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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56346104
· 쪽수 : 220쪽
· 출판일 : 2025-01-20
책 소개
목차
4 | 작가의 말 | 텃밭
1. 골목 연가
12 우체국 가던 날
17 겨울 을왕리에서
21 추어탕을 끓이며
26 5분 전 예고
31 골목 연가
38 깜과 어머니
44 몸값
48 버선목 뒤집기
52 나도 춤추고 싶었다
2. 침엽수와 활엽수
59 상사화를 만나다
64 침엽수와 활엽수
70 감 이야기
75 다시 나팔꽃을 심으며
80 상추쌈
85 야간산행
89 그리운 용대리
93 봄을 넘보다가
96 특별한 재회
101 젊은 날의 삽화
3. 집으로 가는 길
107 이삭과 원피스
110 저물녘 골목시장
114 집으로 가는 길
120 세월의 힘
125 버리지 않은 꿈은
130 긴 수다
136 울적한 날엔
140 철새는 날아가고
145 그 여자의 호주머니
149 편지
153 할머니 미국 모르지요?
157 할머니는 몰라
4. 입이 그들다
165 씹던 껌
170 마이동풍
175 동냥 밭에서
179 마지막 둥지
183 타인의 관심 혹은 무관심
186 욕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191 바리스타 그녀
197 원위치
201 다름을 변명하다
206 입이 거들다
210 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
217 아버지의 정원
저자소개
책속에서
편지
편지의 매력을 알게 된 것은 중학교 이 학년 때였다.
초여름쯤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귀갓길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미루나무가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제1교문과 2교문 중간쯤에서 학교 심부름하던 아이를 만났다.
그는 까맣게 빛나는 뾰족구두를 들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내가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영어 선생님 집에 구두 갖다 놓으러 간다고 했고, 나는 인심 좋은 누이처럼 그 심부름을 대신해서 하겠다고 말했다. 우리 집이 영어 선생님 옆집인 것을 아는 그는 웬 떡이냐는 듯한 얼굴로 두말없이 구두를 건네주었다.
난생처음 만져보는 장난감 쪽배 같은 뾰족구두를 들고, 선생님 집을 지나 우리 집으로 내닫고 말았다. 집에 오자마자 방문을 닫아걸고는 냉큼 구두를 신어보았다. 키는 금세 사촌 오빠만큼 커져서 까치발로 간당간당 손끝이 닿던 선반에 가만히 선 채로 손이 얹혔다.
기분이 업된 나는 빨래판만 한 면경을 벽에서 떼어내어 방바닥에 비스듬히 세워놓은 후 뾰족구두에 담긴 내 발의 앞태도 보고 뒤태도 보며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손을 허리춤에 올린 채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아도 보았다.
도가 지나쳤던가, 사달이 나고 말았다. 굽 하나가 삐딱하게 틀어져 버린 것이다. 아찔했다. 이리저리 만져보았으나 그럴수록 굽은 더 삐뚤어지는 것 같았다. 안절부절못하고 엎드려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실직고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미국 대통령 누구도 어린 시절 정원의 나무를 망가뜨려 놓고 정직하게 고백해서 용서받지 않았던가. 물론 그 생각까지는 못했겠지만.
‘선생님 잘못했습니다’로 시작한 편지는 제가요 구두가 너무 신어보고 싶어서 어쩌고 하다 보니 자꾸 길어졌다. 두툼한 편지를 최대한 꼬깃꼬깃 접어서 구두 속에 밀어 넣고 선생님 방문 앞에 갖다 놓은 후 도둑고양이처럼 내뺐다.
이후 선생님이 한 번도 그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므로 철없던 나는 편지가 소임을 다 해주었다고 생각했다. 내남없이 어렵던 시절, 선생님이라고 얼마나 더 넉넉했겠으며 구두 한 켤레 장만하기가 지금 같았을까.
그 귀한 구두를 망가뜨렸으니 제자고 선생이고 간에 당장 물어내라고 하고 싶으셨으리라. 선생님 역시 갓 대학을 졸업 한, 어리다면 어린 소견이셨을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구절절 죄송하다를 늘어놓은 철딱서니 제자의 편지를 보며 차마 내색은 못 하고 분함을 삭혔으리라 싶어 더더욱 송구스럽다. 어디 계신지 뵐 수 있다면 편안한 구두에 손편지 한 장 담아서 드리고 싶다.
엄청난 잘못을 하고도 편지로 죄의 사함을 받은 나는 그 매력에 빠져들었다. 날마다 만나는 짝에게 쪽지를 건네고, 당시 유행하던 ‘학교 대 학교 간 펜팔 친구 만들기’ 행사에선 욕심스레 편지 세 통을 차지하기도 했다.
남편과도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사랑을 키우면서 편지를 썼는지 편지를 쓰면서 사랑이 자랐는지 헷갈리지만,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집 전화도 귀하던 그 시절엔 유일하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통로가 편지였다.
결혼 후에도 가끔 편지를 썼고 아이들에게도 심심찮게 쪽지 편지를 건네곤 했는데 언제부턴가 나도 펜을 들지 않게 되었다.
너도나도 무언가에 쫓기는 듯 바쁘다를 외치며 살아가는 요즈음,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는 창이 많으니 편지는 더구나 손으로 또박또박 쓰는 편지는 아득히 멀어졌다.
편지를 쓰겠다고 다짐하는 계절이다.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달라고 애절하게 노래할 만큼 마음이 촉촉해지는 가을, 오랜만에 얼굴 보기 힘든 남편에게 편지를 한번 써 볼거나. 느림의 미학을 음미하면서 핸드라이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