마도 쓰레기였다. 얼굴도 모르는 아빠도 쓰레기라고 생각했다. 지연은 쓰레기들과 살기 싫었다. 쓰레기 같은 동네에서 보육원으로 옮겨왔지만 좀 더 나은 쓰레기였다.
그녀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좀 더 나은 사람들과 만나고 싶었다. 기호준을 선택한 이유도 그러했다. 멀쩡하고 더 나은 사람이라서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은 조건의 사람이 나타나면 주저 없이 버리리라. 다만 쓰레기통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깨끗하고 쓰레기들이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성에서 살고 싶었다.
사랑은 사치스러운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밑바닥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가지는 환상.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용해도 미안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