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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동양사일반
· ISBN : 9791170873662
· 쪽수 : 464쪽
· 출판일 : 2025-08-11
책 소개
목차
서문
이 책을 읽는 여러분께
1부 동아시아의 변동과 근대화
1장 개항과 근대화
1 서양은 어느 날 갑자기 동아시아에 나타난 걸까요?
2 외교 담판은 무슨 언어로 진행되었을까요?
3 민중은 어디에서 ‘서양’을 만났을까요?
4 근대의 민중은 새로운 국가 수립 과정에 어떻게 대응하고 참여했을까요?
칼럼 멕시코의 은
칼럼 민간 종교와 남녀평등
칼럼 만세
2장 전쟁과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성
1 청일전쟁에서 누가 무엇을 위해 싸웠을까요?
2 러일전쟁은 사람들의 세계관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요?
3 일본은 어떻게 타이완을 식민 통치했을까요?
4 일본은 어떻게 조선을 지배했을까요?
칼럼 일본군이 전쟁에 동원한 말
칼럼 정로환의 탄생
칼럼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3장 민중 생활의 변화
1 양복과 단발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2 새로운 교통수단과 전신의 발전은 민중들에게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3 가족과 양성 관계는 어떻게 변화했을까요?
4 학교의 등장으로 아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배우게 되었을까요?
칼럼 세 나라의 새해 첫날
칼럼 사진의 등장과 민중생활
칼럼 학교 체육 교육의 시작
2부 두 번의 세계대전과 동아시아
1장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동아시아
1 제1차 세계대전이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을 민중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2 동아시아 민중은 러시아혁명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요?
3 3 ·1운동과 5 ·4운동에서 꿈꾸었던 세상은 무엇일까요?
4 전쟁을 막으려는 노력은 왜 실패했을까요?
칼럼 아시아의 쌀 소동
칼럼 동아시아사의 관점에서 본 간토 대지진
칼럼 제1차 세계대전에 동원된 아시아와 아프리카 민중들
2장 동아시아의 총력전과 민중의 저항
1 일본은 왜 계속해서 대외 전쟁을 확대했을까요?
2 전쟁 시기 징병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3 전쟁터에서 여성에게는 어떤 폭력이 가해졌을까요?
4 세 나라 민중은 일본의 침략전쟁에 어떻게 저항했을까요?
칼럼 한·중·일이 얽힌 완바오산 사건
칼럼 반전 평화를 노래하다
3장 대중문화와 민중의 삶
1 도미코 가족은 왜 조선으로 건너왔을까요?
2 동아시아의 도시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3 식민지와 전쟁터의 대중은 어떤 노래를 불렀을까요?
4 어린이는 총력전 시대를 어떻게 살았을까요?
칼럼 《중국의 붉은 별》
칼럼 어린이날
칼럼 유학을 다녀온 신여성, 여성교육에 뛰어들다
3부 현대 세계와 동아시아
1장 전후 국제관계의 변화와 민중
1 8월 15일은 무슨 날일까요?
2 동아시아의 몇몇 나라는 왜 아직도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을까요?
3 동아시아에 미군기지가 여전히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4 동아시아인들은 평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요?
칼럼 동아시아의 전통명절
칼럼 평화기념관
칼럼 재일코리안의 ‘국적’
2장 경제성장의 빛과 그림자
1 동아시아 나라들의 경제가 빠르게 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2 경제성장은 사람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었을까요?
3 고학력이 미래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을까요?
4 육아하는 남성은 ‘이상적 남성상’일까요?
칼럼 미투운동
칼럼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칼럼 동아시아의 신세대
3장 동아시아의 미래
1 세계화는 왜 무한 경쟁을 낳았나요?
2 동아시아 사람들의 안전한 삶을 위협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3 어떻게 역사 갈등을 해결하고 화해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4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칼럼 이수현
칼럼 스포츠로 가까워지는 남북한
칼럼 국경을 넘어서는 애니메이션, 게임, 케이팝
편집 후기
저자 소개
사진 출처 및 소장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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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책속에서
사람과 물건, 정보가 집적되면서 개항장에는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신식 도로와 서양식 다리(철교), 하수도, 가스등·전등 등이 설치되고 근대적 건축물이 세워졌습니다. 개항장은 서양과 동아시아가 직접 만나는 창구로서 서양 지식을 전파하고 기독교를 포교하는 거점이 되었습니다. 상하이에서는 1850년 영자신문이, 1861년 중국어 신문이 창간되었습니다. 요코하마에서도 1861년 영자 신문이 발행되고, 1870년에는 최초의 일본어 일간신문이 창간되었습니다. 부산과 인천에서는 일본 거류민을 위한 신문이 발행되었습니다. 개항장은 새로운 정보의 집적지이자 발신지였습니다.
― <1부 1장 3절 민중은 어디에서 '서양'을 만났을까요?> 중에서
오늘날 3국에서 모두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는 ‘만세’는 중국에서 유래한 말로, 처음에는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며 경축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8세기경 일본에 전해져 ‘만자이’, ‘반제이’로 발음되었는데, 지금처럼 양손을 번쩍 들면서 외치는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반자이’가 최초로 울려 퍼진 것은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을 공포한 날 제국대학 학생들이 천황과 황후가 타고 있는 마차를 향해 ‘천황 폐하 반자이’를 외치면서부터였고, 이것이 군중에게 파급되었다고 전합니다. … 한편, 한국에서는 1897년 대한제국 성립 당시 ‘황제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 그러나 일본과 달리 한국에서는 이 ‘만세’가 일제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과 결합하여 1919년 3·1운동의 ‘독립 만세’로 이어졌습니다.
― <1부 1장 칼럼 ‘만세’> 중에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 대신 ‘신영토’라 불렀습니다. 서양 열강에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식민지는 본국에서 물리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인종과 풍속이 달라 서로 화합하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은 매우 가깝고 인종도 같아 융합하고 ‘동화’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다고 보았지요. 다만 한국인의 입장에서 ‘동화’는 민족 말살을 의미하는 ‘일본인화’와 다름없었습니다. 사실 일본은 한국을 지배하기 전부터 ‘동화’를 이야기했습니다. 다만 시기적으로 당장 ‘동화’를 이룰 수 없다고 보았기에 조선을 ‘내지’, 즉 식민지 본국인 일본의 한 지방으로 즉각 편입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일본 지배자들은 이를 조선특별통치주의라고 불렀습니다.
― <1부 2장 4절 일본은 어떻게 조선을 지배했을까요?>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