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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58609221
· 쪽수 : 326쪽
· 출판일 : 2021-01-20
목차
작가의 말
프롤로그
1. 하얼빈행
2. 암거래 되는 여성들
3. 연해주 구상의 좌절
4. 얼렌하우트행
5. 그들의 정체
6. 쿤밍 참사
7. 죽음의 미스터리
8. 개탕치기 음모의 유래
9. 빗점골의 대결
에필로그
발문
작가의 역사적·사회적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가를 돌아보아보게 하는 작품_이영철(소설가, 한국소설가협회 부이사장)
참고문헌
저자소개
책속에서
계절은 봄이 되어 주변이 생동감으로 반짝이기 시작할 무렵 정대성은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에 구상하던 분단 상황에서 빚어진 트라우마와 탈북자관계에 접근할 수 있는 자료 취재가 문제였다. 며칠 고심하던 그는 다시 그 북한민주화운동팀을 찾아볼까, 하고 생각했다. 우선 연락처를 알아보는 것이 급했다. 이리저리 궁리 끝에 북경주재 한국 대사관 공사 출신 인사를 만나러 외교통상부로 향했다. 전철을 타고 광화문역에서 내려 막 지상으로 올라오던 중이었다. 이순신 장군 동상 쪽으로 나가는 계단을 몇 발짝 디디었을 때 전화가 왔다. 휴대폰 화면에 전화송신자가 ‘두만강 발행인’이라고 떴다.
‘아니 이 사람이!’
그는 혼자 깜짝 놀란 듯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전화가 끊어질세라 얼른 대꾸했다.
“여보세요, 정대성입니다.”
“거기 정대성 선생님입네까? 저 최지영이라고 합네다. 두만강…”
그는 토라져 달아났던 애인을 만난 듯 가슴이 벌렁거렸다.
“아 두만강 발행인이십니까. 반갑습니다. 남북관계에 관심을 가진 작가인데요.”
-광대한 대륙 만주, 일제에 맞서 말 달리던 선구자, 독립군들이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누비며, 일부는 소련으로 넘어갔다가 참변을 당하기도 하던 비통의 대륙, 그곳에 오늘도 한민족의 후예가 손에 손을 잡고 어둠을 헤치며 자유의 여명을 밝히고자 고난의 여정에 오르고 있었다. 1880년대 밀어닥친 흉년과 기근으로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야 옥토가 널려 있다는 청나라로 가서 땅이라도 파 보아야 되겠다며 두만강을 건넜던 선조들을 따라 일제 강점기에 남부여대 일가 권솔을 몽땅 데리고 이주한 조선인들이 곳곳에 터를 닦고 수전(논)을 개간했던 광활한 대지. 애국심과 정의감에 불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어 독립투쟁을 벌였던 거친 들판. 이제 고난의 행군 속에 아사자가 속출하고, 인권이 무지막지하게 짓밟히던 땅에서 탈출, 자유의 땅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그 역사적 곡절이 아로새겨진 만주 벌판을 누비기 시작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무사히 연길에서 하얼빈행 열차에 오른 일행은 일단 한 숨을 돌렸다. 1차 목적지가 하얼빈이었으므로 열차를 탄 것만 해도 목적지에 가까이 간 느낌이었다. 일제시대 할아버지의 생활 근거지였던 하얼빈으로 우선 가기로 한 이교민은 자리를 잡자 몸이 불편한 아내에게 편히 쉬도록 배려하는데 신경을 섰다. 다행히 40대 여성인 강난희 동무가 동참하여 아내를 돌보고 있어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강 동무가 우리 안까이를 보살펴 주니까네 고맙수다레.”
“교수 동지 내레 도와드리고 싶은데 머이 도움이 될 거인지 모르겠시요.”
“동무가 옆에 있는 것만 해도 도움이 되지 않간.”
이교민은 강난희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앞으로 긴 여정에서 아내가 심적인 부담을 들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었다. 낯선 외국에서 탈출을 강행해야 하는 판에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짐이 될 터이지만 강 동무는 여성이어서 그녀의 동참이 이교민 편에서는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도문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이미 잘 아는 사이처럼 느껴졌던 것도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교민은 그가 수이펀허역에서 일어난 불한당의 횡포 현장에 나타나는 바람에 알게 되었지만 아직 신상에 관해서 모르는 것이 많았다. 탈북자라고 지레 짐작은 했지만 국내에서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 믿을만한지, 궁금한 것이 많았다.
침실로 돌아온 그는 이제 막다른 탈출로에 왔음을 깨달았다. 이틀만 기다리자, 이틀만…. 회령 쪽에서 선구로 건너 도문을 거쳐 하얼빈에서 여기까지 큰 탈 없이 오게 된 것만도 다행이었다. 아내의 병환만 아니라면 연해주에서의 활동계획에 아무런 지장이 있을 것이 없었다.
‘아 이제 국경을 넘으면 자유를 찾게 되는구나.’
그는 국경을 넘기 전 수이펀허에 와서 감회가 새로웠다. 수이펀허 옆으로 흐르는 강을 수이펀강으로 부르게 된 유래가 생각났다. 청나라 때인지, 우리 한민족 선조들이 이 강에서 오랑캐들에게 당해 붉은 피가 강물에 넘쳐 강 이름마저 슬픈 강이라 해서 수이펀강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곳이다. 바로 건너편이 연해주로서 지척에 둔 그 지역은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예사로운 지역이 아니었다.
-중무장한 군인들이 수이펀허 철도 주변을 철통 같이 둘러싸고 있었고. 철로에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전차가 포문을 러시아 쪽으로 돌리고 서 있었다. 전시를 방불케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정말 야단이었다. 언제까지 이 사태가 지속될지 알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방송을 통해 사태를 주시했으나 사태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국제적 분쟁이 발생한 만큼 이 판에 국경 탈출이란 엄두도 못 낼 지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교민은 밤에도 잠이 오지 않아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방에만 들어 앉아 자신의 처지를 곱씹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밤이 되면 생각이 정리되겠지, 막연한 기대를 했으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갑작스런 사태가 발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름대로 평소 구상해 왔던 바를 실현시킬 기회가 왔다고 은근히 희망을 가졌었는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부딪치고 보니 난감한 정도가 더 했다. 하늘이 내리는 시련인지 몰랐다. 참자,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웅크렸던 몸을 펴고 반듯이 누웠다. 자정이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늦게 든 잠이라 꿈도 꾸지 않고 깊이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