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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6644751
· 쪽수 : 204쪽
· 출판일 : 2018-12-15
책 소개
목차
모순
언제나 평행선
잘못된 의심
수고 인사 없는 길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흔들리는 강
그리움을 읽다
민정
밀어내기
하이힐을 신다
그 일이 있고부터
꽃 피다
입원하다
화해
작가의 말
저자소개
책속에서
고민도 잠시, 혜정이 상체를 일으켜 창밖을 본다. 그렇게 앉아있는 모습이 모서리가 꺾인 상자처럼 어깨가 처져 있다. 힘이 없는 건 어깨뿐만 아니다. 눈 역시 살고 싶다는 의지가 없다. 프로그램에 맞춰진 자동기계처럼 이런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주부로써 빈틈없이 해도 양철처럼 요란한 노인과 용택 눈에는 늘 부족한 여자로 비춰지니 일을 해도 재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산다는 게 간이 덜된 팅팅 불은 국수처럼 맛이 없다.
혜정이 이틀 전에 백화점에서 산 하이힐을 꺼낸다. 하이힐을 산 걸 노인이 알면 잔소리할 게 뻔해 신발장에 넣지 않고 베란다 창고에 둔 것이다. 청바지에 운동화 신은 여자가 아닌 정장차림에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소리 내며 출근하는 여자가 되리라. 그 생각으로 하이힐을 산 것이다. 혜정이 하이힐을 신는다. 맨살에 닿은 감촉이 몸의 관능을 일깨우듯 힘이 솟는다.
중략
퇴근 차량이 몰리면서 도로엔 차량들이 길게 늘어져 서 있다. 용택과 나란히 합석한 것도 오래간만이다. 서로 차가 있으니 그다지 같이 탈 일이 없었던 것이다. 침묵이 흐른다. 무슨 말인가 해서 침묵을 깨야 하는데 할 말이 없는 듯 용택이 쓸데없이 마른기침만 한다. 용택과 같이 있으면 이상하게 무거운 공기에 눌린 듯 혜정이 말이 없어진다. 재잘재잘 떠들어 분위기를 훗훗하게 해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는다. 어렵고 불편한 사람처럼 마음이 가슴벽에 착 달라붙는다. 이렇게 된 지 오래되었다. 용택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접으면서 함께 있는 게 오히려 더 불편했다. 이렇게 사이가 벌어진 게 순전히 용택 탓이다. 노인 잘못을 말하면 무조건 노인을 편애할 때는 군식구처럼 밉고 싫었다. 그게 쌓이면서 말이 줄어든 것이다.
중략
혜정이 하이힐을 꺼내 수건으로 호호 입김을 넣어 닦자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이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길 위를 걷을 때마다 구름 위를 걷듯 세상이 가뿐하게 느껴졌다. 문이 사방으로 열린 듯했고 시원한 산바람이 내려와 가슴을 휘익 쓸어내리는 듯했다. 일을 시작한 게 백 번 잘했다고 자신 스스로에게 칭찬도 했다. 좀 더 일찍 시작하지 못한 게 아쉽지만 지금이라도 일을 하게 되었으니 다행히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