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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이서영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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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과학소설(SF) > 한국 과학소설
· ISBN : 9791159923005
· 쪽수 : 144쪽
· 출판일 : 2020-05-30

책 소개

한국의 대표적인 SF 작가들이 공포문학의 거장 러브크래프트를 재창조하는 프로젝트. 인간의 깊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새로운 공포와 현실과 환상의 구분이 모호한 세계관, 기괴하고 음산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오마주한다.

목차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작가의 말

저자소개

이서영 (지은이)    정보 더보기
소설집 『악어의 맛』, 『유미의 연인』, 중편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등을 썼다. 2020년, 2022년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우수상, 2021년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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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공사라는 일의 가장 큰 매력은 근본적인 문제를 뜯어고친다는 점이다. 어릴 때 생리통으로 고생을 할 때면 슬은 책상에 엎드려서 가만히 상상을 했다. 자궁을 뜯어내서 반으로 가르고 햇볕에 뽀송하게 말리는, 혹시 열어서 안에 무슨 혹이라도 있다면 정성껏 하나씩 터뜨리고 잘라내고 약을 바르는, 햇볕에 산뜻하게 마른 자궁을 다시 잘 꿰매서 몸 안에 집어넣는 상상을 하고 나면 어쩐지 배가 덜 아픈 느낌도 들었다. 물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공사는 다르다. 냄새가 나는 곳엔 다 그럴 법한 이유가 있다. 배관이 녹슬어서 망가졌을 수도 있고, 벽이 썩어 있을 수도 있고, 정화조에 비둘기 시체가 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많은 문제들을 하나도 검토하지 않고 그냥 위에만 뜯었다가 더 두꺼운 걸로 덮어달라니. 슬은 어쩐지 사기를 치는 기분이었다. 그때, 발아래에서 찰박 소리가 났다.
찰박? 날 리가 없는 소리였다. 대리석으로 된 백화점 구석에서 찰박?


“눈물을 흘린 직원은 반드시 얼굴을 체크하고 나올 것.”
직원용 화장실이 세면대만 밝은 이유가 이거 때문이라면 좀 너무했다. 반사판을 씁쓸하게 보다가 슬도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세요.”
“저도 화장실 좀 다녀왔어요.”
“어째 너무 뛰어 들어가시더라.”
3층 직원 화장실로 올라가는 길에 보니 화장실에서 피를 씻던 직원은 1층 액세서리 브랜드 간판 아래에 서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오래 걸렸대.”
“요즘 화장실만 가면 좀 그래요. 몸이 안 좋아요.”
“방광염? 나도 걸렸어.”


“괴물이야, 이 아래엔 괴물이 있어. 원한으로 뭉친 괴물이 있다고.”
경찰들은 드러누운 노인을 끌어내려고 했지만 노인은 있는 힘껏 여기저기를 움켜쥐었다. 난감해하며 한 명이 노인의 옆에 앉아 이러시면 안 된다고 차분하게 말해보려고 했지만 노인의 귀기 어린 분노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어린 새끼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빈오재를 해방시키려고 해. 이 밑에는 썩은 개굴창이 흘러. 너희들이 밑구멍으로 만든 썩은 개굴창이 흐른다고. 왜정 때부터 있었어. 왜정 때!”
경찰 한 명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툭 뱉었다.
“왜정 때 기껏해야 태어나셨겠구만, 왜정 때 뭘 아신다고 그러세요.”
“그래, 내가 왜정 때 태어났다. 왜정 때 갓난아기였어도 설마하니 그 이름을 모를 수는 없지. 너희는 이 밑에 뭐가 있는지 몰라. 썩은 내가 나고 고름이 흐르고, 원귀들의 시간이 형체도 없이 뭉쳐 있는 그 끔찍한 존재를 모른다고! 미츠코시 때부터 백화점에서 일하던 계집년들이 다 같이 가랑이로 낳은 괴물이 이 아래에 살아. 계집년들 밑구녕 냄새를 풍기는, 짓뭉개진 원한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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