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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소설/시/희곡 > 한국소설 > 2000년대 이후 한국소설
· ISBN : 9791187413202
· 쪽수 : 244쪽
· 출판일 : 2017-09-20
책 소개
목차
작가의 말/ 4
그림자 정원/ 9
달의 뒤편에 드리운 시간들/ 73
금[線]/ 127
동행/ 175
해설 | 정원에 숨긴 말들.김나정/ 229
저자소개
책속에서
그 해 사월의 달력 속에는 비녀를 꽂고 한복이 맵짜한 모습의 여배우가 물이 오른 화려한 꽃그늘을 배경으로 방긋 웃고 있었다. 여배우의 흰 가르마는 여름날 폭양 속의 쪽 곧은 신작로처럼 선명했다. 그 밑 세 번째 토요일 칸에는 ‘성주네 집 가는 날’이라는 글씨와 함께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가 세 겹이나 쳐 있었다. 덧칠할 만큼 강조되었던 그 표시는 무자비한 표식이 되고 말았다.
내게는 피를 나누었음에도 얼굴도 본 적 없는 언니가 있었다지만 그 사월의 어느 날 이 세상에서 참혹히 사라졌다. 그때 언니의 나이는 열다섯이었다. 그에 대해 세상은 바람 속의 한낱 티끌인 듯 무관심했다. 신문에서만 한 귀퉁이에 짤막한 몇 줄을 할애했다. 그러나 식구들에게 언니의 사라짐은 거대한 재앙이었으며 한 우주의 소멸이었다. 물리적으로 영원히 사라졌음에도 삭제될 수 없는 완강한 사실이었고, 봄날 아지랑이처럼 형체도 없이 수시로 어른거렸다.
― 「그림자 정원」 중에서
어두운 밤이었어요. 잠자리가 바뀐 데다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루다 설핏 잠이 들었어요. 갑자기 뭔가를 때려 부수는 소리가 났어요. 이어 술에 잔뜩 취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었어요. 불 켜지 않은 방안에서 술 취한 남자가 신발을 신은 채 엄마의 몸을 짓밟았어요. 그 광경을 대문 밖 가로등 불빛이 연극 무대의 조명처럼 비추었어요. 어느 순간 발길질을 당하던 엄마가 남자에게 달려들며 다리를 물었어요.
그래, 너 죽고 나 죽자. 이 개 같은 놈아!
어이쿠, 이 쌍년아!
나는 조용히 그 집을 나왔어요. 새벽 거리는 춥고 황량했어요. 낯선 도시의 어두운 새벽에 또 나 혼자만이 버려졌어요. 같은 어둠이라 해도 새벽 어둠은 한밤중과 다르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밤이, 숨어 있는 많은 것들과 함께 숨결을 뿜어내는 시간이라면 새벽은 그 많은 것들이 제각기의 자리로 돌아가 냉담한 모습을 하는 시간이었어요. 지난 새벽들이 모질게 할퀴며 떠올랐어요. 홀로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그리워했고 억울하고 슬펐던 시간들이었어요.
갑자기 욕지기가 밀려들며 많은 술을 마신 것처럼 속이 거북했어요.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목젖을 마구 휘저었어요. 아무것도 남아 있지 못하게 다 토해내고 싶었어요. 그처럼 머릿속도 손가락을 후벼넣어 구석구석 달라붙어 있는 찌꺼기 기억들을 다 파내버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토해지지 않고 쓴 위액만 게워대느라 고통스러웠어요.
토악질로 눈물이 그렁한 스물아홉 살 여자의 눈에 흐릿하게 맞은편이 보였어요. 그곳은 서늘하고 어두웠어요. 따뜻하고 밝은 빛이라고는 전혀 들 수 없어 절망의 파편들이 날을 세우고 있었어요.
이른 새벽에 혼이 빠져 나간 것 같은 엄마 곁에서 어두운 뒤란을 막막히 보고 있는 일곱 살 여자 아이가 있었어요. 그 아이는 허허로운 바람결 같은 그리움의 예감에 한없이 암울했어요.
새벽의 음습한 후미진 귀퉁이에선, 숨어들어 잔뜩 웅크린 아홉 살 여자 아이가 있었어요. 무지막지한 폭력에 쫓겨 무릎에 머리를 묻은 채, 공포 때문에 죽어라 귀를 막고 사시나무처럼 떨었어요.
을씨년스러운 늦가을의 새벽 빗속에선,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열두 살 여자 아이가 비를 맞으며 슬프게 서 있었어요. 그 모습은 신고에 찌들어버려 제 풀에 지친 사람처럼 팍팍했어요. 눈이 사무치게 무엇을 찾고 있었어요.
엄습하는 새벽 추위 속에 떨고 있는 열다섯 살 소녀도 있었어요. 시퍼렇게 멍든 얼굴로 입가는 찢어져 피가 맺혀 있었어요. 터져 나오려는 울음자락을 누르며 앙다문 입매에 억울한 서러움이 범람했어요.
스물아홉 살 여자는 그런 아이들을 향해 애타게 손짓했어요.
얘들아, 따뜻하게 안아줄 테니 이리 와! 어서 와!
하지만 아이들은 스물아홉 살 여자를 못 보는지 막막한 어둠만 바라보았어요. 여전히 그리워했고, 여전히 공포에 떨었고, 여전히 슬퍼했고, 여전히 억울하고 서러운 울음자락을 삼켰어요.
스물아홉 살 여자는 그만 무릎이 꺾였어요. 보상 받지 못할 시간들과 가혹한 삶의 무거움에.
― 「달의 뒤편에 드리운 시간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