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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사회과학 > 사회학 > 사회학 일반
· ISBN : 9791185521862
· 쪽수 : 408쪽
· 출판일 : 2020-11-20
책 소개
목차
들어가며 마네와 텔레비전 사이의 사회학자
1장 반半예술의 문화, 반反미학의 미학: 대중문화와 예술의 관계에 관한 사회학적 노트
대중문화의 ‘불편한 즐거움’ | 문화적 지배와 정당성 | 문화적 정당성의 구조 변동 | 대중문화의 정당성 강화 | 부르주아 미학 대 민중 미학 | 위험에 빠진 문화? | 전략적 반미학을 위하여
노트 1 | 문화예술의 소비
노트 2 | ‘중간예술’로서 대중문화
노트 3 | ‘고급문화’의 특수성과 보편성
노트 4 | 하위 장르의 고유한 정당성
노트 5 | 장의 자율성과 예술의 순수성
2장 계몽의 시각적 수사학: 〈악트〉의 성공담, 혹은 성장담
이단들을 위한 자리 | 경계와 위계를 가로지르기 | 제도적 성공의 명과 암 | 〈악트〉라는 질문
노트 6 | 상징적 지배의 전복
노트 7 | 〈악트〉의 이미지 활용
노트 8 | 〈악트〉, 혹은 아카데미의 〈횃불〉
3장 부르디외, 예술을 논하다
예술가와 사회학자의 만남 | 신자유주의 시대의 비판적 사유-예술 | ‘합리적인 것의 현실화’냐, ‘현실적인 것의 합리화’냐 | ‘미학적?정치적 아방가르드’라는 환상? | 예술의 진실과 감각의 논리
노트 9 | 문화적 즐거움과 사회학적 성찰
노트 10 | 〈게르마니아〉의 정치적 미학
노트 11 | 취향의 인종주의
노트 12 | 예술에서의 보수 혁명
노트 13 | 예술가의 이중 게임
노트 14 | 예술 영역의 근대적 자율성
4장 고다르 × 부르디외: 콜레주드프랑스에서 〈콜라주 드 프랑스〉까지
가상의 책 | 다섯 장면 | 귀머거리들의 대화? | 〈콜라주 드 프랑스〉, 도래하지 않은 기획 | 위상 창조자 혹은 상징혁명가 | 상징투쟁과 제도
노트 15 | 사회학과 동시대 예술의 공통점
노트 16 | 이미지의 이미지
노트 17 | 누벨 바그의 예술 혁명
노트 18 | 즈다노프의 법칙
노트 19 | 부르디외에 대한 언론의 공격
5장 부르디외, TV를 말하다
소음과 분노 | 보이는 화면의 안 보이는 논리 | 사회학의 사회적 활용: ‘과학’과 ‘비판’ 사이
노트 20 | 미디어의 상징권력
노트 21 | 사회학적 이해의 효용
노트 22 | 문화생산 장의 자율화
노트 23 | 문화적 차이와 공통성의 역학
6장 저널리즘 장과 민주주의
부르디외의 미디어 비평 | 대중문화론 비판에서 저널리즘 장의 분석으로 | 저널리즘 장의 구조와 역학 | 저널리즘 장의 ‘사악한 효과’ | 저널리즘의 사회학적 윤리를 향하여
노트 24 | 부르디외의 지식인론
노트 25 | 신문·방송의 문화적 위상
노트 26 | 언론인의 계급 하비투스
노트 27 | 저널리즘의 소비
7장 미디어와 문화산업은 장이론의 맹점인가
《텔레비전에 대하여》 이후 | 문화/경제의 복잡한 짜임새 | 문화생산 장이론의 쟁점 | 방법으로서 장이론
노트 28 | SF의 문화적 지위
노트 29 | ‘자본’으로 보는 하위문화와 대중문화
노트 30 | 정책 결정에 대한 장이론적 접근
노트 31 | 문학적 지배와 소수 문학
노트 32 | 정보 기술과 이중 경제
노트 33 | 문화산업 부문의 이질적 생산 논리
보유 “내가 사회 세계를 견뎌 낼 수 있었다면, 그것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와의 가상 인터뷰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대중문화의 가속적인 상업화와 지배력 확장 앞에서 부르디외는 비상업적인 문화생산 부문의 보호를 역설하고 자율적인 고급문화와 이른바 ‘순수 예술’의 부정성을 옹호했다. 이는 대중문화의 질적 하락과 폐해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함께 이루어졌다.
〈악트〉가 지향했던 사회과학의 전망과 비판적 계몽주의의 태도,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한 새로운 형식 실험이 여전히 불완전하며 불안정하기에 그렇다. 그 전망과 태도와 형식은 아직도 더 많은 가능성의 탐구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 그 시도의 주체가 반드시 〈악트〉일 필요도, 또 그 장소가 반드시 프랑스여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악트〉를 하나의 질문으로서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누구든 어느 곳에서든 그 답을 새롭게 이어나갈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징혁명이 종국에는 개개인의 시각을 변화시키고 몸과 하비투스를 변형시키는 일이라면, 예술이 그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통로는 인식과 계몽 말고도 다양하다고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때의 예술이 반드시 제도화된 생산 장에서 정의하는 식의 예술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예술 장과 예술 시장을 거의 구분하기조차 어려워진 신자유주의 시대에 상징혁명의 동력을 동시대 미술의 전복적 힘에서만 구해야 할 이유 또한 어디에도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