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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함은 없는 결혼

순수함은 없는 결혼

밀혜혜 (지은이)
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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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함은 없는 결혼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순수함은 없는 결혼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63023777
· 쪽수 : 496쪽
· 출판일 : 2020-08-13

책 소개

밀혜혜 장편소설. 감정이 아닌 돈 때문에 한 결혼. 무엇도 로맨틱하다고 할 수 없는 시작이었다. 이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됐으니 서로를 놓아줄 때였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보내 줄게. 이제 그 사람한테 가."

목차

제1장 무지
제2장 신혼의 순간들
제3장 개입
제4장 밈플레잇의 파편
제5장 통보
제6장 마각
제7장 외상
제8장 변동
제9장 불상사
제10장 벽 너머
제11장 사고
제12장 교착
제13장 정리
제14장 순정
에필로그
외전

책속에서

어두운 가을 정원의 흔들의자가 선혜를 태우고 앞뒤로 움직였다. 1년 반쯤 전에 이사 온, 정원이 푸르고 소담한 복층 주택은 오로지 선혜의 취향이었다. 그 이전엔 한강 뷰와 야경이 아름다운 고층 아파트에서 살았다. 선혜는 한강 저편의 반짝이는 불빛을 내려다보는 것도 좋아했지만, 그보다는 흙과 나무가 있는 곳에서 이렇게 쉬고 싶었다.
삐걱. 삐걱. 흔들의자는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크기의 소음을 냈다. 선혜는 눈을 감고 그 소리를 들으며, 이 집을 선택할 때에도 우형이 얼마나 많은 것을 양보해 주었던가를 기억해 냈다.
이를테면, 그는 자신보다도 훨씬 한강 뷰를 좋아했다. 서재가 따로 있는데도 늘 마루에 나와 공부를 했을 정도로. 그래서 둘이 함께 집에 머무는 시간대에 마루로 나가면 그와 마주칠 때가 많았다. 그런데도 그는 이 집으로 이사하는 것에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에둘러 물었을 때도 특별히 좋아하던 것을 포기한 생색을 내지 않아 주어 고마웠다.
‘좋아하지 않았어?’
‘뭘요?’
‘한강이나 야경 보는 거.’
‘제가요?’
‘마루에서 계속 시간을 보냈잖아.’
‘그건…….’
‘고마워. 맞춰 줘서.’
그는 시선을 피하고 물만 반 모금 마셨다.
‘한강 좋아하는 거 알았는데, 경매 매물로 나온 이 집을 보고 포기할 수가 없었어. 미안해.’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우형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선혜와 눈을 맞추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 장면을 떠올리다가 눈을 떴다. 그리고 나이트가운 위에 걸친 두꺼운 가디건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11시가 넘었기에, 우형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 더 기다려 봤자 서로 피곤하기만 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선혜는 정원을 돌아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도 재산분할을 할 때, 우형은 이 집의 소유권을 원하진 않을 것 같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 * *

달콤한 향이 덮쳐와 눈을 떴다. 7년 전의 5월, 성년의 날에 선혜가 선물한 젠더리스 향수를 우형은 아직도 사용했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커다랗지만 예쁜 손이 베개에 늘어진 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는 게 보였다.
“……술 마셨어?”
답 없이 시선만 왔다. 사실은 물을 것도 없었다. 옅은 알코올 향이 느껴지기도 했고, 우형은 원래 술에 취했을 때만 밤중에 선혜의 방문을 열었다. 뒤에 놓인 시계를 보아도 술자리에 끌려가 3, 4차는 돌고 돌아왔을 시간이었다.
“네. 형이랑요.”
우형이 저런 호칭으로 부를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얼마 전에 가석방된 주인규 상무이사. 주희철 회장의 첫째 아들. 우형에 대해서는 적대감밖에는 가진 게 없을 인물이었다. 주인규는 우형에 대한 자신의 분노와 모멸감을 감추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선혜는 조심히 머리칼을 쓰다듬는 우형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따뜻했다.
“괜찮아?”
우형은 어둠 속에서 선혜의 시선을 느끼며 미소 지었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천천히 우형의 고개가 내려왔다. 두 입술이 닿았다. 선혜는 정장에 갇힌 단단한 어깨 위로 손을 옮겼다. 육중한 무게가 금방 허리 위를 덮었다. 우형의 긴 손가락이 선혜의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어쩐지 틈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행동이 다급했다.
당장 쉽게 얻을 수 있는 온기를 바라는 키스일 뿐이었다. 우형은 주인규의 끈질긴 괴롭힘에 지친 듯했다. 선혜는 이 정도의 위로쯤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몇 시간 전에 본 1억짜리 수표에 담긴 의미도 잠시 모른 척해 줄 수 있었다.
전두엽이 원하는 것과 달리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에게 갈 수 없는 몸이 원초적 본능을 따르고 싶을 수야 있는 거니까.
젊은 남녀가 한 지붕 아래 살면 수만 가지의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걸 고려하면 선혜와 우형 사이에 벌어지는 일은 경악스럽게 난잡하진 않은 편이었다.
종종 술에 취했을 때, 취기를 핑계로 입술을 대고 숨을 얽는 정도. 더한 단계로 넘어가는 일도 가끔 있었으나 심각하게 문제 될 건 아니었다. 어쨌거나 둘은 부부였으니까.
선혜는 우형의 죄책감을 덜어 주기 위해 다음 날 아침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굴고는 했다. 우형은 예전엔 자신이 지난밤 저지른 일에 크게 동요하는 듯했으나 최근엔 그 역시 담담하게 행동했다.
그가 무뎌지는 걸 보다 보면 조금은 먹먹한 기분이 됐다. 어쩔 수 없이 뻔뻔한 어른이 되어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과거의 우형을 기억하고 있기에 순수함이 변해 버린 게 속상한 건가.
“으응.”
속옷을 입지 않은 가슴이 뭉개졌다. 선혜는 잠시 벌어진 틈에 속삭였다.
“우형아, 나 새벽에 일찍 나가야 해.”
열기를 품은 눈이 선혜를 내려다보았다. 반쯤은 사실이고 반쯤은 핑계인 말을, 우형은 어쩌면 무시할 수도 있었다. 아내가 결국엔 체념하듯 응해 주리라 생각하면서, 이대로 가운을 전부 벗겨 내는 것이다.
그러나 선혜는 그가 그러지 않길 바랐다. 아직은 그가 충동적인 욕구 해소보다는 다른 것을 우선시할 만큼은 선하길. 이상한 기대라는 건 알았다. 그는 이미 더 많은 걸 차지하고 싶어서 아내를 갈아 끼울 뜻을 전한 남자였다.
입술이 다시 이마에 닿았다. 가볍게 눌렸다가 떨어졌다. 한참이 지나자 침대 한편을 누르고 있던 무게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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