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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신학일반
· ISBN : 9791161291413
· 쪽수 : 736쪽
· 출판일 : 2020-02-21
책 소개
목차
서문
감사의 말
약어표
1부 현 학계에서 말하는 누가와 성령
1장 초석 놓기: 종교사학파와 그 도전에 대한 반응
2장 성령의 은사의 기본 성격에 대한 다양한 설명
2부 누가?행전의 배경으로서 유대교에 나타난 “예언의 영”
3장 유대교에 나타난 “예언의 영”과 원형적 은사들
4장 유대교에 나타난 “예언의 영”과 초자연적인 “능력”
5장 중간기 유대교에 나타난 “예언의 영”과 윤리적 영향과 “구원”
3부 성령의 메시아
6장 누가복음 1-2장에 나타난 성령의 메시아 도래
7장 세례 요한의 약속: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눅 3:16)
8장 메시아적 아들의 능력 부여
9장 새 출애굽 해방을 선포하기 위해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은 예수
10장 오순절: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의 예수의 즉위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그의 능력으로서의 성령
4부 제자들과 성령
11장 예수의 제자들과 그의 사역 시작부터 승천까지의 성령
12장 사도행전 교회에게 주어진 오순절 은사 506
13장 교회의 삶 안에서의 오순절 은사의 효과들과 사도행전에서의 “구원”
14장 결론
참고 문헌
성구 색인
책속에서
우리는 이미 누가에게 있어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이 성령을 한 인격으로 경험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선물”은 과연 어떤 행위 또는 어떤 일련의 행위의 시작을 가리키는가?” 이것이 아들 됨의 시작과 선교를 위한 능력 부여를 (동시에) 가리킨다는 주장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은 이제 보다 더 명확해진다. 이러한 주장은 적어도 개념상 잠재적으로라도 서로 상당히 다른 성령의 활동을 수반한다. 모든 사람이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전자를 필요로 할지는 몰라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선교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은사로 간주하고, “선교를 위한 능력 부여”를 차후에 따라오는 은사로 간주한다. 혹자는 누가가 성령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그들을 통한 선교를 독려하기 위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려 했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이러한 개념들을 합리화시킬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회심-입문 때 선교를 위한 능력의 부여로서 성령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그것을 믿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한다. 만일 누가가 성령이 오직 후대에 와서, 그리고 오직 일부 그리스도인에게서만 그러한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았다면, 그가 회심-입문 때에 주어진 성령의 선물을 선교를 위한 능력의 부여로 간주했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론적으로 일관되지 못한 주장이 되고 만다.
_2장 성령의 은사의 기본 성격에 대한 다양한 설명
앞서 3-5장에서 나는 유대교의 “예언의 영” 개념에 대해 오늘날 제기된 많은 해석에 커다란 물음표를 찍었다. 나는 “예언의 영”에 대해 적절한 정의를 내렸고, 이와 관련된 원형적인 은사들(은사적인 계시와 지혜, 돌발적인 예언자적 발언, 은사적인 찬양)에 주목했다. 비록 “예언의 영”이 (유대교 내에서) 은사적인 말씀 선포(이것은 기독교에서 발전한 것임)의 원천으로 간주되지는 않았지만, 성령과(보다 더 구체적으로)“예언의 영”은 초자연적인 기적의 원천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영적·윤리적 갱생을 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도 인식되었다. 이것은 특히 누가가 근거로 삼은 이사야 11:1-4에 반영된 “메시아 전승”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유대교 내에는 멘지스가 주장하듯이 “예언의 영”과 “은사적인 영” 간의 뚜렷한 차이가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예언의 영과 “구원론적인 영” 간에도 뚜렷한 차이가 없다. 이러한 결론은 “예언의 영”이 누가의 구원 개념과 무관하다고 전제할 수 없을뿐더러, 선교를 위한 능력 부여라는 부차적 은사로 간주될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는 누가가 성령을 초자연적인 능력을 나타내는 사역과 구분했다고도 추론할 수 없다. 우리는 누가가 이러한 유대교 사상의 흐름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_5장 중간기 유대교에 나타난 “예언의 영”과 윤리적 영향과 “구원”
내러티브 안에서 세례 요한(또는 다른 인물)에게 귀속된 견해와 내레이터/내재된 저자의 견해는 적어도 잠재적으로나마 분리될 필요가 있다. 누가의 관점에서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바로 그 예언자였다. 따라서 그의 말은 절대 성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비록 가브리엘이 독자들에게 요한이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할 것임을 확신시켜주고(1:15), 예수가 세례 요한을 “예언자보다 더 큰 자”이며,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더라도(7:26-28),51 누가는 요한이 이해한 것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참조. 7:18-21).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구원사적 사건이 전통적인 소망과 결합하면서 그동안 기대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를 띠게 된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저자 누가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 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에게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24:21)며 절망하는 내용을 기록하면서 독자들을 바로 그 아이러니의 심장부로 이끈다. 사실 누가 자신도 3:16-17에 기록된 세례 요한의 약속이 대부분 오순절을 넘어(행 1:5; 11:16)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성취되었음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곧 살펴보겠지만, 세례 요한의 말의 핵심을 그대로 보존한다.
_7장 세례 요한의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