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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6127018
· 쪽수 : 256쪽
· 출판일 : 2014-11-25
책 소개
목차
책머리에 | 순결한 영혼(靈魂)에 대한 헌사(獻辭)
내 친구, 장(張)씨
'셔터 맨'은 어디로 갔을까
마두금(馬頭琴) 이야기
탱자나무 울타리
세 남자
나무꾼과 선녀
지도 찾기 놀이
빈 항아리
말미잘 그리고 커피 루왁
마리오네뜨, 느린마을로 날다
저자소개
책속에서
내 눈에 눈물이 고였을까. 사무실 벽의 뉴기니 풍경화가 안개에 휘감겨 보이더니 그림 상단에 대칭으로 그려 있던 극락조가 푸스스 깃털을 털어 보였다. 놀라서 다시 바라본 그림 속의 종려와 키 큰 양치식물 사이의 작은 시냇물이 흘러가기 시작하면서 졸졸졸 물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숲속의 높은 온도가 뭉쳐서 방울을 만들어 후두둑 소리를 내며 오두막집 지붕과 땅바닥에 떨어져 내린다고 생각하면서 힐끗 다시 바라본 벌거벗은 노인에게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어, 하고 비명을 질렀다.
노인 곁에 놀랍게도 장진우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어느 사이 노인과 장진우의 사이에 낯익은 또 한 사람 모습이 하나 더 끼어 들었다. 박시인…… 나는 목이 메어서 그를 부르며 그림 앞으로 다가섰다.
힐끗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이 나를 향해 찡긋 윙크를 해 보이더니 손을 흔들고 숲길을 따라 마을 뒤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 ‘셔터 맨’은 어디로 갔을까
눈을 뜨자 아래위 흰옷을 입은 엄마가 서둘러 내 옷을 갈아 입히고는 아무 말씀도 없이 읍내로 가는 버스를 탔어요. 정류장에 내리자 내 손을 잡고 엄마는 읍내 사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빼기로 올라가 나를 밭둑에 앉혔어요. 한참 뒤, 울긋불긋한 꽃을 잔뜩 단 상여 하나가 거리에 나타났습니다. 엄마는 그 상여 쪽을 향해 내게 두 번 절을 시켰어요. 엄마 얼굴이 너무 하얗게 되어 있어서 나는 무슨 일인지 묻지도 못하고 멀리 보이는 상여 쪽을 향해서 절을 두 번 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앉아 있던 언덕의 밭에는 콩 포기들이 시퍼렇게 자라고 있었고, 그 콩밭 군데군데 키 큰 수수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꺼덕거리고 있었던 것도 생각이 납니다.
이별이 어떤 것인지, 이승과 저승이 얼마나 먼 곳인지 짐작도 못해보던 열두 살, 그렇게 나는 아빠를 보내드렸어요. 보내드린 게 아니고 아빠가 나를 떠나셨어요.
- 마두금(馬頭琴) 이야기
오늘도 그의 전화를 끊고 나자 머릿속을 헤집으며 과수원집 탱자나무 울타리가 떠올라왔다. 우리가 살던 등성이 너머 신작로를 건너면 탱자나무 울타리에 싸인 과수원이 있었다. 울타리는 불가침 혹은 경계, 전유와 차단의 의미, 무언의 관습적 약속일 터였다.
집과 집의 확실한 경계선, 사유와 공유의 구획, 국경, 교도소 높다란 벽돌담이 가진 일반 사회와의 차단, 포로수용소의 전기 철조망, 생 울타리, 돌담, 중세의 성(城)을 싸고 있는 인공의 해자(垓字)……. 그런데 그 많은 구획의 명징한 상징들 속에서도 내게는 그 과수원을 둘러싸고 있던 탱자나무 울타리만큼의 완강한 경계를 떠올려 볼 수가 없었다.
- 탱자나무 울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