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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호러.공포소설 > 한국 호러.공포소설
· ISBN : 9791187239956
· 쪽수 : 376쪽
· 출판일 : 2023-10-16
책 소개
저자소개
리뷰
책속에서
중산댁이 날콩을 씹으며 입을 비죽거렸다.
“중산댁아, 너 지금 날콩 먹고 비리지?”
집주인의 말대로 날콩은 비리고 풋내가 났다.
“귀신이 들면 말이야, 날콩을 씹었을 때 꼬소하다. 신기하지?”
중산댁이 집주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형님! 나도 날콩 고소하게 먹고 싶어. 응? 내가 돈 벌면 모른 척할 사람이야? 산신각에 다달이 쌀 서 말씩 올리고, 정월엔 돼지도 한 마리씩 잡고 할게. 입심 좋은 귀신 한 마리만 내 등에 딱 붙여줘요.”
(…)
중산댁은 집주인으로부터 어둠의 귀신내림을 받았다. 서낭당 안에 하룻밤 묵힌 쌀로 지은 밥과 소뼈를 고아 기름을 떠낸 곰국 한 주발, 오래된 우물에서 퍼 올린 물 한 대접을 소반에 올렸다. 몰래 하는 굿이라 재비를 불러 장구나 징을 칠 수도 없고, 작두를 가져다놓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째 집주인의 눈이 침침하고 골치가 지근거렸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신의 제자가 되기 위해선 신어머니의 눈이 밝아야 했다. 둘 중 한 명이 부정 탈 짓을 해 악귀에게 뒷문을 열어준 건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중산댁아, 너 오늘 동토날 짓 한 거 있으면 지금 말해라. 동토가 나면 귀신내림이 아니라 푸닥거리로 쫓아내야 해. 내가 골이 아프고 눈이 맵고, 코에서 두엄냄새가 펄펄 나서 그런다. 이게 무슨 일일까.”
중산댁은 진득한 대신 둔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는 오늘 아침 서낭당에 들러, 전날 가져다놓은 쌀 한 주머니를 품에 끌어안고 급히 나오는 통에 소매로 금줄을 끊고 말았다. 마을의 액막이를 해주던 금줄이 잘려나간 것도 모른 채, 중산댁은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형님, 판 다 벌려놓고 딴소리하시기예요?”
중산댁은 집주인이 애먼 트집을 잡아 귀신내림을 거절할까봐 잔뜩 골이나 있었다.
“으이고, 설마하니 해주기 싫어 꽁무니를 뺄까! 만에 하나 잘못 되면 니 새끼들이 딱해서 그런다.”
집주인은 뭔가 기연미연한 것이 있었지만, 죽을상을 짓고 바라보는 중산댁을 외면할 수 없었다.
잘 벼린 칼날처럼 굵지만 날카롭게 치솟은 눈썹에 가늘고 긴 눈이 강물처럼 흐르는 사내. 날렵하게 흐르는 콧대 끝에는 예리한 붓으로 가볍게 찍은 것 같은 점이 맺혀 있고, 얇지만 장난기가 가득 담긴 입술에선 대금처럼 그윽한 목소리가 우러났다.
소설에서 읽었던 모습 그대로, 도령은 그림처럼 잘생긴 얼굴로 나를 능청스럽게 바라보았다. 수많은 귀신을 보았고 그중 자칭 수호령도 있었다. 하지만 이 자처럼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 영혼은 없었다. 만지면 잡힐 듯한 그가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찌르는 듯한 두통이 밀려들며 눈두덩이 들썩거렸다.
“예슬낭자한테는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악귀라고 말한 자에 대해 말이지요.”
도령이 손을 뻗자, 향낭이 빛과 은하수처럼 그의 팔을 타고 흘렀다. 그는 음미하듯 눈을 내리깔고 향을 들이마셨다.
“악귀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했죠?”
도령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