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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58965907
· 쪽수 : 128쪽
· 출판일 : 2023-04-17
책 소개
목차
제1부
버려진 날개•13/통조림•14/빅토리아 탄산수 복숭아 향•16/가방의 안쪽•18/루브시엔 가는 길•20/계단을 오르다•21/환승역•22/상습 침수지대•24/열대어•27/베일마운트의 빙하호•30/페루행 완행열차•32/방명록•34/몬순 시기•36
제2부
검정 비닐을 뒤집어쓴 밤•39/발밑의 검은 입•40/전어•42/거미학자와의 인터뷰•44/건물의 사생활•46/숨바꼭질•48/샛강역•50/잠 못 이루는 밤이라고요?• 52/빈티지 상점•54/그 다리•56/강을 건너다•58/빈집•60
제3부
나쁜 마술•63/방어•64/리폼하우스•66/소 들어오는 날•68/겨울, 아우슈비츠•70/달걀•72/목이 긴 검정 양말•74/표류하는 밤•76/물구나무선 오후 세 시•78/창곡동•80/아쿠아로빅•82/아가멤논의 침묵•84/전화를 걸었다•86
제4부
파이트 클럽•89/Dexa•90/도굴의 순서•92/러시안룰렛•94/벨리댄스•96/길고 흰 목덜미•98/꽃들의 싸움•100/입교기•102/스틸 컷•104/칸나의 집•106/오믈렛•108/우리 동네로 이사 올 거라고 했다•110
해설 이현호(시인)•111
저자소개
책속에서
■ 시인의 산문
해변을 걸었다. 반짝이는 모래알에 눈이 부셨다. 눈을 비비다 모래를 만지다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휘어졌다 꺾이는 모양새가 글자 같았다. 그림을 그렸는데 글자가 되다니…… 상형문자 같기도 쐐기문자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낯선 언어들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
의류 수거함이 가득 차 있다
버려야 할 옷이 많은데
누군가 내다 버린 외투 위에
셔츠 소맷자락이 자나방처럼 팔랑거린다
매달릴 몸이 사라져
버려진 날개가 수북이 쌓이는 밤
밤새 쓰레기장을 들락거린다
버릴 곳을 찾지 못해 버릴 수가 없어서
두고 간 그의 옷을 한 아름 끌어안고
창밖을 서성거린다
날개도 없이 그는 무사히 날아갔을까
― 「버려진 날개」 전문
이정표가 없었다 노선을 갈아타야 하는데 사방으로 길이 뻗어 있었다 머리 위에도 길 발밑에도 길 벽면에서 화살표가 날아다녔다 화살표를 따라갔다 까만 뒤통수들을 따라 층계를 올라갔다 모자 쓴 뒤통수 상고머리 뒤통수 더벅머리 뒤통수 매점 지나고 사각기둥 지나 환승 통로에 들어섰다 창이 없는 통로엔 해가 뜨지 않았다 길 끝에서 길 끝으로 사람들이 몰려오고 몰려갔다 화살표를 따라갔다
우울한 계절이 몇 번인가 얼굴을 바꾸었다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겨울겨울, 외투를 벗었다가 다시 껴입었다 해가 뜨지 않았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눈발이 흩날렸다 꿈을 꾸어야 춥지 않았다 깨고 나면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갔다 죽어가는 뒤통수에 희끗희끗 서리가 앉아 있었다 매캐한 죽음의 냄새가 공중에 떠다녔다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운동회 날 울리던 휘파람행진곡이었다 죽은 자가 죽은 채로 일어나 걸었다 화살표를 따라갔다 발밑에서 와사삭 서릿발 소리가 났다 쥐들이 통로를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산 자와 죽은 자가 어깨를 부딪치며 아슬아슬 지나갔다 저마다 제 꿈속을 걸어갔다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화살표를 따라갔다
이 길은 언제 끝날까 끝이란 게 있기나 할까 행진곡이었던 휘파람은 장송곡 같기도 했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은 곡조, 꿈속인지 잠 속인지 환기되지 않은 불빛이 몽롱하게 비췄다 어디로 가고 있지? 어디로 가고 있어? 통로 끝 출구는 보이지 않는데 빗발치는 저 화살표 화살표
― 「환승역」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