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분지

시인의 말

제1부
눈사람/죽은 지렁이를 위하여/흔적/거미/파꽃/먼지의 안쪽/부드러운 직선/숲속 냉장고/매너티/저수지/잠복소/는개/파리 1/파리 2/붉은 그늘

제2부
먼지의 춤/겨울 배추밭 1/겨울 배추밭 2/샐비어/무꽃/사랑니/황태/본적/가시오이/나무가 되었다는 그 여자/광수 오빠/가래질/냉이꽃/엄마의 밭/장미가 피는 계절

제3부
/담쟁이/동지/눈에도 사연은 있다/씨앗/비봉산/바람의 등/수상한 장례/오래된 미래 1/오래된 미래 2/오래된 미래 3/오래된 미래 4/오래된 미래 5/오래된 미래 6/오래된 미래 7

제4부
겨울 도마/대장장이/군불/오월/사람의 능선/종양/정어리/하현동 1/하현동 2/망초꽃/바다의 능선/초상화/새우깡 속에서 사람의 향기가 난다/환절기/소금꽃

해설｜삶보다 아름다운 절망의 노래 / 이현호(시인)

겨울 배추밭 1

늘 다니던 길옆에
배추밭이 있었던 건
겨울이 절반은 지나서였다
몇십 번 얼었다 녹았다 했는지
하얗게 바랜 몸으로 한 시절을 캐내고 있다
둑이 번창했을 때엔 잰걸음으로
들고나던 고랑도 안색을 달리하고
하루 종일 수다를 떨구던 벌레들도 떠나고
시퍼렇게 번뜩이던 잎들
냉랭한 바람을 먹고서야
낮게 엎드리는 것만이
따스한 약속을 받아내는 일이라는 걸
뿌리는 절망의 깊이로 안다

그곳에 봄은 있었던 걸까
무늬만 남아 있는 봄
눈시울이 시큰거린다
밭 가장자리 새 한 마리
언 손들이 차창을 붙잡고 따라온다
모든 것들은 바람의 각도를 타고 오른다
언젠가 내 밭에서도
겨울 차창 밖으로 떡잎 같은
약속 한 줌을 보내주겠지

먼지의 춤

어디서 구르다 왔을까
불안의 높이에서 들여다보면
누구의 전생인지 몰라
침묵하고 있었지
아니 그의 후생일지도 몰라
낡은 창살 사이
구석진 시간의 틈에서
늙은 가구들의 구구한 이력을 받아내며
티눈 같은 덧살을 쌓았지
화창한 날이라도 만나면, 기침을 죽이며
비상이랄 것도 없는 오라기를 둥둥 풀며
춤을 추었지

먼지도 나이를 먹으면 지천명(至天命)이 되는 걸까
바람의 통로에서 몸을 연다
햇살의 안쪽으로
죽지를 펴고 가는 눈부신 사리
그는 자유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