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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종교/역학 > 기독교(개신교) > 기독교(개신교) 목회/신학 > 신학일반
· ISBN : 9791186409060
· 쪽수 : 872쪽
· 출판일 : 2015-04-14
책 소개
목차
한국어판 서문
서문
약어
표
제1장 역사적 예수에서 증언이 들려주는 예수로
제2장 목격자들에 대한 파피아스의 보고
제3장 복음 전승에 나타난 이름
제4장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이름
제5장 열두 제자
제6장 “처음부터” 지켜본 목격자들
제7장 마가복음에서 베드로의 시각
제8장 마가복음의 수난 내러티브에 나타난 익명인
제9장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대한 파피아스의 보고
제10장 구전 모델
제11장 예수 전승의 전달
제12장 익명 전승인가, 목격자 증언인가?
제13장 목격자 기억
제14장 목격자 증언인 요한복음
제15장 예수가 사랑하신 그 제자의 증언
제16장 요한복음에 대한 파피아스의 보고
제17장 요한복음에 대한 폴리크라테스와 이레나이우스의 보고
제18장 증언이 들려주는 예수
고대인 색인
현대 저자 색인
지명 색인
성경 색인
고대 문헌 색인
저자가 인용한 인물 소개
역자의 말
리뷰
책속에서
제가 쓴 책 중 아마도 이 책이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큰 충격을 안겨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책은 지금도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그동안 신약학자들 사이에서는 복음서와 관련해서 몇 가지 큰 가설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 책은 그런 가설에 맞서 도전장을 던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으시는 분들은 제 논증이 설득력이 있는지 스스로 판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쓴 뒤에, 이 책에서 밝힌 생각과 같은 궤도를 따라 복음서를 고찰하고 연구하는 작업을 계속해왔습니다. 이 책이 불러일으킨 학계의 논쟁도 제가 그런 연구 작업을 계속하도록 자극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책의 논지와 관련해서 제 생각을 바꿔야 할 어떤 이유도 저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저는 더 깊이 있는 논증을 발전시켜왔기 때문에, 머지않아 『예수와 그 목격자들』 속편을 내놓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복음서와 비교할 때,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시각에서 보면 역사적 예수 탐구가 재구성한 예수는 모두 환원주의가 만들어낸 지극히 단순한 실재일 수밖에 없다. 결국 여기에 역사적 예수 탐구를 바라보는 기독교 신학의 딜레마가 있다. 기독교 신앙이 역사를 위해 가장 활발하게 투자하는 이 시점에서, 역사와 신학이 갈라서야만 하는가? 우리는 한편으로는 썩 내키지 않아도 복음서를 그리스도인들이 믿어온 예수에 다가갈 수 있는 길로 받아들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가들이 역사비평의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진실로 확증할 수 있는 것만을 근거로 삼아 역사 속 예수를 구성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나는 더 나은 전진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길은 신학과 역사가 역사 속 예수 안에서 갈라서지 않고 오히려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이 책에서 나는 신학과 역사가 역사 속 예수 안에서 만날 수 있음을 보여줄 몇 가지 증거와 방법을 처음으로 펼쳐 보이려 한다. 그 핵심 개념은 바로 증언이다.(제1장 중에서)
양식비평가들은 복음서를 공동체가 익명으로 형성하고 전달한 구전과 어느 정도 연속성을 가진 민간 전승으로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서가 오히려 목격자 증언과 연속성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우리 견해로는 목격자 증언과의 이런 연속성이 오랜 세월에 걸친 공동체의 전승 전달이 아니라 목격자들에 대한 직접 접근이나, 직접은 아니더라도 한 사람 정도의 중간 전달자를 거친 접촉으로 확보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즉 편집비평과 문학비평이 복음서 저자들이 신학적·문학적 방법들을 동원하여 그들이 받은 전승을 많은 부분 형성했음을 강조함으로써, 복음서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어느 정도 수정했다는 점이다. 편집비평은 종종 극단으로 치닫기도 했다. 또한 이제는 편집비평이 공관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언어나 내러티브의 사소한 차이들을 너무 과장했다는 점도 알려졌다. 이런 사소한 차이들은 대단한 의미를 함축한 이데올로기적 차이라기보다는, 구전의 전달과 실연에서 통상적으로 발생하는 변형으로 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하지만 복음서 저자들을 정교한 기술을 구사하는 존재로 보아야 한다는 통찰은 여전히 옳다. 이들은 자신에게 전해진 전승을 질서 있게 정리하고 틀을 갖추어, 예수와 기독교 신앙에 관한 독특한 이해를 보여주는 내러티브 통일체로 만들어냈다. 여기서 목격자들에 의해 형식화되고 이야기된 전승이 상당히 작은 범위의 변화를 겪었을지는 몰라도 그 범위를 넘어 변형되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자신에게 전해진 증언들을 통합하여 예수 전기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복음서 저자들에게 남겨진 몫이었다.(제12장 중에서)
심층 기억에 살아남아 있는 직접 증언에서 증인은 발생한 사건에서 무엇이 폭로되는 것을 “본다.” 즉 증인은 경험한 사건을 하나님에 대한 계시로, 사실과 의미가 공존하는 사건으로 보아야 함을 이해한다. 하지만 기억은 다시 떠올려지고 이해는 성장해간다. 현존하는 복음서 증언 중 가장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요한복음의 증언을 보면, 여기서 기억의 직접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을 떠올리고 해석하는 지속적 과정 속에서 그 기억의 가장 완전한 의미를 숙고하고 제시하려고 한다. 요한복음이 선명히 보여주듯이 성찰적 증언은 성찰적 기억하기(reflective remembering)다. 따라서 리쾨르의 지적처럼, 이런 증언은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잃지 않는 이상, 그 증언을 계속해서 이야기해야(narrating) 한다. 리쾨르도 말했듯이, “역사적 순간이 없으면 “예언적 순간”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증언은 오직 신학적으로 역사로서 이해되는 신학만을 승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실제로 사셨던 예수를 믿는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관심사가 그분의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 자신의 나타내심을 인식하는 것이라면, 증언은 신학적으로 적절하며, 예수의 역사에 다가가는 데 신학적으로 불가결한 접근로다. 이는 증언이 역사적으로 적절하며, 이 “유일무이하게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건에 다가가는 데 역사적으로 필요한 접근로인 것과 마찬가지다. 바로 이 증언이 들려주는 예수 안에서 역사와 신학이 만난다.(제18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