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5121068
· 쪽수 : 196쪽
· 출판일 : 2024-12-10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 신사임당과 허초희의 부활을 위하여 · 5
1장 묵은 빛 · 11
2장 리몽(李夢) 카페 · 31
3장 고고학의 폭풍주의보 · 53
4장 르네상스 시대로의 초대 · 93
5장 유랑 중인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 127
6장 두 여류작가의 만남 · 143
추천사 |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노력한 작품 · 홍성암 176
해설 | 소설의 서사구조와 운명적인 길 찾기 해법 · 엄창섭 180
저자소개
책속에서
고서화를 놓을 자리는 이미 준비해놓았다. 밤색 비단 보를 깔아놓은 곳에 두 폭짜리 고서화가 놓아져 있다. 막상 속의 작품을 보기 전까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한 물건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 여류화가가 태어난 지 5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오랜 시간을 거치는 동안 누군가가 다시 제본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록상 확실한 건 아직 아무것도 없다. 지난 세월이 건네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자신에게 타이른다. 손상되고 낡고 닳은 그 모습 자체가 당시 역사를 반영하니까. 족자 배접 모서리가 심하게 손상되어 있다. 갈라진 모서리 가운데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쓰다듬는다. 앞으로 보완할 곳이다. 오백 년 이상을 살아낸 고서화가 너무 닳아서 당장이라도 해체될 것 같아 조심스럽다. 심호흡을 크게 한다.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둘둘 말려 있는 두루마리를 천천히 앞으로 밀고 나간다. 이 고서화는 소유한 사람이 견딜 수 없을 만큼의 압박을 겪고 살았을 것이다. 묵은 빛과 먼지의 조각들이 자잘하게 흩어지면서 본색을 드러내는 찰나.
― 「1장 묵은 빛」 중에서
“저는 아버님과 오라버니들의 올곧은 생각 속에서 자랐습니다. 이 시대 열린 사고가 얼마나 필요한지 스승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 나라 지식인으로 모른 척한단 말입니까?”
이달은 계속 말을 주고받다간 큰일날 것 같아 말을 돌린다.
“양반댁 유생들은 간혹 생각과 느낌이 서로 충돌하면 갈등만 하지. 그런데 허씨 집안 자제들은 즉시 행동으로 옮긴다는 게 다른 양반 자제와 다르다면 아주 달라. 그것이 항상 나로서는 큰 걱정이다.”
“아마도 자유분방한 저희 허씨 가문의 내력 때문일 거예요.”
“잘 안다. 잘 알고 말고.”
대화 내용으로는 진취적이고 현실적이고 날카롭기 짝이 없다. 경청하다보면 상당한 지적 수준임도 짐작하게 된다. 물론 매우 위험한 사고라고. 당시 민중 혁명을 꿈꾸는 서구화에 물들었다고 비판할 작자도 있겠다. 하지만 양반 출신의 행랑어멈도 긴 한숨을 거두지 못한다. 양반집 자녀로 큰 변을 당하고 지금은 노비가 된 사람이다.
윤슬은 그 옛날 한성부 건천동, 허엽 본가本家에서 다시 몸을 바
꾼다.
― 「2장 리몽(李夢) 카페」 중에서
동시에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난설헌(초희) 묘지 근처 하늘에서도 우르르 꽝! 꽝! 천둥 번개가 치고 있다. 초희는 동생 허균이 능지처참당한 것을 알고는 무덤 속에 유폐된 채, 그녀의 영혼은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난데없이 마법사의 주술이 풀리고 있었다. 400여 년 동안이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그녀의 의식이 서서히 돌아왔다.
“무덤 속에 유폐된 나를 함부로 깨우다니! 참으로 무엄하도다.”
초희가 벽력같은 소리로 주변을 제압시키자. 차가운 하얀 피부가 드러난다. 그 순간 그녀의 혈색조차도 분노에 휩싸인다. 푸른 빛으로 또다시 어두워지고, 금방이라도 숨을 멈출 것만 같다. 급한 마음에 사임당은 심장 소생술을 시도한다. 생명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한 노력 덕분에 초희의 심장이 다시 깨어난다.
“미안하네. 내가 마법사의 깊은 잠에서 자네를 깨우고 말았네.”
이는 천지개벽(天地開闢)할 사건이 도래했다는 증거다.
초희가 눈을 부릅뜨고는 사임당 할머니를 뚫어지게 본다. 그러다 그만 소름이 돋다 못해 얼음으로 굳어버리고 만다. 사임당은 초희의 등을 토닥토닥 쓰다듬어 주시면서 긴박하게 말을 전한다.
“어서 가시게. 자네 추모 현 다례가 거행되고 있는 강릉 초당으로.”
― 「6장 두 여류작가의 만남」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