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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청소년 > 청소년 문학 > 청소년 소설
· ISBN : 9791156751410
· 쪽수 : 264쪽
· 출판일 : 2017-05-30
책 소개
목차
소원은 언제나 이루어지지 않는 법 007
지독한 벌칙 028
고통은 슬픔과 똑같다 062
불길한 생각 085
마지막 기회 105
작전 개시 135
무서운 기억 162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 171
도착 211
고통의 냄새 226
숫자의 의미 257
작가의 말 260
리뷰
책속에서
*소원은 언제나 이루어지지 않는 법
사장부터 일꾼까지 남자뿐인 카카오 농장. 예정에 없이 갑작스레 여자아이가 들어와 농장 사람들 모두가 혼란에 휩싸인다. 가난한 시골 남자 아이들만 한데 모인 이곳에는 어울리지 않는 생김새와 차림새. 거기다 제정신으로는 보이지 않는 반항기가 왠지 심상치 않다. 여자아이는 언뜻 아마두를 향해 도움을 요청하는 눈길을 보내는 듯하지만, 아마두는 이를 외면한다.
“쟤, 여자야?”
세이두가 숨죽여 소곤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첫째, 이 농장에 여자애는 단 한 명도 없다. 둘째, 한 차에 한 명만 태워 오는 경우는 본 적이 없다. 다 운송비가 비싼 탓이다. 딱 한 명만, 그것도 여자애를 데려오다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이지?
나는 홀린 듯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이는 푸른색 원피스를 입은 채 양손이 뒤로 묶여 있었다. 비록 여자아이이긴 하지만, 덩치 큰 어른들이 낑낑대며 끌어낼 정도로 거세게 저항하는 모습이 흡사 야생 동물 같았다.
그 애는 끝내 아저씨 손에 질질 끌려 나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냉큼 일어나 나무 쪽으로 후다닥 도망쳤다. 뒤따라간 아저씨가 손목을 와락 낚아채는 바람에 금방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아저씨는 무릎으로 여자애의 등을 꽉 눌렀다.
여자애는 털이 쭈뼛 설 정도로 매섭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아저씨가 아무리 귀싸대기를 올려붙여도 멈추지 않았다. 아저씨는 간신히 여자애를 일으켜 세운 다음, 농장 주인들 앞으로 떠다밀었다.
무사 사장은 무언가 경계하는 눈치였다. 충분히 그럴만했다. 아무리 봐도 저 여자애는 정상이 아니니까. 농장 주인 삼 형제는 팔짱을 끼고 뻣뻣하게 서서 옥신각신하며 토론을 벌였다.
(중략)
나는 엉겁결에 자리에서 일어서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으려는 찰나, 여자애의 눈빛이 내게로 날아와 꽂혔다. 순간,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갸름한 얼굴에서 반짝이는 커다랗고 짙은 눈동자가 내게 도움을 청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애써 그 시선을 외면했다. 여자애는 곧 내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중략)
그들이 거래를 마무리하는 동안, 우리는 얌전히 기다렸다. 트럭 운전사 아저씨가 트럭을 몰고 떠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여자애가 트럭의 꽁무니에 대고 욕을 퍼부었다. 곧이어 여자애가 삼 형제에게 무지막지하게 매타작을 당했다.
드디어 무사 사장이 우리가 모여 앉아 있는 곳으로 여자애를 질질 끌고 왔다.
“좋아, 다들 충분히 쉬었을 거야.”
삼 형제는 각자의 조를 이끌고 작업장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덤불 속을 터덜터덜 걸으면서 여자애를 힐끔거렸다. 가까이에서 보니 살쾡이처럼 사나워 보이지는 않았다. 갸름한 얼굴에 높게 솟아오른 광대뼈가 꽤 예쁘장했다. 하나로 땋아 묶은 머리카락은 매질 때문인지 다소 흐트러져 있었다.
문득, 볼에 통통하게 살이 오른 걸 보면, 우리 같은 시골 출신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토실토실해지려면 적어도 몇 년 동안은 잘 먹은 게 틀림없을 테니까. 사실 그 여자애가 어디 출신인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지금 우리와 같이 여기에 있으니까.
나는 쓸데없는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털어내려 고개를 흔들면서 중요한 걸 세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안고 있는 걱정거리는 저 여자애가 아니었다. 내게 주어진 할당량이었다.
*지독한 벌칙
아마두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 여자아이가 세이두를 속여 탈출한다. 아마두는 세이두를 감싸기 위해 나섰다 여자아이와 한통속으로 몰리고 함께 벌을 받게 된다. 틈만 나면 도망칠 궁리를 하는 살쾡이 같은 여자아이, 하디자. 알고 보니 부잣집 딸에 학교까지 다녔단다. 하디자는 남의 속사정도 모르면서 뻔뻔하게 참견을 한다. “네가 정말로 동생을 위하는 길은 여기에서 하루빨리 데리고 나가는 거야.”라고.
사장은 곧 공구 창고로 들어가 하디자를 긴 쇠사슬에 묶어 끌고 나왔다. 그러고는 쇠사슬 반대쪽 끝을 간이 창고 옆 콘크리트 바닥에 있는 쇠고리에 채워 놓았다. 마지막으로 마체테 두 개를 가져다 우리 쪽으로 휙 던졌다.
여기에 칼 두 자루와 우리 둘만 남겨 둘 속셈이로구나. 그때 하디자가 내게 눈을 부라렸다. 이윽고 사장이 말했다.
“껍데기 까는 일이 많이 밀렸다. 알다시피 피스테르가 씨앗을 가지러 오기 전에 적어도 나흘은 건조를 해야 하니까 후딱 해치우도록 해.”
사장이 발길을 돌리자마자 나는 마체테를 향해 돌진하듯 손을 뻗었다. 뜻밖에도 살쾡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떨결에 칼 두 자루를 모두 잡아채는 바람에 골치가 아파졌다. 내가 칼을 둘 다 가지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나누어 가질 것인가? 나 때문에 일을 하지 못했노라는 핑계를 듣지 않으려면 온종일 살쾡이를 감시하고 있어야 할 판이었다.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두 칼날을 비교해 보았다. 오랫동안 망설인 끝에 좀 더 무뎌 보이는 마체테를 하디자 앞에 툭 던졌다.
“그거 써.”
이미 사장은 세이두와 아이들을 이끌고 숲으로 총총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때 땅에 있던 칼이 들리며 쉬익, 끌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하디자가 왼손에 마체테를 단단히 움켜쥐고 서 있었다. 나는 싸울 태세를 갖추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한동안 서로를 그렇게 응시했다. 텅 빈 마당의 적막을 메우는 것은 벌레들이 윙윙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기다리다 못해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뭔데? 언제 덮칠까 고민하며 입맛 다시는 살쾡이처럼 온종일 그러고 서 있을래?”
“나한테 칼을 겨누고 있는 쪽은 너라고.”
하디자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얼굴이 퉁퉁 부어 한쪽 눈은 뜨지도 못했다.
“난 널 공격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어. 그냥 껍데기를 까고 싶을 뿐이야.”
“아, 어련하시겠어? 넌 말을 아주 잘 듣는 애니까.”
빈정대는 소리에 한 대 후려치고 싶었지만 무기를 들고 있으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넌 왜 그렇게 못돼 먹었냐? 그렇게 일하기 싫은 애가 국경은 왜 넘어왔는데?”
하디자는 돌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난 꼭 도망칠 거야. 막을 생각 하지 마. 난 내 할 일을 하는 거니까.”
나는 다시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냐? 너, 말 한번 잘했다. 네 할 일이 도망치는 거라면 내 할 일은 저 통을 꽉 채우는 건데,”
나는 채우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가슴 높이의 커다란 플라스틱 통을 마체테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사장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난 동생 곁으로 돌아갈 수 있어. 세이두 말이야! 네가 어제 속이고 짓밟아 버린 내 동생! 그러니까 네가 지금 나한테 덤빌지 말지 알아야겠어. 곁눈으로 널 감시해 가며 느려 터진 속도로 일할 순 없으니까.”
하디자는 아이들이 사라져 간 숲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금속처럼 단단하고 밋밋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네가 정말로 동생을 위하는 길은 여기에서 하루빨리 데리고 나가는 거야.”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게 그렇게 쉬울 것 같아? 여기서 도망치는 게?”
“적어도 나는 시도를 해 봤어!”
“나도 해 봤어! 넌 너 하나잖아. 난 두 사람이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나는 손가락으로 이유를 꼽기 시작했다.
“세이두는 빨리 못 달려. 세이두는 높이 올라가지도 못해. 세이두는 거짓말도 못해. 세이두는 깜깜한 걸 무서워해. 뱀이랑 농장 주인도……. 그러니 십 미터도 못 가서 잡혀 버렸지.”
하디자는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이게 차선책이야. 빚을 갚자. 다 갚으면 여기서 나갈 수 있다.”
“누가 그래?”
“……농장 주인들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왔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 년 동안 여기 있으면서 빚을 다 갚고 나간 아이는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농장 주인들이 말하는 빚이란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와 팔아넘긴 시카소(말리의 도시?옮긴이)의 중개인에게 지불한 돈을 뜻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얼마에 팔려 왔는지, 우리가 하루에 얼마를 버는지, 숙식비로 얼마씩 제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사장이 잘 관리하고 있다고만 철석같이 믿어야 했다.
“착각은 자유지. 내 일에만 상관하지 마.”
등을 돌린 하디자에게서 끼익끼익, 하고 날카로운 쇳소리가 들려왔다. 칼날로 쇠사슬을 가는 모양이었다. 어디 잘해 보라지. 더 얻어터지고 굶주려 봐야 뭔가를 알게 되겠지. 나는 이미 그렇게 배웠기에 더는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고통은 슬픔과 똑같다
하디자의 두 번째 탈출 기도로 아마두는 매를 흠씬 맞고 창고에 갇힌다. 번번이 이용당한 아마두는 하디자에게 증오심을 느끼지만, 농장 주인들이 도로 잡아온 하디자에게 가한 무지막지한 폭행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 사건 이후로 하디자의 눈에는 죽음이 드리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요란한 소리에 잠이 깼다. 거친 고함 소리와 발길질 소리 사이로 들리는 가녀린 울음소리……. 이어서 공구 창고의 자물쇠를 푸는 소리와 끼익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횃불이 문틈으로 몰려 들어오자, 나는 구석에 쌓여 있는 농약통 뒤로 후다닥 도망쳐 몸을 숨겼다.
횃불 때문에 그림자들이 내 뒤의 벽을 타고 껑충 뛰어올랐다. 문득 그들이 나를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안에서 희망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들은 널 까맣게 잊고 있어. 하디자 덕분에 네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거야. 그러니까 조용히만 있으면 널 발견하지 못할걸?
그들의 그림자가 내 위에서 춤을 추었다. 나는 마음속 외딴 방을 찾아 어떻게든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다. 여기만 아니라면 그 어디든, 어떤 곳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공처럼 몸을 웅크린 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눈을 감고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이제는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소리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속 외딴 방은 여전히 손에 닿지 않는 먼 곳에 있었다.
공기를 갈가리 찢으며 울부짖던 하디자의 소리가 뚝 끊겼다. 드디어 모든 것이 멈추었다. 농장 주인들은 자신들이 이겼다고 확신한 듯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하디자와 나만 어둠 속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사시나무 떨듯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쟤가 걱정스러워? 하디자가 세이두를 속였다는 사실을, 하디자 때문에 흠씬 두들겨 맞은 사실을 되새기려 애썼다. 그러나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자, 상처받았을 때 혼자라는 사실이 얼마나 끔찍한지가 떠올랐다. 잠시 뒤, 나도 모르게 어둠 속을 헤치고 기어갔다.
무릎이 흙바닥을 쓸며 쉬익, 하는 소리를 내자 하디자의 흐느낌이 멈추었다.
“쉿! 괜찮아. 나야, 아마두. 너한테 해코지 안 해.”
“난……, 아…….”
하디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무심코 하디자의 등에 손을 올렸다. 그 애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나는 얼른 손을 치우고 무릎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말없이 그 옆을 지켰다.
우리는 마치 밧줄 두 개가 돌돌 말려 있는 것처럼 그 상태로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하디자가 살그머니 내게 몸을 기댔다. 나는 오른팔을 하디자에게 두르고서 내 어깨에 기대어 울도록 했다.
“미안해.”
나는 마치 잔뜩 겁먹은 아이를 달래듯 작게 원을 그리며 등을 쓸어 주었다.
“미안해.”
다른 말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성미 급한 태양이 밤하늘에 붉은 피를 흘릴 때까지 우리는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판자벽 틈새로 분홍빛 여명이 새어 들자, 마침내 최악의 시간은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은 슬픔과 똑같았다. 둘 다 낮에는 견디기가 더 쉬웠다.
“봐, 아침이 왔어.”
나는 하디자에게 혼잣말처럼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