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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판타지/환상문학 > 외국판타지/환상소설
· ISBN : 9791175483224
· 쪽수 : 596쪽
· 출판일 : 2025-11-28
책 소개
책속에서

침착해. 침착해야 산다.
나는 음치라서 그럴싸하게 허밍을 하지도 못했으니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노래를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학자다. 아카이브만큼 차분해지는 곳도 없다. 그래서 나는 그곳을 떠올렸다. 사실. 논리. 역사. ‘네 마음은 이미 답을 아니까 기억을 불러오기만 해.’ 아빠는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몸을 돌려서 망루로 되돌아가지 않으려면 내 두뇌의 논리적인 면을 작동시켜야 했다.
“대륙에는 두 개의 왕국이 있고, 우리는 400년 동안 전쟁 중이다.” 나는 서기용 시험을 준비하느라 머릿속에 때려박아서 쉽게 불러낼 수 있는 기본적인 자료를 읊었다. 그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난간다리 위를 이동했다. “우리 고국인 나바르가 더 큰 왕국으로 여섯 개의 독특한 지역이 자리하고 있다. 가장 남쪽이면서 가장 큰 지방인 티렌더는 포로미엘 왕국의 크로블라 지방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한마디를 뱉을 때마다 호흡이 가라앉고, 심장 뛰는 속도가 안정되며, 어지러움이 줄어들었다.
드래곤을 직접 마주하니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것처럼 뛰었다. 사실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달아나고 싶었다. 이런 대단한 존재의 등에 올라타야 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터무니없었다. 갑자기 제3비행단에서 생도 한 명이 튀어나오더니 비명을 지르면서 우리 뒤쪽에 있는 성채로 뛰어갔다. 모두가 몸을 돌려 그 생도가 중앙에 있는 거대한 아치문으로 질주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 거리에서도 아치에 새겨진 문구가 보일 듯했지만, 애써 읽지 않아도 나는 이미 외워서 알고 있었다. ‘라이더 없는 드래곤은 비극이다. 드래곤 없는 라이더는 시체다.’ 일단 계약을 맺은 라이더는 드래곤 없이 살지 못하지만, 대부분의 드래곤은 라이더가 죽은 후에도 잘만 살았다. 그들이 신중하게 고르는 것도 그래서였다. 겁쟁이를 골랐다가 망신당하지 않으려고 말이다. 드래곤이 실수했다고 인정하는 일이야 있을 리가 없지.
왼쪽에 있던 빨간 드래곤이 거대한 입을 벌려 내 몸집만 한 이빨을 드러냈다. 원한다면 나를 포도처럼 짓이길 수 있는 턱이었다. 그 혓바닥을 따라 불길은 섬뜩한 칼날이 되어 달아나는 생도 쪽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 생도는 성채 그림자까지 가기도 전에 자갈 위의 잿더미로 변했다. 68명 사망. 나는 열기에 옆얼굴이 화끈거리는 가운데 시선을 앞으로 홱 틀었다. 또 누군가가 달아나다가 처형당한다면… 보고 싶지 않다. 그때 또 비명이 울렸다. 나는 조용히 내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턱을 악물었다. 열풍이 두 번 더 느껴졌다. 한 번은 왼쪽, 또 한 번은 오른쪽이었다. 70명이 됐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