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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역사소설 > 한국 역사소설
· ISBN : 9791168550117
· 쪽수 : 328쪽
· 출판일 : 2022-02-10
목차
추천사 04
머리말 11
프롤로그 18
01장 │ 수상한 소문 27
02장 │ 외출 47
03장 │ 오너라 동무들아 66
04장 │ 발병(發病) 91
05장 │ 대결(對決) 110
06장 │ 운명의 기로(岐路) 149
07장 │ 숲속의 면회 174
08장 │ 단종(斷種)수술 204
09장 │ 극비보관실의 비밀 243
10장 │ 마지막 밤에 274
에필로그 296
일본 731부대의 반인륜적 범죄 316
저자소개
책속에서
*1장
수상한 소문
달포 전부터 평양 일대에는 무서운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조선 곳곳에 십여 년 전부터 나병(문둥병)이 늘어나서 조선총독부에서 급기야 조선의 나환자들을 모조리 잡아들인다는 소문이었다. 나병은 결핵, 매독과 함께 당시 조선의 3대 질병에 속할 정도로 무서운 병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레 겁에 질려 나돌아다니지 않으려 했고 몸이 아파도 이웃에게조차 드러내지 못했다. 혹여 나병으로 의심하여 조선총독부 순사들에게 짐승처럼 끌려갈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정씨는 마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딸애 인영의 손을 잡고 은밀히 새벽에 집을 나섰다. 주재소나 체신소, 의원 등이 있는 소재지까지 꼬박 세 시간을 걸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의원나리, 우리 딸애 눈썹이 이상하오. 간혹 코피도 조금씩 흐른다오.”
정씨는 딸애의 코에서 코피가 흐른 시점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이 지긋한 의원나리는 딸애의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기 시작했다.
“코피가 자주 흘렀습니까?”
“예.”
의원은 인영의 턱을 쳐들어 콧속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리고 거즈에 알코올을 적시더니 인영의 눈썹 부위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눈썹 역시 하루가 다르게 빠져서 알코올 적신 거즈로 닦아내자 인영의 이마가 휑하니 넓어보였다.
“으음…”
“의원나리, 우리 딸애가 어째 그렇소?”
정씨의 가슴이 불이 붙는 듯이 화들짝 타올랐다. 제발 그 병만은 아니기를 생애 태어나서 가장 애타게 빌었을 것이다.
“아가, 너 저기로 좀 나가 있거라.”
“예, 나리.”
인영이 밖으로 나간 다음, 의원 나리는 냉큼 덤벼들 듯 물었다.
“딸애가 몇 살입니까?”
“열두 살이에요. 에믄 열두 살 먹었다오.”
“쯧, 쯧, 그저 조선의 스물 이짝 저짝 먹은 아이들이 요새 많이 걸린다는 병인데 일찍 걸렸습니다. 문둥병(나병, 한센병)이 맞습지요.”
문둥병은 단순한 피부질환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식의 부족으로 얼굴이 일그러지고 찌그러지는 모습을 보고 유행어처럼 만들어진 이름이었다. 얼굴에 결절이 생기면 사람들은 된장을 발랐는데 된장 바른 자리에 헝겊을 동여매니 피부가 더욱 찌그러지고 흉측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아이 에그나! 문둥이라니… 이 일을 어찌한다니…”
정씨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럴 겨를도 없이 정씨는 퍼뜩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어느 골에 사는 누구의 자제입니까?”
“아, 아니오. 우린 그저 떠돌이 신세라오.”
정씨는 후다닥 계산을 치른 다음 딸애의 손을 잡고 부리나케 밖으로 내달렸다. 인영 역시 아무런 영문을 모른 채로 엄마의 손에 자신의 손회목을 잡힌 채로 끌려가다시피 하고 있었다. 의원 나리가 후다닥 뒤따라 나왔지만 목숨을 내걸고 딸애의 손을 잡고 뛰는 정씨의 걸음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정씨는 한 식경 남짓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의원 나리의 걸음이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야 정씨는 숨을 헐떡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인영의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흘렀다.
“아이구나, 이쁜 내 새끼…”
“엄마, 이제 뛰지 말고 걸어가면 안 되오?”
정씨는 보자기에서 무명 손수건을 꺼내 딸애의 이마에 송알송알 맺힌 물 땀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은 곳으로 딸애의 손을 잡아끌어 목탄으로 갸름하게 눈썹을 그려 넣었다.
“엄마, 인영이 예쁘다면서 어째 우시오?”
“아, 아니다. 엄마가 울다니, 아 아니다.”
정씨는 인영의 손을 잡고 새벽에 걸었던 길을 거슬러 걸었다. 정씨는 들판을 지나고 내[川]를 건너고 산길을 에돌아 마을에 당도할 때까지 한 번도 인영의 손을 놓지 못했다. 인영의 손을 결코 놓을 수가 없었다. 인영이가 어디로 몰래 달아날 것 같아서가 아니라 거친 누군가의 손이 인영의 손목을 날름 낚아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세 시간을 넘게 땀을 뻘뻘 흘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정씨는 마음속으로 한없이 울었다.
인영은 집에 돌아온 이후 후원 뜰아랫방에 갇혀 지냈다. 동무가 보고 싶어도 문 밖으로 한 걸음 나가지 못했다. 정씨가 안채와 사랑채, 아랫방을 은밀히 드나들며 인영을 보살피고 있었다.
“엄마, 인영이 어디 있어요?”
세 살 터울인 인영의 오빠 인후가 물었다. 인영의 모습이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후는 집안에 분명 무슨 문제가 일어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인영이 저기 산속 절에 보내버렸으니 인후 너 절대 인영이 찾지 말거라.”
“동생을 왜 산속 절에 보냈습니까?”
인후는 사랑스런 인영을 갑자기 산속 절에 보냈다는 어머니의 말이 곧이들리지 않았다. 집안 어른들은 인영에 대해 뭔가 숨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른들에게 인영에 대해 물었을 때 난데없이 손가락으로 쉬, 쉬 하며 인영이 이름을 절대 꺼내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