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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로맨스소설 > 한국 로맨스소설
· ISBN : 9791163025740
· 쪽수 : 480쪽
· 출판일 : 2022-05-13
책 소개
목차
chapter 1. 레티시아 마네르
chapter 2. 하얀 여왕
chapter 3. 일라이 네르바드
chapter 4. 버려진 황자
chapter 5. 아네스 윈터
chapter 6. 조사
저자소개
책속에서
어릴 적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꽃차를 마실 때만큼은 행복했다. 공작저에 혼자가 된 후론 마음 놓고 웃어 본 적이 없었다.
뒤로 물러난 수진이 눈물을 흘려 내며 레티시아를 올려다보았다.
“피오네 영애를 죽인 죗값을 치러.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언니가 저지른 과오를 후회해.”
저지른 적 없는 죄였기에 레티시아는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양녀의 살해를 용인했던 이유를 묻고 싶었다. 친딸인 그녀를 버리면서까지 그래야 할 이유가 있었는지.
하지만 죽음을 앞둔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수진을 택한 것이 아버지로서 총애였는지, 공작가의 주인으로서 내린 판단이었는지.
“피오네 백작 영애를 살해한 죄인, 레티시아의 사형을 집행한다!”
소리친 사형집행관이 불이 타오르는 나무 막대를 레티시아의 발치로 가져왔다. 불꽃은 곧 장작으로 옮겨졌다. 뱀의 혀처럼 넘실거리는 불이 레티시아의 발끝을 타고 올라갔다.
화르륵!
붉은 불씨가 서서히 번져 가더니 몸집을 키웠다.
그 순간 레티시아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울부짖는 수진, 막냇동생을 위로하듯 어깨를 감싸 안은 오라버니. 그리고 무감정한 얼굴로 레티시아를 지켜보는 아버지. 그의 얼굴에 죄책감 따윈 없었다.
광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레티시아를 살인자라고 외쳤다. 광기에 찬 얼굴로 돌을 던지는 이도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이 미치광이 악녀의 죽음을 바랐다.
화르륵!
불길이 거세져 레티시아의 발목까지 순식간에 번졌다.
끔찍한 고통이 이는 순간에도 레티시아는 눈을 감지 못했다.
미쳐 버린 악녀의 안식을 빌어주는 이는 없었다. 버려진 주제에 감히 구원을 바라서도 안 되었다.
발목까지 오던 불꽃이 빠르게 번져 낡은 드레스 자락을 휘감았다.
그때, 레티시아의 흐릿한 시야에 믿지 못할 광경이 들어왔다. 고개를 숙인 채 애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단 한 명이었다.
가문에서 버려진 공녀가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로브를 쓴 남자는 기도를 하기 위해 모았던 두 손을 내렸다. 그리고 숙였던 고개를 서서히 올렸다. 레티시아의 시선이 무너질 듯 남자를 향했다.
새하얀 로브를 쓰고 있어 얼굴 전부를 볼 수 없었지만, 날카롭고 깊은 눈매가 드러나 있었다. 그 사이로 어둡게 잠긴 보라색 눈동자가 연민을 담은 채 레티시아를 바라보았다.
“죽……여……줘.”
레티시아는 그에게 빌듯이 읊었다. 살갗이 불길에 타들어 가는 고통에 뇌가 녹을 것 같았다.
로브를 쓴 남자가 마력이 깃든 활을 꺼내 들었다. 레티시아는 염원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금빛의 활이 유일한 구원처럼 보였다.
화살은 레티시아의 심장을 향해 겨누어졌다. 그제야 그녀는 안도하며 옅은 숨을 흘렸다.
휘익.
포물선으로 날아간 화살이 그대로 레티시아의 심장으로 박혀 들었다.
푸욱!
심장에 화살이 꽂히는 순간, 레티시아는 안도했다.
바람이 불며 남자가 썼던 로브가 벗겨지자 짧게 자른 짙은 흑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죽는 순간이 되어서야, 레티시아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일라이 네르바드.
마네르 공작가와 천적이었던 네르바드의 젊은 후작. 그리고 마탑의 새로운 주인.
일라이가 죽어 가던 레티시아에게 안식을 고했다. 매혹적인 선을 가진 남자의 입술이 담담히 움직였다.
‘공녀에게 안식이 닿기를.’
유일한 위로를 들으며 레티시아는 스륵 눈을 감았다.
다시 살게 된다면. 그래서 일라이를 만나게 된다면 묻고 싶었다.
어째서 당신만이 내 안식을 빌어 준 것인지.
삶의 끝에 이르러서야, 레티시아는 자신을 외면했던 가족과 가주가 되겠다는 오래된 염원을 버렸다.
이윽고.
어둑한 안식이 레티시아를 찾아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