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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8361959
· 쪽수 : 224쪽
· 출판일 : 2022-02-25
책 소개
목차
저자의 말
다만 강한 바람이 불었다
식지 않은 토마토
바람이 사는 숲
나무가 된 남자
꿈꾸는 빛을 살다
시간의 역습
당신 안에 네가 있다
별을 떠난 여행
저자소개
책속에서
웅국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건물 중의 하나인 서울 한복판 중심가에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언젠가 맛집 식당으로 제법 방송을 타자, 전국에서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고 덕분에 매장은 늘 북새통을 이뤘다. 매장은 여느 기업 못지않게 하나둘 체계가 잡혀갔다. 이사에 과장과 부장 또 팀장들까지 조직을 이뤄 나갔고 그는 나름대로 성공한 CEO였다.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어느 날 새로 부임한 젊은 여자 실장이 왔다.
같은 여자가 봐도 가히 감탄할 만한 미모에 몸매가 늘씬하여 그녀가 지나갈 때면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를 바라보느라 넋이 나갈 정도였고 소문이 파다했다.
평소 바람기라고는 찾아야 찾을 수 없었던 사장까지 그런 그녀를 놓칠 리 없었던 것이었을까. 항상 가정적이며 자상했던 그가 점점 변해갔다. 언제부터인지 그가 희숙을 바라볼 때면 마치 들이나 산에 있는 흔한 돌멩이를 보는 듯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변해가는 남편 앞에 희숙은 남편이 변한 이유가 무조건 자신의 탓인 양 더 아름답게 치장했고, 밤이면 더 섹시하게 보이려 최선을 다했다. 그런 노력에도 끄떡없는 남편이었다.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어느 날 미행하기로 했다.
다만 강한 바람이 불었다
1분에 한 병씩 손바닥을 줄지어 스친다. 찬 시멘트 바닥처럼, 어쩌면 익숙한 통증처럼 끝없는 이별을 시도한다. 이곳은 종일 머리카락 한 올마다 온통 과일 향에 절어 있다.
2년 전, 인아는 총 직원이 5인 이하인 영세 식품가공업 회사에 자진해 입사했다. 그녀가 하는 일은 1호부터 5호까지 크기가 다른 둥근 유리병에, 자동으로 세팅된 기계에서 사과, 포도 등 과일 잼이 담기면 바로 이어 라벨을 붙이고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작업이다. 잠시 한눈이라도 팔게 되면 전체적으로 꼬이는 시스템이라 꼼짝없이 몰입해야 한다.
이 업체에 입사하기 전, 이름있는 화장품 회사의 연구원으로 있었다. 정신적인 노동을 했던 인아는 쉽고 단순한 활동이 좋았다. 아무 생각이나 고민 없이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다 식품공장에 취업했고, 몸이 먼저 움직이면 마음이 알아서 따라가는 자연스러움이 좋았다. 대학원 석사 과정까지 마친 인아는 일부러 고졸 학력으로 들어왔고, 비록 육체는 고될지라도 마음은 오히려 개운한 사실이 내내 신기하기만 했다.
일 년의 시간이 훌쩍 흘렀고, 그 사이 팀장이 되었다. 말이 팀장이지 나머지는 대리에 실장, 부장, 사장 등 명함은 하나씩 갖고 있다. 밖에서는 다들 대단한 힘이 있는 줄 안다.
인아는 여느 날처럼 부지런히 일했다. 그런 8월의 말복인 주말이다. 육십의 나이로 턱살이 두터워 줄곧 두겹이 되던 여사장이 늦은 밤에 필시 아무도 모르게 사무실 자동기계 중량 세팅을 다시 했다. 300g, 500g, 1㎏을 10%씩 못 미치게 맞춰 놓고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사장은 평소 지독한 구두쇠라고 소문난 지 오래여서 직원들은 사장과 함께 작업이라도 하는 날엔 수돗물 쓰는 것조차 신경을 써야 했다. 심지어 두루마리 화장지조차 아껴 써야 할 지경이다.
보통 사람은 이 미세한 사실을 저울에 재보지 않는 이상 모를 수밖에 없고, 직원들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미모화장품 회사의 연구원으로 몇 년을 지낸 인아는 금방 직업적인 눈썰미로 알아챌 수 있다. 감각적인 예리함이 여전히 그의 눈과 손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인아는 자신의 업무에 회의를 느낀다. 갑자기 10%씩 감량세팅한 사실이 납득되지 않는 데다가 소비자들에게 그램을 속이면서까지 일하고 싶지 않았다. 인아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이다. 부모가 본인 명의로 마련해 준 25평 되는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던 처지라서 고민에 빠진다. 사장에게 당장 달려가 직접 따지고 싶었다. ‘차라리 조용히 방송사에 신고라도 할까? 직원들에게 다 말해버릴까?’ 하며 한동안 고민하며 망설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개인 사정이란 구실로 퇴사를 했다. 인아는, 적어도 사람이 산다는 것은 진정 혼자 있을 때라도, 자신의 양심에 전혀 거리낌 없이 살려고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사회가 원래 투명할 수 없을 뿐더러 많은 비리와 유혹이 세상 곳곳에 도사려 있음을 나이 서른을 넘긴 그녀가 모를 리 만무했다. 검은 손을 과감히 뿌리치거나, 받아들이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3층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잠시 상념에 잠겼을 때 그녀보다 반년은 일찍 입사한 사루에게서 전화가 왔다.
식지 않은 토마토
“으응. 여, 여보세요? 영수 아니가. 자다 말고 이 밤중에 무슨 일이가.”
“엄마. 어, 엄마. 제 말 좀 잘 들어보세요. 지금 우리 집 냉장고에 풍선같이 주먹만 한 것들이 징그럽게 꼬물거리고 있어요.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사람 주먹보다 좀 큰 것들인데 사진을 찍어도 안 나온단 말이에요.
“너! 자다 말고… 도대체 뭐라카노. 몬 알아 듣겄다. 야야! 마 자고 내일 전화하자. 지금 아주 피곤하다.” 뚝 전화기를 끊는다.
그는 다시 112로 전화한다. 두 번의 신호음이 울리자 전화를 받은 경찰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호통을 치더니 제발 잠 안 온다고 장난치지 말란다. 스물네 해 되기까지 절대 길지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은 도저히 일어나지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조심조심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거기엔 아까 보았던 검은 물체들이 온데간데없어졌다.
고개를 들이밀어 구석까지 샅샅이 살펴봤으나 역시 마찬가지다. 다행이다 싶었지만 지금 일어난 일들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다음날 오후엔 취업 준비생 몇몇이 모여 모의면접 연습이 있는 날이다. 그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몇 군데 이력서를 내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꿈꾸는 빛을 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