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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예술/대중문화 > 영화/드라마 > 영화사
· ISBN : 9791166850882
· 쪽수 : 476쪽
· 출판일 : 2022-04-20
책 소개
목차
머리말: 천리귀안千里歸雁__v
제1장 대만 역사 및 영화 문화산업의 근원
제1절 대만 역사와 대만해협을 뛰어넘은 흑수구 전설
제2절 대만인들의 여가문화와 영화의 첫 울음소리
제3절 초창기 대만영화의 시대적 상황
제2장 대만영화의 모태인 대만어 자국영화 시대
제1절 일본식민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혼성적인 대만영화
제2절 대만 사람들의 풀뿌리 의식 각성
제3절 대만어를 사용한 영화의 상징적 의미
제3장 계엄 시기의 스산한 기운과 온화적 분위기
제1절 대만영화의 문화적 근원인 중원 문화
제2절 표준 중국어 영화: 종족 융합과 문화 충돌의 느낌표
제3절 번영의 끝: 영화 황금기가 지난 후의 내일
제4장 유럽 및 미국 영화의 문화적 충격에서 벗어나는 대만의 ‘신영화(新電影)’
제1절 영화적 정체와 획기적인 혁신
제2절 신세대 영화인의 철학과 창작
제3절 ‘신영화(新電影)’의 사명: 새로움의 승계
제5장 20세기 말 대만영화에 투영된 빛과 그림자
제1절 신(新)영화 후광 뒤의 숙명적인 운명
제2절 단절이 생긴 대만영화 및 중국영화의 부상
제3절 온 힘을 다하는 대만영화인의 노력들
제4절 세기말의 우울한 그림자:
임계점에서의 우아한 몸놀림
제6장 신세대 대만영화의 정신상태 및 문화언어 환경
제1절 신구 세대에서 대만영화의 상징적 의미
제2절 대만영화의 문예부흥: 후신영화(後新電影)
제3절 대만 현대 인문의 특성: 영화문화의 새로운 언어 환경
제4절 대만영화의 활로 및 미래 전망
제7장 맺음말
▪참고문헌
▪부록 1: 대만영화제작자/감독/배우
▪부록 2: 대만의 주요 영화제
▪부록 3: 대만의 역사
▪감사의 말
▪역자 후기
책속에서
제1장 대만 역사 및 영화 문화산업의 근원
1절 대만 역사와 대만해협을 뛰어넘은 흑수구 전설
역사를 중시하는 대만 정부는 ‘원주민의 날’을 정하며 대만 역사의 근원을 복원한다. 역사와 문화는 그 민족의 오랜 기간의 전통 풍습 및 관습을 계승하고, 하늘과 땅에 대한 경외와 인문에 관한 관심을 품으며, 신격화를 거쳐 상징화된 기호가 된다. 현재 대만의 종친(宗親), 민족단체, 당파들은 서로 앞다투어 보물섬의 개척자라고 자처하지만, 유일하게 높은 산과 우뚝 선 봉우리를 지키는 ‘산지 동포’만 예외다. 현재는 역사적 맥락을 복원하면서 ‘원주민’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린다.
1960년대 대만의 유적 발굴을 시작한 이후, 고고학자들은 팔리(八里) 대분갱(大坌坑)을 중국의 화남(華南), 동남 연해의 ‘대분갱 문화’와 비교하며, 대만의 선사시대 인류의 모습을 밝혀낸다. 또한, 중국 및 해외 언어학자들은 오스트로네시아(Austronesia) 역사를 조사 및 연구하면서 대만을 오스트로네시아의 수도로 추정한다. 자료에 의하면, 4백 년 역사뿐인 대만은 오스트로네시아 언어의 분포지이며, 남태평양 군도로 확산하는 연결고리이다. 고대 언어를 연구한 언어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대만의 다양한 원주민의 섬 내에서 이동 경로를 추적해보면, 원주민의 선조는 6천 년 전에 대만으로 온 것으로 추정되며, 중부 산악지대를 거점으로 섬 전체로 점차 퍼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당시 건너오지 못한 일부 사람들은 이후 천년이 지난 후 이루지 못한 꿈을 위해 대만으로 넘어왔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대해 전문가들은 한 발 더 나아가 오스트로네시아 종족의 혈연관계를 탐구하고 있지만, 복잡하고 조그마한 별점 같은 섬의 흐름을 단시간 내에 결론 내릴 수 없다.
2011년 12월 고고학계에 따르면, 중국과 대만해협 양안 관련 단체의 협조하에 대만 중앙연구원은 마조(馬祖) 군사관제구역 양도(亮島)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7,900년 전의 유골을 발견하여, 이를 ‘양도인(亮島人, liangdao man)’이라 명한다. 고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유골을 접어 장사를 지내는 방식 덕분에, 그 유골은 온전했고, 몸 형태도 뚜렷하게 감식할 수 있었다. 이 발견은 고고 역사의 다양한 분야를 재수정하게끔 한다. 또한, 대만에서 발견한 최초의 사람 해골일 뿐만 아니라, 중국 남부 복건성(福建省)에 있는 민강(閩江) 유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신석기 시대의 유골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오스트로네시아 언어권에서 가장 빠른 시기의 유골일 가능성이 크다.
1970년대에 주목을 받은 ‘오스트로네시아 기원론’으로 말하자면, 해양 기원론이나 대륙 기원론을 막론하고, 지금까지 양쪽에서의 논쟁은 끊임없이 지속된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대만은 확실히 중요한 지역이다. 원주민들은 그 이전과 이후에 대만에 정착했다. 그들은 성품이 강하고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나 흉악하며, 행패 부리며 사람을 죽이는 악습이 바람직하지 않지만, 산림 속의 용사이다. 유적과 자료를 통해 분석해보면, 수만 년 전에 이미 대만에는 인류의 종적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양도인’의 출현은 기원론에 새로운 근거가 되었고, 5,000~6,000년 전 원주민 부락 형태의 흔적을 2,000년 더 앞당겨주었다.
지리 면적이 36,006km2인 대만은 지각판의 이동, 융기 등으로 인해 저/중/고 해발의 혼합형 기후를 띤다. 하늘이 베푼 독특한 환경 속에서, 활화석 어류(活化石魚類), 타이베이 송장개구리(Rana taipehensis), 푸른 바다거북, 물사슴, 문자크(Reeves's muntjac) 등 희귀 야생동물들이 살고 있다. 외국 기자들에 따르면, “섬 전체의 산맥 양쪽에는 녹나무(樟樹)로 덮여 있고, 이 토지들은 주로 원주민 소유로 되어있기에, 중국인은 반드시 부락 추장에게 공납품을 바쳐야 채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포르모사(Formosa)라는 아름다운 지명 외에, 중국 바다에서 어획 생산이 가장 풍부하여 봉래선도(蓬萊仙島)라고 부른다.”이 문구는 아름다운 섬과 원주민에 대한 가장 적절한 주석이다.
17세기 초기에 자주적 공간이었던 대만은 동아시아 상업무역 권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 명나라와 외적들의 밀수하는 노선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대만은 포르투갈에 먼저 점령당하면서 침략의 역사가 시작된다. 잇따라 네덜란드와 스페인도 들어온다. 네덜란드는 대남에서 안평(安平)을 건립하고(안평은 네덜란드 문자로 Tayouan, 즉 대만을 지칭), 1627년에 안평고보(安平古堡)로 이름을 변경한다. 이후 1642년에 기륭(基隆)과 담수(淡水)에 거주하던 스페인 사람들을 쫓아버리고, 섬을 차지하여 식민지로 만든다. 그 영향으로 한족(漢族)이 대만에 건너가 대만을 개척하고, 기독교 선교 및 문자를 가르칠 수 있게 된다. 네덜란드인과 원주민의 협조하에 작성된 1650년까지의 ‘원주민부락 호구표(番社户口表)’에 따르면, 인구수는 약 6만여 명, 섬 전체의 40~50%를 차지한다. 네덜란드 통치 말기에, 한족 이민들의 사회구조 덕분에 약 5만 명의 한인이 거주한다. 명나라 정성공(鄭成功)이 성공적으로 대만을 차지한 이후에는 한인 인구가 원주민 인원수를 초과하여 백만에 달한다. 1683년, 명나라가 청나라 강희(康熙)에게 패배를 당해, 대만은 이제 중국 국가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