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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에세이 > 한국에세이
· ISBN : 9791165120955
· 쪽수 : 214쪽
· 출판일 : 2024-10-19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 주방세제보다 독한 ‘글의 힘’ · 4
제1장 결핍에 관하여
손가락에 관한 고찰··11 | 수유의 기억··16
빛의 요람이고 싶었던··21 | 비문이 소용돌이칠 때··25
내 코를 찾아줘··29 | 어쩌다 나비춤··33
착한 발에 날개 달고··37 | 부끄럽지 않아요··41
제2장 욕망에 관하여
작은 남자··49 | 산마루 연가··54 | 옥희는 행복해··59
사랑에 대한 미필적 소고(小考)··64 | 슈퍼맨은 없다··72
빈집에서 우는 아이··77 | 머리에 대해 말해볼까··81
제3장 가벼움에 관하여
전선 위의 달빛··87 | 복쟁이 아저씨··92
그 남자의 기타행(行)··97 | 진주 사우나에서 온 사나이··101
죽어도 강달이··105 | 청진에서 온 여인··109
반려초의 비명··114 | 까치는 죄가 없다··118
선생님, 저를 꾸짖어주세요··122
제4장 자유에 관하여
목마른 시절··133 | 그림자에 고하다··138 | 오! 격리해제··142
이르쿠츠크에서 부르는 노래··146 | 낙원에서 산호를 줍다··151
골목길, 그 행간을 더듬다··158 | 청어 뼈에 갇히다··162 | 성장하는 집··167
제5장 시간 그리고 집착에 관하여
책불(冊佛) 앞에 서서··175 | 냉면의 마음··179
다시는 홍어회를 먹지 않으리··184 | 잔짐의 굴레··189
포도당 굽는 시간··192 | 황홀한 집착··197
환멸의 끝, 주문진에서··202 | 만인복운집(萬人福雲集)··207
저자소개
책속에서
사거리 역전 어귀 국밥집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를 보았다. 우리 가게에서 뛰어 이삼 분도 안 되는 거리였다. 월화는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이내 시선을 피하고 제 할 일을 하였다. 얼핏 보았는데 쌍꺼풀 수술을 받았다. 눈두덩이 깊게 패어 못 알아볼 뻔했다. 졸린 듯 가늘게 웃음짓던 그 얼굴은 어디로 갔을까. 세월이 흘러 인상이 변해 있었지만 분명 월화였다. 그녀도 나이가 드니 눈매교정을 하였나보다. 건달과 살았다는 둥 주인을 홀렸다는 둥 동네에 악소문이 돌았지만 괘념치 않겠다. 나도 한때 ‘갈빗집 그 여자는 재취’라는 풍문을 안고 살았으니까.
월화와 헤어진 지 십 년이 지났다. 나는 지금, 그녀에 대해 어떠한 감정이 교차한다. 그것은 사상도 이념도 아니다. 월화를 보면 안쓰럽기 그지없다. 그녀를 볼 때마다 괜스레 미안해진다. 그녀는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편해보이니 좋은 남자와 잘 살고 있으리라. 조선족인들 한국인인들, 또한 그녀가 곧 죽어도 “나는 중국인이라니까요!”라고 외친들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서로 연관된 민족성을 지녔으면서도, 굳이 잣대를 들이대자면 아무런 혈연관계도 아닐 것이다. 이런 느낌이 드는 까닭은 모르겠으나, 월화에게 내내 살갑게 대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골목 한가운데 하늘을 갈라놓은 듯 전깃줄이 드리워져 있다. 무리진 달은 저녁내 전선을 옮겨다니다 멀어져간다. 내 진실은 그림자 밑에 숨었으니 선량한 달빛은 그 마음 알아주려나.
― 「전선 위의 달빛」 중에서
나는 주인의 목숨을 빌려 이 땅에 태어난 검정이다. 검정이 나이고 그것이 내 이름이다. 나는 특별히 빛나지 않는다. 부끄러움도 많이 탄다. 드러내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권력이다. 나는 암흑 속에서 너를 발견한다. 불이 켜지고 사그라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너는 내 흙에서 노래가 되고 춤이 된다. 터널 끝, 빛들은 숨 쉬며 꽃 피울 준비를 한다. 너는 나에게서 태어나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빨갛고 푸르게, 노랗고 하얗게. 너는 핏줄이 되고 살이 된다. 피와 살이 된 네가 나와 함께 주인을 위한 빛 그림을 그리고 있다. 너와 내가 빛으로 나오기까지 세상은 얼마나 두려운 것이냐. 우린 결국 어떤 색도 아닌 모든 색깔로 노래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위로를 갖고 싶다. 나는 순수를 잉태하고 싶다. 난 너에게 내 전부를 내주겠다.
뼛속을 긁어내고 내장을 비우고 나면 깃털처럼 가벼우리라. 생명의 낱알은 저 밑바닥으로부터, 텅 빈 우주로부터 시작되는 것. 그것은 빛이 없으니 차갑고 장막으로 드리워져 있으니 고요하며 종국에는 외롭고 황량한 곳이다. 나는 째깍대는 허공에서 너를 찾는다. 네 주인의 이름은 검정이다. 그것은 나와 그녀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는 ‘나’가 아닌 우리 모두의 주인에게서 터져 나왔다. 아무 색깔도 아닌 검정, 시작을 노래하는 검정, 다른 색이 될 수 없는 검정, 색깔의 끝인 검정이다. 나를 검정이라 불러다오. 무겁고 침울한 검정. 모든 빛을 감싸안는 검정. 사라져버리는 검정.
나는 어둠 속 모니터. 그렇게 환생했다.
― 「빛이고 요람이고 싶었던」 중에서
지금은 냉면 전성시대. 노포 냉면집들의 실록과 야사가 면발마다 낱낱이 새겨져 있다. 수백 가닥으로 쏟아지는 애환들이 역경을 딛고 달려가는 느낌이랄까. 함흥이면 함흥이요 평양이면 평양이지, 냉면 한 그릇에 뭔 잡다한 고명이 이리도 많으냐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내가 먹는 냉면 한 그릇이야말로 애증의 쉼터, 문학의 움이라 한다면 오만한 것일까. 끝이 없을 이야기. ‘문학은 무릇 냉면 같은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신념이 콧등을 탁 후려친다.
분주한 이 한 그릇 속의 이야기만큼이나 여름은 몹시도 길었다. 냉면은 사람 사이를 뜨겁게 이어주기도 했지만 때론 매몰차게 끊어놓기도 했다. 분창 속의 반죽덩어리처럼 뭉쳤다 흩어져 기약 없이 떠나는 사람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그릇을 받아 탁자에 놓고 내려다보노라면, 옴팍하게 똬리 튼 면발 위로 수많은 인물들이 고명처럼 앉아서 미소 짓는다.
이토록 타인의 노고와 허물을 되새김하며 쾌락에 젖는 음식이라니. 냉면의 마음도 내 맘 같을까. 남의 돈 먹기 쉽지 않고 맛있는 냉면 먹기 쉽지 않더라. 세상에 공짜는 없었으나 아낌없는 그이의 나눔은 성공하였다. 냉면 덕에 ‘나는 더욱 단단해졌다’고 위안삼는다. 언젠가 또 다시 손님을 맞게 된다면, 기쁨이 슬픔에게 속삭이듯 ‘따뜻한’ 냉면을 삶아낼 수 있을지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 「냉면의 마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