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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위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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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수하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63024293
· 쪽수 : 416쪽
· 출판일 : 2020-12-31

책 소개

이혜위 장편소설. '내가 저 여자를 적시고 싶어.' 찰나의 사건으로 추락한 한 여자가 있다. 바다를 우아하게 군림하다 낮은 흙바닥에 전시된 채 말라가는 상어 같은 여자, 한윤아. 하수구에 고여 썩어가는 물을 닮은 한 남자가 있다. 살인 전과와 불행, 빚더미가 구더기처럼 들끓는 남자.

목차

1. 수족관
2. 하수구
3. 언더 워터
4. 수하
5. 수몰
6. 소생
7. 한윤아
8. 시곗바늘
9. shark`s return
10. 파란
11. the blue

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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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구태린. 너 고작 몇 억 가지고 저런 애 괴롭히니?”
신비롭고 차분한 저음이 공기를 흔들었다. 달빛을 모아 소리로 만든다면 반드시 저런 음성이 될 거라고 확신한다. 저 여자의 발음이 심장을 파고드는 순간, 어두움만 활개 치던 세상이 은은히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30억. 저 애 이름으로 주는 거야. 먹고 떨어져.”
객석 위로 조명이 들어왔다. 연노란 불이, 호텔 사장의 발치에 수표 몇 장을 내던지는 한 여자의 모습을 내리비췄다.
여자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하얀 원피스에 그만큼 긴 베이지 색 가디건을 걸친 차림이었다. 머리카락은 부스스한 곱슬인 상태로, 허리 주변에서 맥없이 한들거렸다.
어딘지 무기력하고 유약한 인상이었다. 새끼 손끝으로 툭 건드리면 곧장 바스러져 흩어져 버릴 것처럼. 인어를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말리면 저런 형태가 아닐까. 분명 본 적 없이 아름다웠지만, 고가의 물건들을 휘감은 채 앉아 있는 다른 여자들이 그녀보다 훨씬 더 강하며 우월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그녀에게 토 달지 못한다. 이 섬과 호텔의 지배자인 사장조차도.
누구일까. 당신은.
비밀투성이인 여자가 수하가 엎드린 단상을 향해 걸어온다.
한 발, 한 발. 차분히. 그러면서도 거침없이.
옆에서 눈치를 보던 지배인이 손에 쥐고 있던 목줄을 내려놓고는 빠르게 뒷걸음질 쳤다.
분명 절벽 밑으로 추락해 산산이 부서지기 직전이었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저 혼자서는 도무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던, 사지를 틀어쥐어 저 아래로 끌어당기던 절대적인 중력이 흩어졌다. 뜻밖의 사람이 나타나 저를 끌어 올려 주어서.
수하는 꿈결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여자를 응시했다.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온 여자의 눈도 수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도 저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알지 못할 낯선 감정이 목구멍을 헤집고 파고들어, 가슴 안쪽을 배려 없이 휘젓는 느낌이 들었다. 다급히 여자의 눈에서 시선을 떼는데, 여자의 손이 제 쪽을 향해 들리는 게 보였다. 수하의 큰 몸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경계는 수하의 오랜 버릇이다. 하도 오래되어, 이제는 살갗 밑에 뼈처럼 자리 잡힌.
몸이 여자를 경계하니 꿈에 잠긴 듯했던 정신이 깬다. 수하는 몸을 뒤로 물렸다. 여자와 멀어지기 위하여. 여자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기는 했지만, 그게 저에 대한 여자의 선의를 보장해 줄 수는 없다. 여자는 구태린 사장으로부터 목줄을 넘겨받은 것뿐이다. 이제부터 무슨 짓을 하려고 할지 몰랐다.
여자는 더 다가올 생각으로 들었을 발을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살포시 허리를 숙였다.
가볍고 길게 늘어진 앞머리 아래로 보이는 여자의 까만 눈동자는, 조명의 빛 조각을 찬란하게 머금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인지 무광인 것처럼 황폐했다.
여자가 두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일어설 수 있겠니?”
온화한 목소리와 함께 손 하나를 내밀며.
지극히 찰나였지만, 손이 조금 바들거리는 게 보였다. 누군가 감싸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게.
수하가 멍하니 거리를 좁혀, 그 손에 자신의 손끝을 걸었다.
얽힌 손가락들은 미지근했다. 그런데도 열꽃 수천 송이가 한꺼번에 피어나는 것 같은 감각이 손을 휘감는다. 심장이 놀라 파드득 뛰었다.
당황한 나머지 얼른 손을 떼고 싶었는데, 여자의 손이 놓아주지 않았다. 부드러우나 단호한 힘이 수하의 긴 손가락들을 잡아당겼다. 이끄는 대로 상체를 세워 두 발로 서자, 여자는 미련 없이 손을 놓았다. 그리고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어 주었다.
수하는 그제야 달달 떨고 있는 자신의 숨소리를 듣는다. 몸 마디마디는 혼자 놔두면 얼어 죽을 것처럼 부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자신을 위해서는 여자의 가디건을 받아야 했다. 그게 똑똑하고 이기적인 거고 약은 거니까.
가디건은 가녀리고 작았다. 이렇게 한 줌으로 쥐어지는 걸, 건장한 남자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게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수하가 입을 수는 없었다. 그냥 살짝 끌어안고는 여자의 뒤를 쫓았다.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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