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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먼 섬

서해 먼 섬

최임순 (지은이)
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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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먼 섬
eBook 미리보기

책 정보

· 제목 : 서해 먼 섬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8551749
· 쪽수 : 284쪽
· 출판일 : 2023-08-15

목차

작가의 말 – 5

위험한 수업 – 12
전선에서 살아남기 – 44
서해 먼 섬 – 72
이웃 – 100
크림빵과 강아지 – 130
재개발 지역 탈출기 – 158
사진을 찍는 이유 – 192
망가진 핸드폰 –220

저자소개

최임순 (지은이)    정보 더보기
인천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외출」이 당선되었다. 소설집 『바다 건너 그곳』, 『서해 먼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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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수업

겨울밤은 깊어져 가고 있었다. 운전 요원은 조금 나이가 들어 보였고 뒷자리에서 나를 돌보고 있는 구급대원들은 젊어 보였는데 둘 중에서 더 나이가 어려 보이는 구급대원의 얼굴에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빛이 역력했다. 구급차에 오르자마자 내게 산소마스크부터 씌웠는데도 산소포화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구급차는 불 꺼진 동네 마트 주차장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를 인계할 병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마트를 주소지로 119구급차를 요청했다. 아파트로 구급차가 들어온다면 내가 확진자라는 사실이 드러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민들은 동요할 테고 같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이들은 한동안 감염에 대한 공포를 떨칠 수 없을 것이다. 병상을 구하지 못해 여기저기 분주하게 전화를 하면서도 나이 어린 구급대원은 산소가 제대로 공급이 되는지 점검을 하느라 내 곁을 맴돌았다. 나는 그에게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하고 말했는데 함께 구급차에 탄 남편이 혹시 대원들을 감염시킬 수 있으니까 말을 하지 말라고 했다. 구급차는 좀체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시간 넘게 전화를 한 끝에 겨우 자리가 하나 나왔다고 했다. 여기서 먼 곳인데 가시겠어요? 나이 어린 구급대원이 물었고 남편은 당연히 가야지요, 하고 대답했다.
확진자 폭증으로 병상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은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다. 환자들이 재택 대기 중에 사망하기도 하고, 이송 중에나 응급실 밖에서 죽어가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밤거리를 한참 달려서 병원 응급실 앞에 도착했지만 나는 여전히 구급차 안에서 대기해야 했다. 혹시 선생님보다 더 연세가 많으신 환자가 오게 되면 못 들어갈 수도 있대요, 나이 어린 구급대원이 망설이듯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불이 환하게 켜진 응급실 앞에는 여러 대의 구급차가 서 있고 구급대원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자정을 넘기고 나서야 나는 이동침대에 실리고 응급실 안으로 들어섰다. 나이 어린 구급대원은 의사에게 나를 인계하고 나서도 한참이나 근심스레 나를 지켜보았다.
병원을 나가면 살뜰하게 나를 보살펴 준 그 순진하고 맑은 얼굴의 구급대원에게 고마웠다는 인사를 반드시 전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나는 곧 그 젊은이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느닷없이 쏟아진 의사의 질문 때문이었다. 사전연명치료 의향서 같은 거 쓰셨습니까? 이맛살을 잔뜩 찌푸린 의사가 추궁하듯 물었다. 남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면서 그러기에는 아직 너무 젊어서, 하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면 연명치료를 하실 거예요? 의사의 질문에 남편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인공호흡기를 착용할 거예요? 의사는 남편을 다그쳤다. 생명 유지 장치를 할 거냐고요? 의사가 목소리를 높였다. 남편은 여전히 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산소호흡기를 달고 연명치료를 하실 거냐고요? 간호사인지 의사인지 알 수 없는 여자가 다시 물었다.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을 겨우 깨달은 사람처럼 남편이 고함치듯 말했다. 끝까지 갑니다, 끝까지 치료할 겁니다. 모든 게 순식간에 벌어진 일처럼 느껴졌다. 내가 죽다니, 아무리 코로나에 걸렸다고 해도, 열이 오르고 숨이 찰 뿐인데, 의사가 지나치게 앞서간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와락 겁이 나는 것이었다. 나는 젊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직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도 아니었다. 물론 죽음에 나이는 필수 항목이 아니지만 말이다.

그 강의실에서 나는 가장 나이가 많은 학생이었다. 그 강의실에는 나이가 많은 이들이 꽤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연장자였다. 수강생들이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할 때 여러분에게 희망을 드릴게요, 하면서 내 나이부터 밝혔는데 기대했던 대로 나이 많은 이들이 와, 환호하면서 기뻐하는 것이었다. 강사는 이 공부를 하는데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며 죽을 때까지 공부를 놓지 말아야 한다고 덕담 같은 훈계를 늘어놓았다. 강사의 말에 연방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나는 나이가 많다는 게 몹시 부끄러웠다. 조금 더 젊었을 때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나, 후회와 자괴가 밀려왔다.
강의가 끝난 뒤 수강생들은 인근 식당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수강생들은 세 개의 테이블로 나누어 앉았는데 나는 내 나이에 환호했던 무리에게 이끌려 구석 테이블에 앉았다. “언니가 올 때까지는 내가 큰언니였는데 이제 왕언니가 와서 정말 고마워요.” 커트 머리를 한 여자는 활달해 보였다. 여자는 살집이 좋아서 얼굴에 주름도 없었지만 나는 여자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어른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 여자와 마찬가지로 여자 주위에 앉아 있는 이들도 내 눈에는 손윗사람들처럼 보였다. 사실 나는 종종 내 나이를 잊고 지내는데 그 때문에 실수를 하기도 했다. 바삐 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오래전 친하게 지냈던 미영 언니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것이었다. 너무나 반가워서 언니, 오랜만이에요, 큰 소리로 인사했는데 그쪽에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곧 나의 착오를 알아채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본 미영 언니의 얼굴은 20년 전에 보았던 그 얼굴이었다. 내가 아는 미영 언니는 그 세월만큼 주름진 얼굴이 되어있을 터였다. 그 뒤로도 가끔씩 나는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곤 했는데 아마 더 나이가 들면 실수하는 횟수도 늘어날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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