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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8550513
· 쪽수 : 264쪽
· 출판일 : 2022-07-20
목차
작가의 말 — 4
그 사람이 있는 곳
달구질 — 8
복숭아씨처럼 — 27
꽁지머리 남자 — 43
몸살 — 62
배웅 — 80
도토리와 다래끼 — 109
면회 — 135
맞선 — 150
눈 오는 날 — 166
고향의 정령 — 213
운명이란 자연현상이다 — 232
평행선 — 246
저자소개
책속에서
할머니는 이곳이 마지막 유택이 되었지만 태어난 곳은 아니다. 고모나 나는 이곳에서 태어났지만 죽어서는 이곳으로 올 수 없다. 여기가 문중 산이라 부모님도 돌아가시면 이곳으로 모시지만, 어머니는 여기서 태어나진 않았다. 누군가는 태어나서 나가고 누군가는 죽어서 들어오는 곳이다. 태어났으니 따뜻하고, 돌아갈 곳이니 아늑할 것이다. 그렇게 태어남과 죽음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있어 고향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이든 마음이든 하다못해 관념으로라도.
좋고 나쁘다는 단순한 기분에서부터 행복과 불행 같은 큰 기분까지 사람의 느낌은, 마음가짐이 그렇게 느낄 수 있게 준비된 사람들에게만 찾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경찰에게 무혐의 판정을 받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세상 밖에 있는 것 같았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나로서는 그것을 찾을 모든 경우의 수를 세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내게 세상은 암흑일 수밖에 없었다. 그 속에 고향은 아예 의식조차 없었다. 그저 도피처를 찾은 것뿐이었다.
나는 다시 고요 속에 묻혔다. 안마당에서 도토리껍질 터지는 소리가 탁탁 타다닥 멀리서 폭죽 터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식구들이 들며 나며 주워온 도토리가 양지바른 안마당 시멘트 토방 위에서 햇빛에 바짝 말라 저절로 터지는 것이다. 널어놓은 도토리 위엔 맷돌 한 짝이 얹혀있다. 누구든 틈날 때마다 맷돌을 문지르면 그 중량에 눌려 도토리껍질이 깨지면서 벗겨진다. 밤이면 낮동안 마른 도토리를 넓은 고무 함지에 담아서 방에 들어와 커다란 돌로 맷돌질하듯 썩썩 문질러 껍질을 벗기기도 한다.
내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그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보조를 맞추려 무척 애쓰는 눈치다. 단둘이 있으면 으레 말을 하거나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엄청 불편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사람과는 아무 말 없이 있는 데도 아주 자연스럽고 편했다. 하긴 둘만 있는 건 아니다. 은은한 달빛은 싸한 공기를 데워주고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는 장단을 맞추고, 한 번씩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두 사람을 묶어주었다.
면회 시간은 십 분이라고 했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 십 분 안에 그간의 모든 감정을 정리해야 할 것처럼 쫓기는 기분이 들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두서가 잡히지 않았다. 단순한 산술적 계산으로 둘이서 사용할 시간이 십 분이니 한 사람에게 할당된 시간은 오 분이다. 그 짧은 시간에 무슨 말들을 할 것인가. 나는 대충 속으로 꼽아보았다.
나비!
내가 상심과 오기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고향에서는 나비가 되어 예쁘게 날고 있었던 게 아닌가. 나는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변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