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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68553583
· 쪽수 : 288쪽
· 출판일 : 2025-07-10
목차
1장 니샤와 카오•6
2장 스피카•58
3장 별신굿•110
4장 청사포•140
5장 남지 2호•190
6장 그녀, 여주•248
7장 에필로그•278
작가의 말•282
저자소개
책속에서
1
방 안에 전단향이 가득하다. 처음에는 강하면서도 그윽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드럽고 섬세하게 변해가는 향훈이다. 제단 위에서 물안개처럼 흘러나오는 그 향은 상쾌하면서도 어딘가 중후한 느낌도 들었다. 가슴에 오련하게 전해져 오는 향을 맡으며 니샤는 진지한 태도로 경배를 올렸다. 깊은 밤이었다.
그녀의 집안 곳곳에는 온통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흘러 다녔다. 출입구 맞은편에 설치된 제단에는 향로를 중심으로 양옆에 대리석으로 만든 작은 조각품이 놓여 있었다. 오른쪽에는 크리슈나 신의 형상물이, 왼쪽에는 가네샤 신의 형상물이 고요히 자리 잡았다. 또한 제단 위 벽에는 두 신을 그린 커다란 유화가 웅혼한 자태를 자랑했다.
코끼리 머리에 네 개의 팔을 가진 가네샤 신. 온갖 장애를 없애주고 행운을 가져다주는, 또한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슬기를 주는 신이다. 검푸른 피부를 가진 크리슈나는 왼손에 인도식 피리인 반수리를 들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우주의 중심을 돌리고 있다. 그는 인간계와 천상계를 아우르는, 운명을 다스리는 신이었다.
니샤의 조상은 인도에서 마에섬으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세이셸 사람 중에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와 유럽 백인과의 혼혈종인 크레올족이 제일 많았다. 그 외 인도와 일본, 중국에서 이주한 사람들도 살았다. 세이셸공화국은 마에와 프랄린, 큐리어스를 비롯한 115개의 섬을 품에 안고 있는 인도양의 작은 섬나라였다.
비대한 몸집의 크레올 여인과는 달리 날씬한 몸매를 가진 그녀는 사흘 내내 슴바양의 제단에 향불을 피우며 숭고한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긴 생머리에 뚜렷한 이목구비, 수정 같은 눈동자에 연한 갈색의 피부를 가진 니샤는 전형적인 인도 미녀였다.
그녀는 왜 자신이 이렇게 오랫동안 제단 앞에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사흘 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게 몰려왔고 그것에 따라 제의를 올리고 있을 뿐이었다. 니샤는 그윽한 전단향에 취해 눈을 감았는데 어떤 기의 흐름이 바투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눈을 뜨자, 점성술사였던 할머니가 그녀 앞에 환영처럼 나타났다. 화려한 분홍빛의 살와르 카메즈에 푸른색 사리를 걸친 할머니는 오른손을 뻗어 제단 오른쪽의 장식장을 가리키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니샤는 꿈인지 현실인지 몽롱한 상태에서 제단 옆에 있는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장식장 위에는 백과사전처럼 보이는 두꺼운 책과 작은 나무 상자, 각종 장신구들, 반수리와 쉐나이, 나침반이 놓여 있었다. 반수리는 일자형의 대나무로 만든, 깊고 풍부한 저음이 매력적인 악기였다. 반면에 쉐나이는 높고 웅혼한 고음의 악기였으며 끄트머리가 나팔처럼 벌어진 구조였다. 코브라를 불러 모으는 전통 악기 ‘풍기’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 물건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은 푸른색 테두리를 가진 나침반이었다.
니샤가 장식장으로 다가가자, 나침반의 바늘이 빙빙 돌아갔다. 그녀는 무아지경에 빠져 바늘의 움직임을 내려다보았다.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떨 듯 바늘은 신비롭게 진동했다. 코코넛 나무 판재로 만든 벽의 틈새로 연약한 바람이 불어왔다. 일렁이는 촛불이 그녀의 그림자를 바닥과 벽에 길게 드리웠고 니샤는 나침반을 양손으로 소중히 잡았다. 그녀는 나침반과 쉐나이를 들고 제단 맞은편에 있는 출입구로 천천히 걸어갔다.
일 층으로 내려가는 나무 계단을 밟다가 니샤는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흐린 밤하늘은 어둠과 무게감으로 가득했으며 마치 세상의 모든 슬픔과 걱정, 불안이 쌓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 밤하늘 너머에도 별이 숨어 있겠지. 어둠 속에서 반짝이며 빛과 소망을 주는.’ 그녀는 숨을 한번 들이마시며 나침반을 내려다보았다. 바늘은 다시 한번 요동치는가 싶더니 정확히 북동쪽을 가리켰다. 그곳은 마에섬 보발롱 해변의 끝자락이었다. 니샤는 맨발로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뎌 해변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그녀의 발에 푹신한 모래의 감촉이 전해져 왔다.
자박자박. 그녀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모래가 발바닥 양쪽으로 밀리면서 작은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니샤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모래사장의 구석진 곳에 도착했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검은 황금색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별 몇 개가 밤하늘에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달은 구름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했다.
무서우리만치 어두운 가운데 그녀의 눈에 노란색 잔영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잔영은 물결 따라 바다로 나갔다가 모래사장으로 밀려오기를 반복했다. 멀리 수평선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구름이 걷히는가 싶더니 갑자기 밤하늘에 별들이 화려하게 나타났다. 덩달아 수평선 위로 붉고 노란 달이 구름을 젖히고 떠올랐다. 비로소 니샤는 노란색 잔영이 한 무더기의 라이프 재킷인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위에 어떤 남자의 형상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라이프 재킷을 힘겹게 모래사장으로 끌어당겼다. 족히 대여섯 개는 되어 보이는 재킷은 줄로 엮여 있었다. 엎드려 있는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옆에는 푸른색 배낭이 바특하게 놓여 있었다. 그것을 만지는 순간, 강한 전율이 그녀의 몸으로 밀려왔다. 니샤는 오묘한 감정에 이끌려 쉐나이를 연주했다. 높고 은은한 소리가 검은빛으로 반짝이는 바다 위로 퍼져갔다.
니샤는 쉐나이가 발산하는 소리에 맞춰 따뜻한 기운이 그녀와 남자 주변에 맴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운은 하늘로 솟구치기도 했고 지상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니샤는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려 마치 그 기운을 안아 드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재킷 위에 있던 남자의 형상이 서서히 일어섰다. 멀리, 칠월의 밤하늘에 수많은 별이 반짝였고 니샤는 비트적비트적 걷는 그 남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2
“니샤, 내가 죽은 거야, 살아 있는 거야?”
코코넛 나무 의자에 앉아 코발트블루의 바다를 쳐다보던 카오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태양 빛에 그을린 사각형 얼굴을 가진 그는 헐렁한 티에 툽툽한 바지 차림이었다. 왼쪽 눈이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니샤의 몸에서 엷은 향훈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인도양의 소금기에 섞인 그 향은 자극적이지도 연하지도 않은 은은한 것이었다. 커다란 꽃이 그려진 원피스에 연하늘색 카디건을 걸친 니샤. 카오는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향을 맡으면 늘 편안했다. 말없이 서 있던 그녀는 흐리마리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그대는 지금 인도양의 수평선과 놀을 보고 있는데.”
“그렇군. 나는 지금 붉은 놀을 보고 있군.”
그가 쳐다보는 서쪽 하늘에는 붉은색과 노란색이 얽히고설킨 채 일망무제처럼 펼쳐져 있었다. 흰 포말과 붉은 포말을 번갈아 보여주는 파도는 한 마리의 거대한 동물과 같았다. 그것은 상앗빛 모래를 할퀴기도 했고 때로는 바다 쪽으로 쓸고 가기도 했다. 놀이 수평선 뒤로 완연히 물러가자 바다는 차츰 흑다이아몬드처럼 변해갔다. 세이셸 마에섬의 보발롱 해변에는 검은 공기가 사방에 떠돌아다녔다.
“곧 별이 찬란하게 보이겠군. 살아있기도 하고 죽어 있기도 한.”
“그래. 영원하면서도 허망한 존재, 바로 별이지.”
“저 별이 무척 밝게 빛나는군.”
카오가 손가락으로 남서쪽에 유독 밝게 떠 있는 별을 가리키며 말하자 니샤가 설명했다.
“처녀자리의 스피카야. 이맘때면 무척 밝게 빛나는 별이지. 지하의 신, 하데스의 아내인 페르세포네가 손에 들고 있는 보리 이삭. 그래서 저 별은 생명과 수확을 상징하는 거야.”
“스피카… 희미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어. 바람이 부는 언덕에서 누군가와 함께 저렇게 밝은 별을 본 것 같아. 밤하늘의 제왕처럼 그 별은 빛나고 있었지.”
“카오, 가장 위대한 잠언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야. 저 스피카는 다섯 개의 별로 빛나고 있어. 밤하늘에 하나, 그 밤하늘을 투영하는 바다에 하나, 그리고 그대 눈동자와 나의 눈동자에 하나씩.”
“나머지 하나는 어디에 있지?”
“그대의 마음속에 또 하나가 있지.”
카오는 니샤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밤의 정적을 깨는 니샤의 쉐나이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즐겨 부르는 쉐나이는 높으면서도 중후한 소리를 내며 별들 사이로 떠다녔다. 이 소리에는 영과 혼이 담겨 있다고 말하며 니샤는 힌두교 제사를 지낼 때마다 쉐나이를 연주하곤 했다.
카오가 힘겨운 몸짓으로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니샤가 오른손으로 그의 왼팔을 잡아주었다. 그들은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남기며 코코넛 나무가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으로 걸어갔다. 나무 사이에서 자늑자늑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들이 사는 곳은 코코넛 나무 뒤에 있는 작은 나무집이었다.
그는 왼쪽 다리를 절었다. 그와 엇비슷한 키를 가진 니샤. 흑단처럼 검은 그녀의 머리칼에 별빛이 내려앉았다. 보발롱 비치는 바다를 따라 바나나처럼 길게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그 해변에는 파우더처럼 푸슬푸슬하고 고운 모래가 투명한 빛을 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