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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과학소설(SF) > 한국 과학소설
· ISBN : 9791159923005
· 쪽수 : 144쪽
· 출판일 : 2020-05-30
책 소개
목차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작가의 말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공사라는 일의 가장 큰 매력은 근본적인 문제를 뜯어고친다는 점이다. 어릴 때 생리통으로 고생을 할 때면 슬은 책상에 엎드려서 가만히 상상을 했다. 자궁을 뜯어내서 반으로 가르고 햇볕에 뽀송하게 말리는, 혹시 열어서 안에 무슨 혹이라도 있다면 정성껏 하나씩 터뜨리고 잘라내고 약을 바르는, 햇볕에 산뜻하게 마른 자궁을 다시 잘 꿰매서 몸 안에 집어넣는 상상을 하고 나면 어쩐지 배가 덜 아픈 느낌도 들었다. 물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공사는 다르다. 냄새가 나는 곳엔 다 그럴 법한 이유가 있다. 배관이 녹슬어서 망가졌을 수도 있고, 벽이 썩어 있을 수도 있고, 정화조에 비둘기 시체가 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많은 문제들을 하나도 검토하지 않고 그냥 위에만 뜯었다가 더 두꺼운 걸로 덮어달라니. 슬은 어쩐지 사기를 치는 기분이었다. 그때, 발아래에서 찰박 소리가 났다.
찰박? 날 리가 없는 소리였다. 대리석으로 된 백화점 구석에서 찰박?
“눈물을 흘린 직원은 반드시 얼굴을 체크하고 나올 것.”
직원용 화장실이 세면대만 밝은 이유가 이거 때문이라면 좀 너무했다. 반사판을 씁쓸하게 보다가 슬도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세요.”
“저도 화장실 좀 다녀왔어요.”
“어째 너무 뛰어 들어가시더라.”
3층 직원 화장실로 올라가는 길에 보니 화장실에서 피를 씻던 직원은 1층 액세서리 브랜드 간판 아래에 서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오래 걸렸대.”
“요즘 화장실만 가면 좀 그래요. 몸이 안 좋아요.”
“방광염? 나도 걸렸어.”
“괴물이야, 이 아래엔 괴물이 있어. 원한으로 뭉친 괴물이 있다고.”
경찰들은 드러누운 노인을 끌어내려고 했지만 노인은 있는 힘껏 여기저기를 움켜쥐었다. 난감해하며 한 명이 노인의 옆에 앉아 이러시면 안 된다고 차분하게 말해보려고 했지만 노인의 귀기 어린 분노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린 새끼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빈오재를 해방시키려고 해. 이 밑에는 썩은 개굴창이 흘러. 너희들이 밑구멍으로 만든 썩은 개굴창이 흐른다고. 왜정 때부터 있었어. 왜정 때!”
경찰 한 명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툭 뱉었다.
“왜정 때 기껏해야 태어나셨겠구만, 왜정 때 뭘 아신다고 그러세요.”
“그래, 내가 왜정 때 태어났다. 왜정 때 갓난아기였어도 설마하니 그 이름을 모를 수는 없지. 너희는 이 밑에 뭐가 있는지 몰라. 썩은 내가 나고 고름이 흐르고, 원귀들의 시간이 형체도 없이 뭉쳐 있는 그 끔찍한 존재를 모른다고! 미츠코시 때부터 백화점에서 일하던 계집년들이 다 같이 가랑이로 낳은 괴물이 이 아래에 살아. 계집년들 밑구녕 냄새를 풍기는, 짓뭉개진 원한이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