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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조선사 > 조선중기(임진왜란~경종)
· ISBN : 9791187949428
· 쪽수 : 158쪽
· 출판일 : 2019-11-10
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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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책속에서
이순신은 스물여덟 살 되던 해 가을에 훈련원 별과 시험을 보았다.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며 땅에 떨어진 그는 왼쪽 다리뼈가 부러졌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이순신이 죽었다고들 말하였다. 하지만 그는 한쪽 발로 일어서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버드나무 껍질로 부러진 다리를 싸맸다. 시험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를 장하게 여겼다.
이순신은 서른두 살 봄에 정기 무과시험式年試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다. 그는 무과 경전을 읽고 뜻을 풀이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이윽고 황석공黃石公의 고사*에 이르자 시험관이 물었다.
“장량張良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가 놀았다고 하였으니, 장량은 과연 죽지 않았을까?”
이순신이 대답하였다.
“삶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자치통감강목》**에도 ‘임자년壬子年에 유후留侯 장량이 죽었다고 하였으니, 어찌 신선을 따라갔다 하여 죽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다만 공연한 말일 따름입니다.”
그러자 시험관들은 서로 쳐다보며 탄복하였다.
“이것을 어찌 무인이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이순신은 벼슬길에 오른 영광을 아뢰기 위해 조상의 묘에 성묘하러 갔다. 무덤 앞에 세운 석인상石人像이 넘어져 있는 것을 보고, 하인 수십 명을 시켜 일으켜 세우게 하였다. 하지만 돌이 무거워 여럿의 힘으로도 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순신이 하인들을 꾸짖어 물러서게 하고는 웃옷을 벗지도 않은 채 돌을 등에 지고 힘을 쓰니, 석인상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보고 있던 사람들이 힘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들 하였다.
이순신은 본디 천성이 나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비록 한양에서 나고 자랐지만 아는 이가 드물었다. 오직 서애 유성룡만이 같은 동리의 어릴 적 동무라서 언제나 그가 장수의 재목임을 알아주었다.
율곡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을 적의 일이다. 이순신의 이름을 듣고 또 같은 종씨임을 알게 된 이이는 유성룡을 통해 한번 만나고 싶다고 청하였다. 유성룡은 이순신에게 이이를 만나보라고 권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나와 율곡이 같은 성씨라서 만나 볼 수 있지만, 그가 이조판서로 있는 동안에 만나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끝내 찾아가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이 되었다. 이때 함경감사가 되어 부임한 이후백이 각 진을 순행하며 변방 장수들의 활쏘기 능력을 시험하였는데, 장수들 가운데 벌을 면한 자가 드물었다. 하지만 동구비보에 들른 감사는 평소에 이순신의 평판을 듣고 있던 터라, 매우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래서 공이 조용히 감사에게 진언하였다.
“사또의 형벌이 너무 엄해서 변방 장수들이 손발 둘 곳을 모를 지경입니다.”
감사가 웃으며 대답하였다.
“그대의 말이 옳다. 그러나 내 어찌 옳고 그른 것을 가리지 않고 그러겠는가.”
1579년 봄에 임기가 차서 서울로 돌아와 훈련원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병조정랑 서익이 자기와 가까운 사람을 순서를 건너뛰어 참군參軍으로 올리려 하였다. 이순신은 담당관으로서 허락하지 않으며 서익에게 말하였다.
“직급이 아래인 사람을 순서를 건너뛰어 위로 올리면, 당연히 승진할 사람이 승진하지 못하게 되니 공평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법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서익은 위력을 내세워 자신의 뜻을 강행하려 하였으나, 이순신은 굳게 버티며 따르지 않았다. 서익은 크게 화를 냈지만, 감히 자기 마음대로 임명할 수는 없었다. 온 훈련원 사람들이 이를 가리켜 말하였다.
“아무개는 병조정랑이면서 일개 봉사奉事*에게 굴복당하고 말았구나.”
서익은 이 일로 마음에 큰 앙심을 품었다.
이순신이 훈련원에 있을 때,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庶女를 이순신의 첩으로 주려고 하였다.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일언지하에 중매를 거절하였다.
“벼슬길에 갓 나온 사람이 권세가의 집에 발을 들여놓아서야 되겠는가.”
그해 겨울에 이순신은 충청병사의 군관이 되었다. 그가 거처하는 방에는 옷과 이불밖에 가재도구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부모님을 뵈러 고향에 다녀올 때는 반드시 남은 양식과 반찬을 기록한 다음 양식 담당자에게 돌려주었다. 이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은 충청병사는 그를 사랑하고 존중하였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술에 취한 충청병사가 이순신의 손을 끌며 어느 군관의 방으로 가자고 하였다. 그 사람은 충청병사와 평소부터 친한 사이라서 군관으로 와 있는 사람이었다. 이순신은 대장이 사사로운 일로 군관을 찾아가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여, 짐짓 취한 척 충청병사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사또, 어디로 가자고 하십니까?”
상황을 깨달은 충청병사가 주저앉으며 말했다.
“내가 취했군, 취했어.”
1580년 가을에 이순신은 발포 만호가 되었다. 이순신을 시기하여 참소하는 말을 들은 전라감사 손식이 이순신에게 벌을 주기 위해 순행차 능성綾城*에 들렀다. 그는 이순신에게 자신을 영접하라고 불러다가 진법陳法 서책을 강독하게 하고 진형도를 그리게 하였다. 이순신은 강독을 마친 다음 붓을 들고 아주 정교하게 진형도를 그렸다. 손식이 한참 동안 몸을 꾸부리고 들여다보고는 말하였다.
“어쩌면 이렇게도 세밀하게 그리는고.”
그리고 이순신의 조상이 누구인지 물었다.
“내가 진작 몰라본 것이 한이로구나.”
손식은 그 후로는 이순신을 정중히 대우하였다.
이순신은 1545년(인종 원년, 가정嘉靖 24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자정 무렵子時 한성 건천동 자택에서 탄생하였다. 이순신을 보고 점쟁이가 말하였다.
“이 아이는 나이 50이 되면 북방에서 부월斧鉞을 손에 쥐는 대장이 될 것이다.”
스물두 살 되던 해 겨울에 때 비로소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동료들 가운데는 완력이나 말타기, 활쏘기에서 그를 따를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순신은 성품이 고결하고 늠름하였다. 그리하여 같이 어울리던 무사들이 자기네끼리는 종일 농담을 주고받고 희롱하면서도, 이순신에게만은 감히 ‘너, 나’ 하지 못하고 언제나 공경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