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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56410232
· 쪽수 : 384쪽
· 출판일 : 2015-02-16
책 소개
목차
프롤로그 7
1-9. 21-297
에필로그 323
외전. 그 밤의 조우 333
SPECIAL 외전. 노란 장미 343
작가 후기 377
저자소개
책속에서
띠링!
문자 메시지 알림 음에 해연은 전화기를 보았다.
[1월 10일 고객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생일 기념 10% 할인 쿠폰을 드립니다. -한송 베이커리]
아무도 기억조차 하지 않는 생일. 생일상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축하해’ 한마디를 듣고 싶었을 뿐이다. 호구 노릇이나 하라는 전화가 아니라.
건널목 앞에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누군가 툭 치고 지나갔다. 어느새 신호가 바뀌어 있었다. 서둘러 건너가려는데, 하필 그때 가방 끈이 끊어졌다.
언제 샀는지 기억도 희미한 가방의 어깨끈이 다 낡아서 끊어져 있었다. 쏟아져 나온 소지품을 주워 담다 해연은 울컥했다.
너, 정말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사니?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어도 나아진 건 하나도 없는데.
나아지기는커녕 갈수록 최악이다. 지금의 모습을 그 대학 선배가 보았다면, 보나 마나 냉소를 지었을 것이다.
‘봐. 내가 뭐랬냐?’
모임에서 한 번씩 마주칠 때면, 그 직선적인 성격으로 툭툭 독설을 내뱉던 선배 도곤. 그저 아는 선배였다면 그렇게까지 상처받지 않았을 거다.
그래. 사실은 그를 좋아했다. 도곤 선배랑 사귀고 싶다거나 뭐, 어떻게 해볼 생각을 했던 건 아니다. 그저 마음에 담았었다. 그랬기에 그의 독설이 그녀에게는 상처가 되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저 한번 쓰게 웃고 말았을 얘기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그한테만은 그런 얘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다시 신호가 바뀌었다. 해연은 끈이 끊어진 가방을 그러쥐고, 길을 건넜다.
‘너 평생 그렇게 살다 죽을래?’
건널목 맞은편에 여행사가 있었다. 해연은 여행사 유리창에 붙은 사진을 보고 그 앞에 멈춰 섰다.
낙원에서의 휴가.
혹한을 피해 열대의 섬으로,
지금 바로 떠나세요!
이국적인 섬의 풍경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해연은 여행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책상에 앉아 있던 여직원이 웃으며 인사했다. 그 앞으로 걸어간 해연은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고, 대뜸 말했다.
「지금 당장 떠날 수 있는 곳이 있나요?」
「예?」
놀란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든 상관없어요. 최대한 빨리 떠날 수 있는 곳이면.」
목적지는 상관없다. 그저 떠나야 했다. 지금 뭔가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렇게 살다 죽을 것 같았다. 언젠가는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꿈만 꾼 채.
구질구질한 인생. 아무리 아니라고 해봐야 그게 그녀의 인생이었다. 누가 그렇게 살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집안 사정이 갑자기 어려워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분명 그녀의 선택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중간에 학업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5년 만에 학교를 졸업한 뒤엔 커피 한 잔 사 먹는 것도 벌벌 떨어가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이제는 조금 여유를 가져도 좋으련만, 그러지 못했다.
온갖 궁상을 떨어가며 돈을 모았다. 선배의 말처럼 어느새 그런 생활에 길들어진 건지도 몰랐다. 다르게 사는 방법을 잊어버린 거다.
「아, 고객님. 죄송하지만, 인기 노선은 이미 예약이 끝난 상태라서요. 다음 달 설 연휴까진 자리가 없다고 보셔야 해요. 아이들 방학도 있고 해서.」
직원의 말에 해연은 얼굴을 찡그렸다.
「대기자 명단에 올려드릴 수는 있는데요. 그것도 이미 풀이라, 자리가 날지 보장은 못 드려요. 아무튼 다음 달은 돼 봐야…….」
다음 달? 그렇게나 기다리다간 그때까지 여행을 갈 수 없는 이유가 백만 개는 생길 거다. 가려면 당장 가야 했다. 그래서 그녀 자신조차 취소할 수 없게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는 기다릴 수 없어요. 내일 당장도 좋아요. 취소된 표라도 없나요? 장소는 정말 아무 데나 상관없어요.」
해연이 절박하게 말했다.
「어, 취소된 표가 있기는 한데요. 이틀 후에 출발하는 건데.」
그녀의 기세에 밀린 직원이 컴퓨터를 두드렸다.
「아이우스 섬에서 14박 16일 일정이고요. 얼마 전에 수교한 나라라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에요. 직행 노선은 없고, 경유를 좀 하셔야 하는데…….」
「괜찮아요. 갈게요.」
「홍보 기간이라 프리 세일 중인데, 시범적으로 진행하는 거라서 생각하신 것과는 정말 다를 수도 있어요. 우리나라 사람도 거의 없을 테고……. 불편하실 수도 있어요.」
무작정 가겠다고 하는 해연을 오히려 직원이 말리는 듯한 분위기다.
「상관없어요. 이틀 후에 출발이라고 했죠?」
해연은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에는 달랑 만 원뿐이었다. 그래서 고이 모셔두었던 카드를 꺼냈다.
작년에 동생이 취직하기 전, 새로 양복을 맞추느라 한도까지 긁어 썼다. 그 결제 대금도 그녀가 모두 갚았다. 자신을 위해 카드를 쓰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회사에서 휴가를 내줄지, 집 문제는 어떻게 할지. 고민하면 다 머리가 아픈 것들뿐이다. 하지만 해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괜찮아. 안 죽어. 지금 당장 어떻게 하지 않아도. 2, 3주 미뤄둔다고 해서 지구가 멸망할 것도 아니고.
허무하게 죽어라, 일만 하며 보낸 10년. 아무도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않겠다면, 내가 하면 된다.
그동안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러니 이런 생일 선물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단 한 번이라도 좋다. 여기서 벗어나야겠다. 이렇게 살다 진짜 미쳐버리기 전에.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해연은 마치 전쟁을 선포하듯,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