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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보
· 분류 : 국내도서 > 역사 > 세계사 일반
· ISBN : 9791188635580
· 쪽수 : 236쪽
책 소개
목차
vital point 1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오래 살았다면 자신이 지배한 광대한 영토를 질서정연하게 다스렸을까?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등 고대 문명과 관련 깊었던 마케도니아 왕국 |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와 페르시아제국을 제패할 수 있었던 비결은 ‘점’을 확보하는 방식의 지배가 아닌 ‘면’을 확보하는 방식의 지배 덕분이었다? |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인더스 문명이 서로 활발히 무역했다는데,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 투탕카멘 왕의 마스크에 박힌 보석 라피스라줄리가 인더스 문명에서 수입한 것이었다고? |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을 통일하여 오리엔트 세계를 지배한 ‘철’의 왕국 아시리아 |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의 번영을 가능케 한 ‘왕의 길’이 역설적으로 훗날 알렉산드로스를 끌어들여 패망을 앞당겼다? |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오래 살았더라도 그가 전쟁으로 지배한 광대한 영토를 질서정연하게 다스리지 못했을 것으로 보는 근원적 이유
vital point 2
바이킹은 왜 콜럼버스보다 500년 먼저 아메리카대륙에 발을 디디고도 ‘최초 발견자’로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까?
바이킹의 무역은 약탈인가 무역인가? | 콜럼버스보다 500년 일찍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고도 ‘최초 발견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 | “무함마드 없이는 샤를마뉴도 없다!” | 유럽과 이슬람 세계를 연결하는 상업 네트워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바이킹 | 바이킹의 교역로가 없었다면 한자동맹의 번영도 없었을 것이다?
vital point 3
신항로 개척시대 초기, 포르투갈이 아시아의 향신료보다 더 눈독 들인 물품은 무엇이었을까?
대항해시대 초기 포르투갈은 아시아의 향신료가 아니라 ‘아프리카의 황금’을 노렸다는데? | 카르타고 명장 한니발이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끌고 간 코끼리는 인도코끼리였을까 아프리카코끼리였을까? | 메카 순례길에 엄청난 양의 금을 뿌리고 다녀 카이로에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던 ‘역사상 최고 부자’ 만사무사 국왕 | 뱃멀미로 배에 타지 못했던 ‘항해 왕자’ 엔히크 | 고대의 가장 위대한 ‘신항로 개척자’는 누구였을까? |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에 도달하기 전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사이를 사람들이 오갔다는 주장은 과연 사실일까? | 향신료 운송로가 바뀌며 이탈리아 경제가 치명적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
vital point 4
16세기 전국시대에 일본이 유럽의 군사혁명을 불가능에 가까운 속도로 따라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회’의 무기 판매 덕분이었다는데, 과연 사실일까?
신항로 개척시대 초기에 포르투갈과 예수회는 무슬림의 결정적 도움으로 탄탄한 상업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다는데? | 무슬림 상인이 제패한 아시아의 바다 | 예수회가 ‘죽음의 상인’이라는 악명 높은 이름으로 불린 까닭 | 오다 노부나가는 예수회와 관계를 단절했을까?
vital point 5
근대 유럽의 경제 성장이 ‘근면’과 ‘금욕’을 중시하는 프로테스탄트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허구인 이유는?
구텐베르크 활판 인쇄술이 없었다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없었다? | 근대 유럽의 경제성장이 ‘근면’과 ‘금욕’을 중시한 프로테스탄트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는 시각이 잘못된 프레임인 이유 | 15세기 근대 유럽에서 상업은 어떻게 그토록 크게 발전할 수 있었을까? | 상업 발전이 언어 발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 | 활판 인쇄술 보급으로 등장하여 근대 유럽 비즈니스를 송두리째 바꾼 상업 안내서 | 유럽의 상업 시스템과 메커니즘은 어떻게 국제 표준으로 자리 잡았나
vital point 6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과연 ‘역사의 페이스메이커’였을까?
15~16세기는 물론이고 18~19세기까지 세계 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두 나라, 포르투갈과 스페인 |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세계를 제멋대로 양분한 두 개의 조약,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사라고사 조약 | 포르투갈의 실체가 ‘상인의 제국’인 까닭 | 스페인의 최전성기와 쇠퇴기를 모두 경험한 국왕, 펠리페 2세 | 태평양 무역의 개척자가 스페인이라고? | 사실은 ‘좀처럼 쇠퇴하지 않은 두 나라’, 포르투갈과 스페인
vital point 7
천재 수학자 페르마가 고안한 ‘확률론’이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보험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페르마의 확률론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보험 시스템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데? |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오로지 편지로만 확률론 분야를 함께 개척한 두 천재, 파스칼과 페르마 |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도 해상보험이 존재했다는데? | 해상 운송 사업에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를 분담하기 위한 한자동맹의 시스템, 파르텐레더라이 | ‘근대적 기업’의 탄생 | 핼리 혜성과 생명보험 | 커피하우스에서 세계 최고의 보험조직으로
vital point 8
18~19세기에 영국은 천문학적 부채, ‘남해 버블’ 사건, 수많은 전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승승장구할 수 있었을까?
근대 세계의 가장 막강한 나라 대영제국이 사실은 부채 대국이었다? | 영국은 어떻게 천문학적인 부채에 시달리면서도 재정 파탄을 면할 수 있었을까? | 빚은 영국이 더 많았는데, 영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난 이유 | 똑같은 ‘버블 사건’의 위기에 대한 전혀 다른 대응으로 백팔십도 다른 운명을 맞이한 두 나라 영국과 프랑스 | 18~19세기에 영국은 어떻게 수많은 전쟁의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을까?
vital point 9
산업혁명이 시작된 후 오랫동안 인도에 비해 한참 뒤처졌던 영국의 면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세계사를 바꾼 상품으로 ‘면’을 빼놓을 수 없는 결정적 이유 | 15세기 말, 인도 시장에 진출한 유럽 상인의 눈이 휘둥그레진 까닭은? | 모직물과 달리 면직물이 세계화에 적합한 이유 | 산업혁명이 시작된 후로도 오랫동안 영국의 면 산업이 인도의 그것에 비해 많이 뒤처져 있었다는데? | 영국이 면 생산 체제를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던 결정적 비결은?
vital point 10
‘중립국’은 전쟁을 반대하는 국가가 아니라 전쟁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국가다?
근세 유럽이 끊임없이 서로 전쟁을 벌이면서도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비결 | 함부르크에 온갖 민족, 온갖 종교의 사람들이 몰려든 이유는? | 18세기 중반~19세 초반, 전 유럽을 통틀어 가장 역동적인 도시였던 함부르크 |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의 최대 수혜국은? | 미국이 ‘중립’을 표방한 진짜 이유 | ‘중립국’은 전쟁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익을 챙기려는 국가다?
vital point 11
19세기에 범선을 몰아내고 유럽 각국의 주요 운송 수단이 된 증기선은 어쩌다 제국주의의 첨병이
되었나?
19세기 유럽 각국이 산업화로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었음에도 신대륙 아메리카로 떠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진 까닭은? | 범선을 압도하는 증기선의 가장 큰 장점은? | 제국주의의 주요 운송 수단이 돼버린 증기선 | 증기선이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다 | 점점 더 좁아지는 세계 |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독립을 도운 증기선
vital point 12
‘영국이 산업혁명 덕분에 19세기 세계를 지배하는 헤게모니 국가가 될 수 있었다’라는 논리가 허구인 이유는?
‘헤게모니 국가’의 결정적 한 방은? | 생각보다 벌이가 시원치 않았던 산업혁명 | 사람보다 물건보다 빠르게 | 왜 수수료 비즈니스는 돈을 벌까? | 세계사 속의 전신망
vital point 13
중국은 과연 미국에 이어 헤게모니 국가가 될 수 있을까?
오늘날의 미국을 헤게모니 국가라고 답하기 어려운 까닭 | 15세기 초 명나라 황제 정화의 대원정 루트를 그대로 답습한 중국의 일대일로 | 중국이 영국이나 미국처럼 헤게모니 국가가 되는 데 방해되는 가장 치명적 약점은? | ‘자국 우선주의’의 한계에 부닥친 중국
리뷰
책속에서
오랫동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이 동서 문화를 융합해 헬레니즘 문화를 탄생시켰다는 주장이 힘을 얻어왔다. 물론 그의 정복 사업이 많은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촉진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기는 해도 헬레니즘 문화에 대한 과거의 평가, 즉 ‘우수한 그리스 문명이 오리엔트와 인더스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라는 견해는 오늘날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그보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전에도 동서 문화·경제 교류는 꾸준히 있어 왔고, 그러한 과거의 유산이 오히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앞서 가던 그리스에서 후진적인 오리엔트와 인도로 문명을 전파했다’는 구도가 아닌(실제로 오리엔트의 경제와 문물이 그리스보다 훨씬 풍요로웠다) 서로에게 없던 것을 얻는 ‘더불어 이로운 교역 모델’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실제 역사에 더 가깝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323년의 일이다. 이후 그의 거대한 제국은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이집트, 셀레우코스왕조의 시리아, 안티고노스왕조의 마케도니아 세 나라로 분열되었다. 한번 가정해보자. 만약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렇게 일찍 눈을 감지 않았더라면 그의 제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더라도 그토록 드넓은 영토를 오랫동안 제대로 통치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으로 나는 본다. 왜냐하면 광대한 영토를 질서정연하게 다스리는 데 필요한 체제와 지식, 경험 등이 당시 마케도니아로 대표되는 그리스에는 결정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바이킹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꽤 오랫동안 바이킹이 전 유럽을 통틀어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인정받았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바이킹은 유럽을 확실히 지배하지 못했다. 이유가 뭘까? 그들은 정복과 통치를 위한 체제를 체계적으로 정비하지 못했다. 그들이 정복 지역을 통합하고 거대한 통일제국을 완성하는 데 실패한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는 바이킹이 약탈자보다는 상인에 더 가까운 존재였으리라 유추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인은 상거래로 이익을 얻는 것이 주목적이므로 영토를 차지하고 다스리고 경영하는 일에는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더구나 바이킹은 신대륙에서도 정착에 성공하지 못하고 철수했기에 오늘날까지도 최초의 ‘신대륙 발견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