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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8550049
· 쪽수 : 400쪽
· 출판일 : 2022-01-12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5
1. 악연 13
2. 조선의 백성 45
3. 운명적 재회 64
4. 인연의 시작 83
5. 운명의 소용돌이 95
6. 다른 생각 108
7. 만나자마자 이별 119
8. 작은 바다 132
9. 너를 기다릴 것이다 145
10. 굳세고 강한 꽃 157
11. 인연에서 연인으로 168
12. 독살 178
13. 살아갈 의미 192
14. 해국 201
15. 네가 해국이구나 213
16. 약속 224
17. 엇갈린 인연 234
18. 마음에 담아 두었던 사람 246
19. 불안한 마음 258
20. 단 하루라도 268
21. 사랑하는 여인 281
22. 간절한 염원 290
23. 대한 독립 만세! 300
24. 다시 바다로 309
25. 두 사람 317
26. 정인의 딸 326
27. 소금 창고 336
28. 내게 오직 단 한 사람 346
29. 마지막으로 너를 354
30. 해국이 피다 363
31. 고된 피난길 371
32. 반드시 살아서 381
에필로그 394
참고 문헌 및 자료 399
저자소개
책속에서
사사야끼의 오른쪽 관자놀이 위로 뜨겁게 달구어진 금속이 부딪쳤다. 달구어진 금속은 그가 눈동자를 굴려 굳이 엿보지 않아도 될 만큼 익숙한 <마우저 C96> 독일제 권총이다. 자신의 왼쪽 겨드랑에 꽂혀있는 권총이기도 했다. 최대사거리, 즉 총구멍에서 빠져나간 총알이 닿을 수 있는 거리가 대략 200m로 알려져 있다. 그 말인즉슨 권총을 쥐고 있는 사내가 손가락을 잘못 놀리기라도 한다면 머리통이 그야말로 박살이 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푹 고아진 엿물과도 같은 찐득한 땀방울이 그의 이마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땀방울은 곧 총구멍을 휘감겼다.
한창 사사야끼가 독립운동가들의 뒤를 쫓고 있던 때였다. 말단 순사였던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승진하여 총독부에 들어가는 것밖에는. 그런데 그렇게 열망하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총독부에서 열을 올려 쫓고 있던 인물이 있었다. ‘귀신’이라는 별칭 가진 인물로서 전국 방방곡곡을 염탐, 중요시설을 기록하여 독립운동가들에게 넘기는 자였다. 자신의 별명인 귀신처럼 흔적이나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검거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나 같은 독립운동가들조차도 귀신의 얼굴을 본 이가 없었다. 귀신으로 인해 습격당한 주재소와 중요시설이 꽤 많았다. 총독부에서는 많은 병력을 투입해서라도 꼭 잡고 싶은 존재였다. 그런 귀신이 아우내 장터 <향월각>에서 독립운동가와 접선한다는 첩보가 사사야끼의 귀에 흘러들어왔다.
푸른빛이 돌자 밝게 빛나던 보름달도 서서히 제빛을 잃어갔다. 사방에는 날짐승들의 날렵한 움직임과 새들의 지저귐으로 분주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수탉의 우렁찬 울음소리는 어제와 다른 날이 왔음을 알렸다. 예전 같으면 벌써 일어나도 일어났을 만덕은 이부자리에서 뭉그적댔다. 괜히 떠나는 이와 마주치기 싫었다. 혹여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마음이 약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마음이 아마도 그를 이불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들게끔 한 모양이었다.
만덕은 살짝 고개를 들어 건너편 이부자리를 보았다. 개똥이는 이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없었다. 열세 살밖에 안 된 어린 딸은 아비의 아침 밥상을 차린다고, 일찍 일어나는 것을 보면 대견할 때가 한두 번이 아녔다. 한참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려도 모자란 나이인데, 어미를 일찍 여의고 고생을 하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그렇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으려니 별의별 불안한 생각이 다 찾아왔다.
그녀는 품속에서 필첩 하나를 꺼내 갑이에게 건넸다. 그는 건네받은 필첩을 이리저리 뒤적였다. 필첩에는 여인들의 이름과 소속 그리고 활동내용이 간략하게 적혀있었다.
“요것이 뭐던갑요?”
그의 물음에 화련은 대답했다.
“나라를 되찾는데 뜻을 함께하겠다는 기녀들의 명단입니다.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자 몇 년간 꾸준히 만든 조합원들이에요.”
갑이는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기녀는 백정과 더불어 조선에서 천한 신분이었다. 그렇다고 되고싶다고 하여 아무나 될 수 없는 것 또한 기녀였다.
그는 화련을 업고 노인이 이끄는 대로 헛간으로 몸을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명의 순사가 풀숲으로 다가섰다. 순사들은 서로에게 눈짓하고는 헛간 쪽으로 총을 겨누었다. 그들이 슬금슬금 다가서자 그는 발목에 꽂아두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자신은 어떻게 되더라도 그녀만큼은 꼭 지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상복은 틈새로 순사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순사 하나가 헛간의 문을 밀자 단검을 더욱 단단히 쥐었다. 그 순간 다리 하나가 헛간 안으로 불쑥 들어오자, 단검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이내 누군가의 부름에 그들은 돌아섰다. 그들을 불러 세운 사내가 눈짓을 보내자 순사들은 다시 마당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씨! 정신 쪼까 차려 보시어요. 아씨.”
그의 생각이 이곳까지 미치자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봇짐 속 연필을 꺼내 침을 묻혀가며 편지를 써 내려갔다. 다 쓴 편지를 고이 접어 바닥에 놔두고 봇짐을 짊어졌다. 그리고는 방문을 열고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다 조용히 뒤쪽 산 위로 올라갔다. 한참 힘들여 언덕을 올라 산아래를 내다보았다.
멀리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혼자 두고 가는 것이 마음이 쓰였으나, 상복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가 막순의 소식을 듣기 위해 경성으로 되돌아간다면 어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차라리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자신의 몫이었다. 연모하는 여인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진심으로 행복했다. 한동안 아래를 물끄러미 보던 그는 봇짐을 단단히 둘러멨다. 불편한 다리로 눈길을 해쳐 가며 쉬지 않고 꼬박 걸어도 하루 반나절이나 걸리는 먼 길이었다.
“아버지! 꽃… 꽃.”
분이가 가리킨 곳에는 백일홍이 탐스럽게 피어있었다.
얼마 전까지도 꽃봉오리만 보이던 것이 이제는 활짝 피어 보기 좋았다. 백 년도 더 된 백일홍 나무라 암자에서도 신성시 여겼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백일홍 나무보다 몇 배나 크고 아름다웠다.
“분이야! 저 꽃도 우리 분이 맨지로 이쁘게 활짝 피었다카이. 그자?”
조금 전까지 그가 올려보았을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난히도 반짝이는 별 하나가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많은 일이 한꺼번에 그것도 동시에 일어났다. 지금껏 일어났던 모든 일이 마냥 꿈처럼 느껴졌다. 그 견고했던 시간이 무너져 내리자 무기력이 찾아왔다.
그렇게 하얗게 밤을 지새운 분이는 정오가 되어서야 그가 근무 중인 부대 앞으로 갔다. 반지를 되돌려주기 위함이었다. 서성이는 그녀의 앞으로 헌병이 뛰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