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6834059
· 쪽수 : 264쪽
· 출판일 : 2025-02-03
책 소개
목차
추천사
파랑이 일고
감사의 말
작품해설 | 오지 않은 파랑을 기다리며 _임지훈(문학평론가)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번호표가 붙은 아이들이 하나둘 화물차에 기어오른다. 떠들거나 장난치는 아이는 당연히 없다. 앞서 탄 아이들은 졸고들 있다. 그 틈을 헤집으며 자리를 잡느라 곳곳에서 쇳소리가 터진다. 차들 뒤로 길게 드리워진 줄이 점점 짧아진다. 차가 야금야금 아이들을 씹어 삼키는 동안, 내 가까이에서 운전사가 서성이다가 연필로 명부를 탁탁 내리친다. 그러며 손목시계를 본다. 손전등이 내리쏘는 빛을 받은 황금 시곗줄이 금가루를 이리저리로 튕긴다. 다른 운전사가 양손을 치키며 아직이냐고 묻는다.
“쥐 새끼 한 마리가 모자라!”
“땅에 떨어진 열매는! 줍지도, 밟지도, 먹지도 않는다!”
무슨 구호처럼 세 번이나 외친다. 떨어진 열매는 상품 가치는 없으나 흙에는 다시없이 훌륭한 양분이라고 운전사는 늘어놨다. 우리랑 상관없는 말만 떠들어 댔다. 밭에 있는 그 무엇도 입에 넣지 말라고, 자기들이 제공하는 음식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확성기의 째지는 소음으로 뇌에서 전기 불꽃이 튄다. 징그러운 열매만 가득한데, 밭에 뭐 먹을 게 있다고! 키 작은 아이들이 따지 못한 열매는, 다음번에 키 큰 아이들이 수확하란다.
제멋대로 춤추는 다리를 이끌고 기계적으로 빈 통을 채워 나간다. 가시가 박혀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아까까지만 해도, 너무 따갑다고 집에 가고 싶다고 투덜대는 말소리도 흐느낌도 가끔가다 들렸다. 하지만 총성이 울린 뒤로 조용하다. 삭삭삭삭, 나무 사이를 지나는 소리만 밭에 퍼진다. 삭삭삭삭, 우리는 지워지고 노란 번호표에 새겨진 까만 숫자들만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