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미지

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시 > 한국시
· ISBN : 9791168150058
· 쪽수 : 216쪽
· 출판일 : 2021-11-11
책 소개
목차
강우식 하나님·10
고두현 참 예쁜 발·13
고재종 첫 봄나물·16
공광규 놀란 강·19
곽효환 그날·22
권달웅 작은 평화·25
권대웅 햇빛이 말을 걸다·28
김강태 돌아오는 길·32
김남조 부활의 새벽·35
김사인 지상의 방 한 칸·39
김선태 산벚꽃·42
김수복 하늘 우체국·45
김승희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48
김종삼 북치는 소년·52
김종해 눈·55
나태주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58
도종환 은은함에 대하여·61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날·64
문효치 사랑법 I·67
박노해 다시·70
박지웅 매미가 울면 나무는 절판된다·73
박후기 자반고등어·76
반칠환 새해 첫 기적·79
배한봉 지구의 눈물·82
복효근 매화가 필 무렵·86
서정춘 빨랫줄·89
신달자 아버지의 빛·92
신현림 포옹이 주는 위로·95
심상옥 그때 울었다·98
심순덕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102
안도현 스며드는 것·106
오세영 1월·109
오탁번 해피 버스데이·113
위선환 하늘·117
유안진 세한도 가는 길·120
유자효 꽃길·123
유재영 가을 은유·126
이건청 은빛 햇살·129
이근배 살다가 보면 ·132
이기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136
이상국 옥상의 가을·140
이성선 새해의 기도·143
이영춘 해, 저 붉은 얼굴·146
이장희 봄은 고양이로다·150
이재무 고요는 힘이 세다·153
이준관 저녁별·156
이해인 마음을 위한 기도·160
임채성 곰소항·163
장석주 밥·166
장재선 걸레를 위하여·170
장택현 개미들의 행진·173
정일근 어머니의 그륵·176
정현종 방문객·180
정호승 봄길·183
정희성 가을의 시·187
천수호 옥편에서 ‘미꾸라지 추鰍’자 찾기·190
천양희 오후가 길었다·193
최금녀 바람에게 밥 사주고 싶다·197
최동호 배꽃 동산·200
함민복 긍정적인 밥·201
허영자 투명에 대하여 23·206
허형만 영혼의 눈·210
저자소개
책속에서
하나님
강우식(1942∼)
아내를 사랑할 때는 당신을 찾지 않습니다.
아내를 잃으니 하늘에 닿는 슬픔에 당신을 부릅니다.
***
사람은 무언가에 몰두해 있거나 어떤 대상에 빠져 있을 때는 자신의 내면이 가득 차올라서 그것 외 다른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탐닉의 대상 혹은 사랑과 연민의 대상을 잃었을 때, 비탄에 빠지거나 절망감으로 인해 중심을 잃게 되곤 한다. 한동안 그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겠지만 때에 따라서는 절대자를 찾기도 한다. 특히 자신이든 가족이든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옴을 느끼면,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전지전능하신 분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시인은 직설적으로 시의 제목을 ‘하나님’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렇게 분명하게 하나님을 제목으로 정하고 완성된 시는 아주 드물다. 더는 해석이나 유추의 여지가 없는 제목이기에 독자의 상상력은 배제된다. 하지만 1연 2행으로 구성된 짧은 시를 읽으면서 제목은 명시적이지만, 시의 본문은 구체성을 확보하면서도 시의 중요한 특징인 비유의 원리를 잘 적용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이 시를 짓게 된 동기는 아내를 잃은 슬픔이다. 앞과 뒤의 두 행을 대구법으로 배치함으로써, 사랑할 때와 사랑을 잃었을 때의 상황이 확연히 대비된다. 시인이 직접 겪은 가슴 아픈 이별의 경험을 바탕으로 ‘당신’이라는 절대자를 찾고 부르게 된다는 걸 진솔하게 토로함으로써, 독자는 잊었던 소중한 진실 앞에 서게 된다. 그래서 언제 ‘당신’이라는 오직 한 분을 찾게 되느냐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된다.
시의 본문에서 ‘아내’는 화자의 아내이기도 하지만 나의 아내일 수도 있고 가족도 될 수가 있다. 혹은 진정 사랑하는 그 무엇일 수도 있겠다. 어떤 슬픔이 정말 슬픈 슬픔일까. 슬픔의 강도가 저마다 다르겠지만, 시에서 표현된 대로 ‘하늘에 닿는 슬픔’이 가장 큰 슬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슬픔이리라. 이 시는 지극히 단순한 시어들로 구성된 작품이다. 그러나 진리나 진실을 전하는 시에서는 미학적 수사를 되도록 배제하고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신중하게 배치함으로써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 담백한 시 한 편으로 절대자 앞에 설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맞이한다.
참 예쁜 발
고두현(1963∼)
우예 그리 똑같노.
하모, 닮았다 소리 많이 듣제.
바깥 추운데 옛날 생각나나.
여즉 새각시 같네 그랴.
기억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아들 오빠 아저씨 되어
말벗 해드리다가 콧등 뜨거워지는 오후
링거 줄로 뜨개질을 하겠다고
떼쓰던 어머니, 누우신 뒤 처음으로
편안히 주무시네.
정신 맑던 시절
한 번도 제대로 뻗어보지 못한 두 다리
가지런하게 펴고 무슨 꿈 꾸시는지
담요 위에 얌전하게 놓인 두 발
옛집 마당 분꽃보다 더
희고 곱네, 병실이 환해지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무엇일까? 영어 단어 설문조사 결과 1위가 어머니, 2위가 열정, 3위가 미소, 4위가 사랑이라고 한다. 아기는 열 달간 어머니 뱃속에 머무르면서 어머니와 밀착된 상태에서 사랑을 느끼고 말을 배우기 시작한다. 태어나서는 어머니 품에서 줄곧 그런 체험을 하게 된다. 그만큼 어머니는 우리 모두에게 절대적 존재이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삶에 대한 근원적 힘이 된다.
이 시는 시인이 어머니와의 각별한 체험을 바탕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시의 초반 1, 2연은 투박한 사투리로 구성되어 있다. 누가 한 말인지 다음 연을 읽으면 알 수 있다. 평소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을 시에 옮긴 것이다. 시적 화자인 아들은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아들 오빠 아저씨 되어/ 말벗 해드리는” 역할을 한다. 아들이 그렇게 어머니를 간호하다 보니 “콧등 뜨거워지는” 감정을 느낀 것이다. 치매 환자를 돌보기가 무척 힘들다는 건 익히 알려져 있다. 이어지는 다음 행 “링거 줄로 뜨개질을 하겠다고/ 떼쓰던 어머니”를 보면 분명해진다. 한참 떼를 쓰시던 어머니께서 잠이 드신 후, 아들은 치매 걸리시기 전의 어머니를 떠 올린다. 시적 화자의 어머니께서 얼마나 치열하게 생을 사셨는지 “한 번도 제대로 뻗어보지 못한 두 다리”라는 표현에서 짐작한다.
편안히 주무시는 어머니의 발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참 따뜻하다. 세월의 모진 풍상이 서린 주름진 발이 틀림 없을 텐데 그는 “옛집 마당 분꽃보다 더/ 희고 곱”다고 한다. 그래서 “병실이 환해지”는 걸 느끼니 효심이 지극한 아들이다. 시 전반에 흐르는 삶에 대한 긍정적 인식으로 독자는 잊고 있던 가족의 소중함, 특히 모자지간의 정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아늑하고 포근한 시어들을 미학적으로 잘 배치한 시가 닫힌 마음을 열어 주고 끊어진 것을 이어준다. 절실한 경험을 바탕으로 빚어낸 시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의 무늬들을 아름답게 채색하고 있다. 삶에 대한 시인의 깊은 성찰로 사람다운 향기가 무엇인지 되새겨 본다.
첫 봄나물
고재종
얼어붙었던 흙이 풀리는 이월 중순
양지바른 비탈언덕에 눈뜨는 생명 있다
아직도 메마른 잔디 사이로
하얀색 조그만 꽃을 피운 냉이와
다닥다닥 노란색 꽃을 피운 꽃다지와
자주색 동그란 꽃을 층층이 매단 광대나물
저 작은 봄나물들이 첫봄으로 푸르다
저 작은 것들이 지난 가을 싹을 틔워
몇 장의 작은 잎으로 땅에 찰싹 붙어
그 모진 삭풍의 겨울을 살아 넘기고
저렇듯 제일 먼저 봄볕을 끌어모은다
저렇듯 제일 먼저 봄처녀 설레게 한다
냉이 꽃다지 광대나물, 그 크기 워낙 작지만
세상의 하많은 것들이 제 큰 키를 꺾여도
작아서 큰 노여움으로 겨울을 딛고
이 땅의 첫봄을 가져오는 위대함의 뿌리들.
***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던 강추위가 지나갔다. 입춘도 벌써 지나갔고 설도 지나갔으니 이제 곧 봄이 오리라. 마음은 먼저 봄을 기다리는데 여전히 바람은 볼을 때리고 바깥은 냉기가 싸악 감돈다. 그래도 시인은 이맘때 즈음이면 ‘눈뜨는 생명’이 있다고 한다. 아직 땅이 녹지 않아서 저런 곳에서 어떻게 꽃이 필까 싶지만, 시인의 눈은 이미 언 땅에 머무른다. 시인은 사람들이 눈길을 잘 주지 않는 작은 생명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기울인다.
시의 제목이 시선을 붙드는 ‘첫 봄나물’이다. ‘첫’과 ‘봄나물’이 만나 설렘과 약동을 불러일으킨다. 봄나물은 비록 볼품없어 보이지만 봄을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한다. 이 시는 소박한 작은 것들을 소재로 생명의 소중함과 그것의 근원이 되는 뿌리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있다.
“저 작은 봄나물들이 첫봄으로 푸르다”는 시행을 통하여 시를 읽는 독자들의 마음도 어느새 푸르러진다. 봄의 기운을 받아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는 것이다. 작은 것들이 “몇 장의 작은 잎으로 땅에 찰싹 붙어/ 그 모진 삭풍의 겨울을 살아 넘기”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인하여 “저렇듯 제일 먼저 봄볕을 끌어모”으게 되고 “저렇듯 제일 먼저 봄처녀 설레게”하는 봄의 신선한 질감과 리듬을 느끼게 한다.
전반적으로 시상이 감각적으로 생동감 있게 전개되면서 만물이 소생하는 활기찬 봄의 이미지를 잘 전달하고 있다. “세상의 하많은 것들이 제 큰 키를 꺾여도/ 작아서 큰 노여움으로 겨울을 딛고”라는 탁월한 문학적 수사가 이 시의 마지막 견인차 역할을 하면서 긴장미를 살려낸다. 머지않아 봄바람이 불고 메마른 나뭇가지에 싹들이 앞다투어 돋아날 것이다. 봄은 소리로도 오고, 빛으로도 온다. ‘첫 봄나물’ 시를 읽고 나니 입안에 봄맛이 감돈다. 산뜻한 시가 잠자는 감각을 일깨워 온몸에 움이 트는 것 같다. 봄을 캐러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들녘에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