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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7413059
· 쪽수 : 276쪽
· 출판일 : 2016-11-07
책 소개
목차
하지 감자
검은등뻐꾸기
금 따는 사람들
라스베가스로 간다
땀띠물
어디선가 그 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마당가 여자
배추 3
허토
● 해설 | 식물들의 사생활/ 김나정
● 작가의 말 | 인생도, 글쓰는 것도 곡선이다
저자소개
책속에서
노름을 안 하고도 얼마든지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볼 양이면 물론 핑계일 수 있겠지만 남편이 노름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 한 몫 단단히 했다. 유난히 이곳은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들판이 꽁꽁 얼어 있는 겨울철이 되면 어디 한 판 벌어지는 것이 없느냐고 승냥이처럼 눈을 번뜩이는 것이 일이었다. 한 판 벌어지는 곳을 찾아 한 자리 꿰차고 앉아서 몇 십만 원에서 몇 백만 원까지의 돈을 잃어야만 노름판이 일단은 끝난다. 물론 매일 돈을 잃기만 하면 결국에 노름에서 손을 끊는 장한 사람도 생길 것이지만 가끔 몇 백만 원씩 딴다는 것에 함정이 있었다. 그 동안 쏟아부은 자금은 생각도 않고 지금의 현실인 자기 앞에 퍼렇게 쌓여 있는 지폐를 보니 천하를 얻은 것처럼 우쭐대고 퍽퍽 기분 좋게 그 돈을 탕진할 뿐이었다. 꼭두새벽부터 배추 작업이나 무 작업을 나가 일당으로 몇 만 원씩 버는 그네들의 친구들은 천하에 좀팽이고 한심한 작자가 되어 버렸다.
남편은 돈을 따게 되면 다음의 원활한 자금순환을 위해 그만 아는 모처에 일부 숨겨두고 나머지는 그야말로 물 쓰듯이 썼다. 그 모처라는 것도 자기 딴에는 엄청나게 머리를 굴렸겠지만 그것처럼 찾기 쉬운 곳도 없었다. 처음에는 안방 장롱 위에 있는 종이상자 밑에 숨겨두더니만 내가 십만 원짜리 수표를 한 장 슬쩍하고부터는 그곳에는 절대로 안 숨겼다. 다음 장소로는 자기가 매일 끌고 다니는 마티즈 운전석 거울 뒤에 자동차등록증과 같이 숨겨 두었다. 거기서도 한 장 슬쩍하려다가 이렇게 되면 점점 음지로 숨지 싶어서 가끔 얼마 있는지 뒤져 보기만 할 뿐이었다. 노름 실력이 젬병인지 그곳에 돈이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런 날은 가게 통장에서 알토란 같은 돈이 슬쩍 빠지는 날이기도 했다. 돈을 따게 되면 그 동안 야금야금 통장에서 빼 쓴 것은 전혀 계산에 넣지 않고 지금의 상황만 파악되는 모양이었다. 열 받아 씩씩거리는 마누라 기분 좀 풀어줘도 괜찮겠지만 노름해서 딴 돈은 돈으로 취급하지 않는 별난 종자라 눈앞에서 허벅지 내놓고 살랑거리는 다방 레지 입으로 다 들어간다고 볼이었다.
어떤 날은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어차피 할 수밖에 없는 노름 묵인해주고 돈을 좀 뺏어서 그 동안 구멍난 통장이라도 얼마쯤은 메워야 하지 않나 싶을 때도 있었다. 여우 같은 마누라랑은 살아도 곰 같은 마누라랑은 살 수 없다는데 너무 고집스럽게 원칙만 내세우다가 통장만 거덜나는 게 아닌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난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원칙을 고수하기로 했다. 젖내 나는 막냇동생을 업고 근댓국을 끓일 때부터 노름하는 인간하고는 그 사람이 아버질 망정 사람으로 대하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남편이라고 면죄부가 성립될 수가 없었다.
통장에서 돈이 좀 많이 빠진 날에는 어차피 이판사판이니 있는 돈 몽땅 털어서 남편에게 휙 던져주고는 ‘이 돈 다 쓰고 와서는 노름에서 손떼. 그래도 또 노름방에 가면 그때는 내가 당신 안 봐’ 그렇게 하고 싶었다. 동생에게 슬쩍 자문했더니 그렇게 하면 십중팔구 고쳐지더라고 했다. 놀기 좋아하는 자기에게 마누라가 그렇게 나오자 가슴이 뜨끔하더라고 했다. 하지만 마누라가 눈만 한 번 희번덕거려도 설설 기는 동생에게는 그 방법이 통했겠지만 능갈치는 남편에게는 안 통할 것 같다. 그것보다도 그나마 근근이 유지하고 있는 돈마저 몽땅 날릴 것 같아서 내가 그럴 용기가 안 생겼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밤이면 난 거리의 부랑자가 되었다. 세상 모르게 자는 아이를 둘러업고 남편이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나섰다. 동네는 작은데 당구장은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일곱 군데도 넘는 당구장을 다 돌아다녀 보았지만 남편의 모습은 오리무중이었다. 당구장마다 경찰의 단속을 피하고자 두꺼운 커튼으로 빛을 차단하고 출입문마저 닫아걸었다. 죽을 용기를 내어 당구장 출입문을 잡아 당겨보면 약간 흔들릴 뿐 견고한 철옹성처럼 꿈쩍도 안 했다. 하긴 당구장 문이 덜컹 열린다면 그것은 더 문제일 것이다. 내 간보로는 남편도 제대로 못 불러보고 도망쳐 나올 것이다.
― 「라스베가스로 간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