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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제목 : 형이상학적 동물들 (폐허 위에서 다시 인간을 불러낸 네 철학자의 기록)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철학 일반 > 교양 철학
· ISBN : 9791166893858
· 쪽수 : 568쪽
· 출판일 : 2025-11-28
· 분류 : 국내도서 > 인문학 > 철학 일반 > 교양 철학
· ISBN : 9791166893858
· 쪽수 : 568쪽
· 출판일 : 2025-11-28
책 소개
전쟁과 혼란 속에서 철학을 인간의 삶으로 되돌린 네 여성 철학자의 사유를 따라가며, 오늘의 세계가 잃어버린 윤리적 감각을 회복하도록 이끄는 통찰의 기록이다. 인간과 의미, 행위와 책임의 본질을 다시 묻게 하는 책이다.
★《뉴요커》 올해의 책
★《뉴욕 타임스》 올해의 책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최종 후보작
★영국 역사작가협회 논픽션 크라운상
“인간은 어떤 동물인가?”
이 물음 앞에서 역사는 다시 시작된다
20세기 중반,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잿더미가 된 순간 철학은 침묵했다.
형이상학의 종말을 선언한 논리실증주의는 인간의 실존적 고통과 도덕적 혼란 앞에서는 무력했다. 이성의 이름으로 문명을 구축해 온 인간은 세계대전으로 인한 학살과 파괴 앞에서 스스로의 정의를 잃었고, 언어와 논리로는 인간의 파괴를 설명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옥스퍼드의 네 젊은 여성 철학자, 엘리자베스 앤스콤, 필라파 풋, 메리 미즐리, 아이리스 머독은 무너진 세계 앞에서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인간은 어떤 동물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개념을 정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철학을 삶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곧 삶의 가장 깊은 자리로 뻗어나갔다. “인간의 행위는 어떻게 의미를 얻는가?” “책임은 무엇으로 성립되는가?” “악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이 네 사람은 이러한 질문들을 폭격으로 부서진 거리, 배급표를 들고 줄을 서는 일상 위에서 그리고 우정과 사랑, 상실이 겹쳐지는 관계 속에서 붙들었다.
그들의 질문은 철학을 다시 인간의 삶으로 끌어오며, 인간의 실존과 연결시켰다. 인간은 세계를 해석하고, 의미를 만들며, 스스로의 삶을 그려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비인간적인 시대에 그 누구보다 분명하게 직시했기에 이룬 성취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시 그 물음 앞에 서 있다. 전쟁이 반복되고, 기술이 인간의 판단을 대체하며, AI와 알고리즘이 ‘의미’를 산출해 내는 시대에,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인간은 무엇을 기준으로 행동하고, 어떻게 타인을 바라보며, 어떤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가?
네 철학자의 사유는 지금의 세계가 잃어버린 윤리적 감각을 되살리는 첫 불씨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과거를 되짚는 기록이 아니라, 인간성이 위협받는 시대에 우리가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를 증언하는 가장 절박한 선언이다.
형이상학이 종말을 맞은 시대,
전쟁과 학살의 폐허 위에서 피어난 네 여성 철학자들
근대 과학이 세계를 설명하는 거의 유일한 언어가 되고, 20세기 초 논리실증주의와 분석 철학(analytic philosophy)이 철학의 무대를 장악하면서, 한때 형이상학은 ‘끝난 학문’으로 선언되었다. 신과 영혼, 선과 악, 인간과 세계의 궁극적 구조를 묻던 질문은 ‘경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공허한 말장난’으로 밀려났고, 도덕과 윤리의 문제는 심리학과 사회과학, 정책 논의 속으로 흩어졌다.
‘자연학 다음에 오는 것’이라는 뜻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의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형이상학은 흔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철학’으로 이해되지만, 사실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믿고 무엇에 책임져야 하는지를 묻는, 철학의 가장 오래된 질문들의 이름이다. 이 오래된 질문은 20세기 중반 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전쟁은 인간을 이해하는 기존의 모든 기준을 붕괴시켰고, 논리실증주의, 분석 철학에 의해 공고했던 언어의 명료성만으로는 아우슈비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폭격으로 드러난 인간의 악과 책임을 설명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형이상학은 추상적 논의가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다시 살아가야 하는지 묻는 가장 현실적인 사유가 되었다.
1939년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옥스퍼드 대학교는 거대한 빈 공간이 되었다. 남성 교수와 학생 대부분이 징집되면서 비워진 강의실과 도서관에는 뜻밖의 얼굴들이 들어섰다. 여성들, 양심적 병역 거부자, 노교수와 유럽 곳곳에서 흘러들어온 망명 학자들이다. 이들은 곧 자신들이 마주한 철학의 현실(언어 분석과 검증 가능성만을 좇으며 인간의 삶을 외면하던 철학)에 깊은 불만을 느꼈다. 선과 악, 책임과 같은 개념은 “의미가 없다”라는 이유로 삭제되었고, 도덕적인 판단은 개인적 기호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틈에서 네 명의 여성, 엘리자베스 앤스콤, 필리파 풋, 메리 미즐리, 아이리스 머독은 전혀 다른 방향의 사유를 열기 시작했다.
앤스콤은 인간 행위의 근본 구조를 파고들며 “의도”와 “도덕적 실재”를 복원했고, 갑작스러운 직관주의 붕괴 앞에서 윤리학이 다시 서야 할 자리를 제시했다. 풋은 전쟁 사진 앞에서 “우리는 왜 이것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가?”라는 물음을 붙잡으며 덕·품성·책임의 윤리를 되살렸다. 풋이 제안한 ‘트롤리 문제’는 도덕적 판단의 구조를 다시 묻는 전환점이 되었다.
미즐리는 인간을 단순한 본능적 기계로 축소하는 과학주의에 맞서, 인간을 동물·생물·사회적 존재로 통합해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윤리학은 생물학·철학·심리학이 만나는 생생한 학문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사유였다. 머독은 도덕의 중심을 ‘주의(attention)’와 ‘상상력’에 두며, 우리가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곧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가는가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 네 사람은 서로의 사유와 삶에 깊이 스며들며, 논리실증주의가 ‘의미가 없다’라며 쫓아낸 영역을 다시 철학의 중심으로 가져왔다. 악, 폭력, 책임, 사랑, 관심, 주의 같은 개념은 그들의 토론 속에서 다시 숨을 얻었고, 도덕 철학과 형이상학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복권되었다. 이 책이 포착하는 것은 바로 그 폐허의 한가운데서 네 여성이 새로운 윤리학의 지형을 세워 올린 순간들이다.
“우리는 형이상학적 동물이다”
철학에 숨을 불어넣은 사유의 연대기
네 여성 철학자의 사유는 결코 고립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걸어 들어간 전시 옥스퍼드는 다양한 지성이 부딪히고 얽히는 거대한 직조물과 같았다. 그 중심에서 엘리자베스 앤스콤은 비트겐슈타인의 신뢰를 받으며 그의 가장 중요한 유산인 《철학적 탐구》를 번역하고 정리했다. 신의 예지, 정의로운 전쟁, 몸의 동일성 같은 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리던 엘리자베스는 ‘정말로 고민하는 학생’을 원했던 비트겐슈타인에게 거의 유일한 진짜 대화 상대였고, 비트겐슈타인은 유언으로 미출간 저작의 저작권과 재산의 상당 부분을 그녀에게 남기며, 자신의 철학적 유산을 맡겼다. 이 긴밀한 교류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를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철학적 입지를 단단히 세워나갔다.
그 철학이 어떻게 현실로 이어지는지는 1956년 장면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해, 앤스콤은 옥스퍼드 교원들 앞에서 히로시마·나가사키 폭격을 명령한 미국 전 대통령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해서는 안 된다고 공개적으로 반대한다. 죄 없는 수만 명을 이르게 한 행위가 어떻게 ‘명예’와 양립할 수 있는가? 그녀에게는 너무나 자명한 이 판단을 왜 다른 교수들은 보지 못하는가? 앤스콤은 자신의 관점을 관철시키기 위해 거의 홀로 분투했고, 이것은 인간의 행위, 의도, 도덕적 실재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 했던 그녀의 철학이 현실 속에서 발화된 순간이었다.
이 네 철학자의 주변에는 더욱 풍성한 사유의 연대가 있었다. 영국 최초의 여성 철학 교수 수전 스테빙(Susan Stebbing)은 명료한 사고의 중요성을 일깨워 후배 여성 철학자들의 지적 기반을 다졌다. 도로시 에밋(Dorothy Emmet)은 도덕 판단이 단순한 직관이 아니라 우리가 선하다고 믿는 관계, 삶의 방식에서 비롯된다고 보며 윤리학의 현실적 토대를 제시했다. 역사·상상·실천의 문제를 함께 사유한 R. G. 콜링우드(Collingwood)는 세계의 질서와 경험 자체가 형이상학의 주제임을 보여주었고, 도널드 맥키넌(Donald MacKinnon)은 A. J. 에이어(Ayer)식 논리실증주의가 형이상학을 지우는 순간 인간이라는 동물의 영혼이 위협받는다고 경고했다. 이 모든 흐름은 J. L. 오스틴(Austin), A. J. 에이어가 주도하던 분석 철학의 엄격함과 긴장감을 이루며 당시 옥스퍼드의 철학 구조를 형성했다. 이 밖에도 당시 형이상학의 불씨를 잃지 않고 지켜낸 철학자들이 있다. H. H. 프라이스(Price), H. W. B. 조지프(Joseph), 로테 라보프스키(Carlotta Labowsky), 메리 글로버(Mary Glover).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이 시대의 철학적 지형을 떠받친 중요한 이름들이다.
이렇게 다져진 토대 위에서 네 사람의 대화는 넓고도 깊었다. 엘리자베스의 집과 필리파의 부엌, 서머빌과 세인트 앤 칼리지의 강의실, 크라이스트처치의 공원, 술집이나 찻집을 오가며 이들은 기억과 진리, 의미를 두고 끝없이 토론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에서 데카르트, 칸트, 키르케고르 그리고 비트겐슈타인까지, 고전과 현대를 가로지르는 이름들이 네 사람의 대화 속에서 다시 인간의 삶과 맞닿은 질문으로 되살아났다. 《형이상학적 동물들》은 바로 이 방대한 관계망을 촘촘히 복원하며, 철학이 책상 위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우정과 논쟁 한가운데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어떻게 다시 인간이 되는가?”
AI와 전쟁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는 질문들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전쟁은 더 이상 먼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우크라이나 전쟁, 미얀마 내전, 아프리카 지역의 소리 없는 분쟁들까지, 전쟁과 파괴는 현재에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가져다주는 효율을 통해 인간은 편리함을 얻는 대신 점점 더 위기에 처했다. AI 시대 가장 큰 문제점은 인간이 더 이상 책임과 숙고의 과정 자체를 경험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AI와 알고리즘은 세계를 ‘측정 가능한 정보’로 축소시킨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가?” “타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고통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는 애초에 측정할 수 없는 인간의 복잡한 영역이다. 그럼에도 AI와 알고리즘이 인간의 숙고와 판단을 처리하고 ‘의미’마저 산출해 낸다. 그 결과 ‘인간다움’은 점점 흐려지고, 그 기준조차 모호해지고 있다. 그 여파는 관계와 책임,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의 중요성을 희미하게 만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의 질문들은 놀랍도록 현재와 맞닿아 있다.
이 책이 보여주는 핵심은 단 하나다. 인간의 도덕적 사유는 고요하고 정돈된 탁상에서가 아니라, 세계의 균열과 삶의 복잡성 속에서 시작된다는 것.
네 여성 철학자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인간의 행위와 의미 책임을 다시 붙들었듯 전쟁 중에 그 사유를 했던 남성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리처드 헤어(Richard Hare)다. “전쟁이 없었다면 철학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의 고백은, 할복하는 일본군 포로들, 죽음으로 몰려가는 포로들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감독관의 장면을 마주한 뒤였다. 그는 그 순간 깨달았다. ‘옳음’과 ‘그름’은 직관이나 감정의 문제가 아니며, 기존의 윤리 이론은 이 현실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리처드 헤어는 “도덕적 직관이 객관적인 도덕 현실에 조응한다면, 그런 극명하고 극복할 수 없는 직관의 충돌은 가능하지 않아야 한다(p. 303)”라고 생각했다. 이 깨달음은 네 여성 철학자가 당도한 물음과 정교하게 맞물린다.
전쟁은 도덕적 직관을 무너뜨렸고, 기술은 판단의 구조를 흔들었으며, 효율과 공정성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복잡성을 삭제하는 사회적 기조는 돌봄과 관계의 감각마저 약하게 만들고 있다. 엘리자베스 앤스콤은 당시에도 이 지점을 분명하게 짚는다. 엘리자베스 앤스콤은 전후 복지 체계가 “형이상학적 설명을 바탕으로 하는 ‘정의’와 ‘관용’의 목표는 사라지고(p. 427)” ‘효율’ ‘공정성’ ‘공공복지’라는 이름으로 돌봄의 감각을 지워버리는 당시를 비판했다. 홀로 사는 노인이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에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형이상학이 제거된 윤리라고 주장했다. “악한 이들의 온정은 잔인하다(p. 427)”라는 엘리자베스의 말은 오늘의 사회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효율성, 생산성, 편리성, 공정성 같은 가치가 인간의 삶과 관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순간, 돌봄과 책임의 윤리는 삭제된다.
“위대한 유럽 철학자들은 거의 모두 미혼 남성이었다.(p. 431)” 메리 미즐리의 이 지적은 철학이 어떤 경험들을 배제한 채 구축되었는지를 드러낸다. 아기가 옆방에서 잠드는 동안 글을 쓰는 철학자, 젖먹이 아이의 건강을 걱정하는 엄마, 다채로운 공동체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철학을 했다면, 철학이 지금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메리 미즐리의 물음도 돌봄과 관계성, 상처와 책임,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철학적 사유의 조건임을 보여준다. 이는 오늘의 세계가 완전히 잃어버린 감각이기도 하다. AI가 판단을 대신하고 기술이 욕망을 설계하며, 전쟁과 폭력이 일상을 뒤흔드는 시대에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끼며, 어떤 존재가 되어갈 것인가?”
네 철학자의 사유는 이처럼 이 시대에 필요한 윤리적 감각을 되묻는 출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과거의 철학사를 복원한 연대기가 아니라, 인간성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철학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가장 동시대적인 선언이다.
“철학을 다시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 사유의 연대기”
《전미도서비평가협회》
“이 책의 주인공들이 ‘인간의 삶, 행위, 인식’을 도덕과 다시 연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 오늘날에도 여전히 깊은 의미를 지닌다.”
《뉴요커》
“거부할 수 없이 매혹적이다… 지적 역사의 중요한 한 장면을 생생하게 되살리며, 이 잊을 수 없는 여성들과 동시대를 살았다는 사실이 다시금 감사하게 느껴진다.”
《런던 리뷰 오브 북스》
★《뉴욕 타임스》 올해의 책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최종 후보작
★영국 역사작가협회 논픽션 크라운상
“인간은 어떤 동물인가?”
이 물음 앞에서 역사는 다시 시작된다
20세기 중반,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잿더미가 된 순간 철학은 침묵했다.
형이상학의 종말을 선언한 논리실증주의는 인간의 실존적 고통과 도덕적 혼란 앞에서는 무력했다. 이성의 이름으로 문명을 구축해 온 인간은 세계대전으로 인한 학살과 파괴 앞에서 스스로의 정의를 잃었고, 언어와 논리로는 인간의 파괴를 설명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옥스퍼드의 네 젊은 여성 철학자, 엘리자베스 앤스콤, 필라파 풋, 메리 미즐리, 아이리스 머독은 무너진 세계 앞에서 가장 오래되고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인간은 어떤 동물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개념을 정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철학을 삶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곧 삶의 가장 깊은 자리로 뻗어나갔다. “인간의 행위는 어떻게 의미를 얻는가?” “책임은 무엇으로 성립되는가?” “악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이 네 사람은 이러한 질문들을 폭격으로 부서진 거리, 배급표를 들고 줄을 서는 일상 위에서 그리고 우정과 사랑, 상실이 겹쳐지는 관계 속에서 붙들었다.
그들의 질문은 철학을 다시 인간의 삶으로 끌어오며, 인간의 실존과 연결시켰다. 인간은 세계를 해석하고, 의미를 만들며, 스스로의 삶을 그려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비인간적인 시대에 그 누구보다 분명하게 직시했기에 이룬 성취였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시 그 물음 앞에 서 있다. 전쟁이 반복되고, 기술이 인간의 판단을 대체하며, AI와 알고리즘이 ‘의미’를 산출해 내는 시대에,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인간은 무엇을 기준으로 행동하고, 어떻게 타인을 바라보며, 어떤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가?
네 철학자의 사유는 지금의 세계가 잃어버린 윤리적 감각을 되살리는 첫 불씨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과거를 되짚는 기록이 아니라, 인간성이 위협받는 시대에 우리가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를 증언하는 가장 절박한 선언이다.
형이상학이 종말을 맞은 시대,
전쟁과 학살의 폐허 위에서 피어난 네 여성 철학자들
근대 과학이 세계를 설명하는 거의 유일한 언어가 되고, 20세기 초 논리실증주의와 분석 철학(analytic philosophy)이 철학의 무대를 장악하면서, 한때 형이상학은 ‘끝난 학문’으로 선언되었다. 신과 영혼, 선과 악, 인간과 세계의 궁극적 구조를 묻던 질문은 ‘경험으로 증명할 수 없는 공허한 말장난’으로 밀려났고, 도덕과 윤리의 문제는 심리학과 사회과학, 정책 논의 속으로 흩어졌다.
‘자연학 다음에 오는 것’이라는 뜻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의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형이상학은 흔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철학’으로 이해되지만, 사실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믿고 무엇에 책임져야 하는지를 묻는, 철학의 가장 오래된 질문들의 이름이다. 이 오래된 질문은 20세기 중반 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전쟁은 인간을 이해하는 기존의 모든 기준을 붕괴시켰고, 논리실증주의, 분석 철학에 의해 공고했던 언어의 명료성만으로는 아우슈비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폭격으로 드러난 인간의 악과 책임을 설명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형이상학은 추상적 논의가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다시 살아가야 하는지 묻는 가장 현실적인 사유가 되었다.
1939년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옥스퍼드 대학교는 거대한 빈 공간이 되었다. 남성 교수와 학생 대부분이 징집되면서 비워진 강의실과 도서관에는 뜻밖의 얼굴들이 들어섰다. 여성들, 양심적 병역 거부자, 노교수와 유럽 곳곳에서 흘러들어온 망명 학자들이다. 이들은 곧 자신들이 마주한 철학의 현실(언어 분석과 검증 가능성만을 좇으며 인간의 삶을 외면하던 철학)에 깊은 불만을 느꼈다. 선과 악, 책임과 같은 개념은 “의미가 없다”라는 이유로 삭제되었고, 도덕적인 판단은 개인적 기호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틈에서 네 명의 여성, 엘리자베스 앤스콤, 필리파 풋, 메리 미즐리, 아이리스 머독은 전혀 다른 방향의 사유를 열기 시작했다.
앤스콤은 인간 행위의 근본 구조를 파고들며 “의도”와 “도덕적 실재”를 복원했고, 갑작스러운 직관주의 붕괴 앞에서 윤리학이 다시 서야 할 자리를 제시했다. 풋은 전쟁 사진 앞에서 “우리는 왜 이것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가?”라는 물음을 붙잡으며 덕·품성·책임의 윤리를 되살렸다. 풋이 제안한 ‘트롤리 문제’는 도덕적 판단의 구조를 다시 묻는 전환점이 되었다.
미즐리는 인간을 단순한 본능적 기계로 축소하는 과학주의에 맞서, 인간을 동물·생물·사회적 존재로 통합해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윤리학은 생물학·철학·심리학이 만나는 생생한 학문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사유였다. 머독은 도덕의 중심을 ‘주의(attention)’와 ‘상상력’에 두며, 우리가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곧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어가는가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 네 사람은 서로의 사유와 삶에 깊이 스며들며, 논리실증주의가 ‘의미가 없다’라며 쫓아낸 영역을 다시 철학의 중심으로 가져왔다. 악, 폭력, 책임, 사랑, 관심, 주의 같은 개념은 그들의 토론 속에서 다시 숨을 얻었고, 도덕 철학과 형이상학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방식으로 복권되었다. 이 책이 포착하는 것은 바로 그 폐허의 한가운데서 네 여성이 새로운 윤리학의 지형을 세워 올린 순간들이다.
“우리는 형이상학적 동물이다”
철학에 숨을 불어넣은 사유의 연대기
네 여성 철학자의 사유는 결코 고립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걸어 들어간 전시 옥스퍼드는 다양한 지성이 부딪히고 얽히는 거대한 직조물과 같았다. 그 중심에서 엘리자베스 앤스콤은 비트겐슈타인의 신뢰를 받으며 그의 가장 중요한 유산인 《철학적 탐구》를 번역하고 정리했다. 신의 예지, 정의로운 전쟁, 몸의 동일성 같은 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리던 엘리자베스는 ‘정말로 고민하는 학생’을 원했던 비트겐슈타인에게 거의 유일한 진짜 대화 상대였고, 비트겐슈타인은 유언으로 미출간 저작의 저작권과 재산의 상당 부분을 그녀에게 남기며, 자신의 철학적 유산을 맡겼다. 이 긴밀한 교류 속에서 엘리자베스는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를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철학적 입지를 단단히 세워나갔다.
그 철학이 어떻게 현실로 이어지는지는 1956년 장면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해, 앤스콤은 옥스퍼드 교원들 앞에서 히로시마·나가사키 폭격을 명령한 미국 전 대통령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해서는 안 된다고 공개적으로 반대한다. 죄 없는 수만 명을 이르게 한 행위가 어떻게 ‘명예’와 양립할 수 있는가? 그녀에게는 너무나 자명한 이 판단을 왜 다른 교수들은 보지 못하는가? 앤스콤은 자신의 관점을 관철시키기 위해 거의 홀로 분투했고, 이것은 인간의 행위, 의도, 도덕적 실재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 했던 그녀의 철학이 현실 속에서 발화된 순간이었다.
이 네 철학자의 주변에는 더욱 풍성한 사유의 연대가 있었다. 영국 최초의 여성 철학 교수 수전 스테빙(Susan Stebbing)은 명료한 사고의 중요성을 일깨워 후배 여성 철학자들의 지적 기반을 다졌다. 도로시 에밋(Dorothy Emmet)은 도덕 판단이 단순한 직관이 아니라 우리가 선하다고 믿는 관계, 삶의 방식에서 비롯된다고 보며 윤리학의 현실적 토대를 제시했다. 역사·상상·실천의 문제를 함께 사유한 R. G. 콜링우드(Collingwood)는 세계의 질서와 경험 자체가 형이상학의 주제임을 보여주었고, 도널드 맥키넌(Donald MacKinnon)은 A. J. 에이어(Ayer)식 논리실증주의가 형이상학을 지우는 순간 인간이라는 동물의 영혼이 위협받는다고 경고했다. 이 모든 흐름은 J. L. 오스틴(Austin), A. J. 에이어가 주도하던 분석 철학의 엄격함과 긴장감을 이루며 당시 옥스퍼드의 철학 구조를 형성했다. 이 밖에도 당시 형이상학의 불씨를 잃지 않고 지켜낸 철학자들이 있다. H. H. 프라이스(Price), H. W. B. 조지프(Joseph), 로테 라보프스키(Carlotta Labowsky), 메리 글로버(Mary Glover).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이 시대의 철학적 지형을 떠받친 중요한 이름들이다.
이렇게 다져진 토대 위에서 네 사람의 대화는 넓고도 깊었다. 엘리자베스의 집과 필리파의 부엌, 서머빌과 세인트 앤 칼리지의 강의실, 크라이스트처치의 공원, 술집이나 찻집을 오가며 이들은 기억과 진리, 의미를 두고 끝없이 토론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에서 데카르트, 칸트, 키르케고르 그리고 비트겐슈타인까지, 고전과 현대를 가로지르는 이름들이 네 사람의 대화 속에서 다시 인간의 삶과 맞닿은 질문으로 되살아났다. 《형이상학적 동물들》은 바로 이 방대한 관계망을 촘촘히 복원하며, 철학이 책상 위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우정과 논쟁 한가운데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어떻게 다시 인간이 되는가?”
AI와 전쟁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는 질문들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전쟁은 더 이상 먼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우크라이나 전쟁, 미얀마 내전, 아프리카 지역의 소리 없는 분쟁들까지, 전쟁과 파괴는 현재에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가져다주는 효율을 통해 인간은 편리함을 얻는 대신 점점 더 위기에 처했다. AI 시대 가장 큰 문제점은 인간이 더 이상 책임과 숙고의 과정 자체를 경험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AI와 알고리즘은 세계를 ‘측정 가능한 정보’로 축소시킨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가?” “타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고통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는 애초에 측정할 수 없는 인간의 복잡한 영역이다. 그럼에도 AI와 알고리즘이 인간의 숙고와 판단을 처리하고 ‘의미’마저 산출해 낸다. 그 결과 ‘인간다움’은 점점 흐려지고, 그 기준조차 모호해지고 있다. 그 여파는 관계와 책임,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의 중요성을 희미하게 만든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의 질문들은 놀랍도록 현재와 맞닿아 있다.
이 책이 보여주는 핵심은 단 하나다. 인간의 도덕적 사유는 고요하고 정돈된 탁상에서가 아니라, 세계의 균열과 삶의 복잡성 속에서 시작된다는 것.
네 여성 철학자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인간의 행위와 의미 책임을 다시 붙들었듯 전쟁 중에 그 사유를 했던 남성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리처드 헤어(Richard Hare)다. “전쟁이 없었다면 철학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의 고백은, 할복하는 일본군 포로들, 죽음으로 몰려가는 포로들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감독관의 장면을 마주한 뒤였다. 그는 그 순간 깨달았다. ‘옳음’과 ‘그름’은 직관이나 감정의 문제가 아니며, 기존의 윤리 이론은 이 현실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리처드 헤어는 “도덕적 직관이 객관적인 도덕 현실에 조응한다면, 그런 극명하고 극복할 수 없는 직관의 충돌은 가능하지 않아야 한다(p. 303)”라고 생각했다. 이 깨달음은 네 여성 철학자가 당도한 물음과 정교하게 맞물린다.
전쟁은 도덕적 직관을 무너뜨렸고, 기술은 판단의 구조를 흔들었으며, 효율과 공정성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복잡성을 삭제하는 사회적 기조는 돌봄과 관계의 감각마저 약하게 만들고 있다. 엘리자베스 앤스콤은 당시에도 이 지점을 분명하게 짚는다. 엘리자베스 앤스콤은 전후 복지 체계가 “형이상학적 설명을 바탕으로 하는 ‘정의’와 ‘관용’의 목표는 사라지고(p. 427)” ‘효율’ ‘공정성’ ‘공공복지’라는 이름으로 돌봄의 감각을 지워버리는 당시를 비판했다. 홀로 사는 노인이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집에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형이상학이 제거된 윤리라고 주장했다. “악한 이들의 온정은 잔인하다(p. 427)”라는 엘리자베스의 말은 오늘의 사회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효율성, 생산성, 편리성, 공정성 같은 가치가 인간의 삶과 관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순간, 돌봄과 책임의 윤리는 삭제된다.
“위대한 유럽 철학자들은 거의 모두 미혼 남성이었다.(p. 431)” 메리 미즐리의 이 지적은 철학이 어떤 경험들을 배제한 채 구축되었는지를 드러낸다. 아기가 옆방에서 잠드는 동안 글을 쓰는 철학자, 젖먹이 아이의 건강을 걱정하는 엄마, 다채로운 공동체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철학을 했다면, 철학이 지금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메리 미즐리의 물음도 돌봄과 관계성, 상처와 책임,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철학적 사유의 조건임을 보여준다. 이는 오늘의 세계가 완전히 잃어버린 감각이기도 하다. AI가 판단을 대신하고 기술이 욕망을 설계하며, 전쟁과 폭력이 일상을 뒤흔드는 시대에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어떻게 느끼며, 어떤 존재가 되어갈 것인가?”
네 철학자의 사유는 이처럼 이 시대에 필요한 윤리적 감각을 되묻는 출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과거의 철학사를 복원한 연대기가 아니라, 인간성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철학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가장 동시대적인 선언이다.
“철학을 다시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 사유의 연대기”
《전미도서비평가협회》
“이 책의 주인공들이 ‘인간의 삶, 행위, 인식’을 도덕과 다시 연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 오늘날에도 여전히 깊은 의미를 지닌다.”
《뉴요커》
“거부할 수 없이 매혹적이다… 지적 역사의 중요한 한 장면을 생생하게 되살리며, 이 잊을 수 없는 여성들과 동시대를 살았다는 사실이 다시금 감사하게 느껴진다.”
《런던 리뷰 오브 북스》
목차
들어가며 • 7
등장인물 • 20
프롤로그 철학, 권력 앞에 서다 • 23
1956년 5월 옥스퍼드
1장 억눌린 목소리 • 37
1938년 10월 - 1939년 9월 옥스퍼드
2장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 105
1939년 9월 - 1942년 6월 옥스퍼드
3장 절망과 저항 사이 • 167
1942년 6월 - 1945년 8월 케임브리지와 런던
4장 철학의 불꽃을 되살리다 • 231
1945년 9월 - 1947년 8월 옥스퍼드, 브뤼셀, 그라츠, 케임브리지와 치즈윅
5장 한목소리로 “아니”라고 외치다 • 297
1947년 10월 - 1948년 7월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6장 다시 삶으로 • 343
1948년 10월 - 1951년 1월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더블린 & 빈
7장 우리는 형이상학적 동물이다 • 391
1950년 5월 - 1955년 2월 뉴캐슬 & 옥스퍼드
에필로그 끝내 인간을 향하다 • 455
1956년 5월 옥스퍼드
그 후 이야기 • 468
옮긴이의 말 • 475
주 • 478
참고문헌 • 550
그림 출처 • 564
책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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